〈 503화 〉 503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
* * *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과 함께 책상 위에 있는 스크린에 엄청난 양의 글과 그림들이 빼곡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시작은 조디악 측 인물.
“이름은 고민태, 나이는 60세로
생명 진보 기술 연구소의 대표이자, 세계 최고 대학교 중의 하나인 콜킨스 대학교의 교수입니다.”
화면에 떠 있는 자의 얼굴은 도저히 60세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많아 봐야 20대 중반.
농담이 아니라, 20대 초반이라고 하면 믿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그리고 외형에 비해서 사회적 지휘가 어마어마한 인간이었다
그야 주인공 치고는 좀 심심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 생각은 아르모니아의 설명을 들으면서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
“전 세계 정·재계의 주요 인물들이 그의 수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손이 넓습니다.”
“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지? 고작 해봐야 연구소 대표랑 대학교 교수라며? 그야 그 직책이 대단하긴 하지만….”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부분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으면 오히려 연구소 대표나, 대학교 교수가 들러붙어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단순한 이유는 단순하면서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젊음입니다. 그가 개발한 약 중에 인위적으로 사람의 젊음을 되찾아주는 약이 존재합니다.”
“캬… 역시 돈과 권력도 젊음 앞에서는 벌벌 기는구만….”
수명을 늘리는 것조차도 파급력이 어마어마할 텐데 진짜 젊음을 되찾아주는 거라면… 오히려 전쟁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긴 저 정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라면 그런 상황도 잘 고려해서 진행한 거겠지만….
일단 조디악 인물에 대해서는 파악 완료.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최근 정·재계 인물들이 한둘씩 그의 손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배신?”
“거의 비슷합니다. 그 때문에 그가 진행하는 연구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진행하는 연구는 인류를 한 단계 진화시키는 에볼루션 프로젝트.
에볼루션 프로젝트는 그저 인간의 수명을 늘리고, 건강하게 만드는 수준이 아닌… 진짜 인류라는 종의 진화를 이루려는 연구였다.
“뭐, 대충 감이 왔네. 그동안 돈이 남아돌고, 권력의 비호 아래에 연구가 문제가 없었는데, 최근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기밀도 계속 유출되고, 사람도 떠나가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한가지 알아낸 사실은 협박하는 존재가 있었다는 겁니다.”
“…협박?”
미친놈인가? 최고의 돈과 권력을 지닌 자들을 협박했다는 거네?
그리고 그 미친놈의 정체가 아마도….
“성전의 인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정체를 밝혀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저희가 그자를 찾아야 합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그리고 여기서 그 바늘 찾기를 더 힘들게 하는 요소가 바로 초기 신원이었다.
지금까지는 괜찮은 신원을 받아서 활동했었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에넬을 써서 임의로 만들어야 했다.
“1만 에넬과 10만 에넬로 만들 수 있는 신원을 추천해 드립니다.”
“씁… 10만은 패스하자.”
“그렇다면 1만 에넬로 설정하겠습니다.”
당연히 10만 에넬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수중에 있는 에넬이 10만인데 이거 전부 썼다가 문제가 생기면 정말 답이 없어진다.
“그럼 브리핑 종료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임무지에서 차근차근 더 설명하겠습니다.”
“좋아! 가자!”
100만 에넬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
..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개판을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100만 에넬 개새끼….’
내가 에넬을 향해 욕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돈 없어서 세상을 욕하는 백수 있지 않은가? 그들의 심경과 다를 바 없었다.
백수라고 모두 돈을 욕하지 않을 거라고?
아니다. 욕한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와… 설마 백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지금 내 신분이 백수이기 때문이다.
1만 에넬로 만들어낸 신분은 직장은커녕 가족과 친척도 없는 고아 출신의 백수였다.
심지어 그 백수가 살던 곳은 더 가관이었다.
‘그래도 집은 있어서 다행이네. 개판이라 문제지.’
5층짜리 빌라에 위치는 4층.
15평 투룸.
그래도 여기 전 주인은 먼지에게 무상으로 집을 넘겨준 착한 임대인일 뿐, 아직 벌레에게까지 집 지분을 넘겨주지 않았다.
벌레가 있었다면 절대 이곳에서 자지 못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 신분이 최선이라….]
‘전에도 말했지만, 사과하지 마. 집이 개판인 게 문제지, 집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일주일만 버티면 된다면서?’
[그렇습니다. 조디악 측에서 시간만 기다려준다면 완벽하게 세탁한 자금을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현재 조디악의 인물이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돈이 갑자기 증발한 건 아니었다.
신원 위조는 힘들어도 내가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돈은 일주일 안에 어떻게든 마련해주겠다고 연락이 온 상황이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서 최대한 비밀스럽게 돈을 건네주겠다고 조디악을 통해 연락이 왔다.
일단 내가 일주일 동안 해야 할 일은 이 세계관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찰하는 것이었다.
‘원래 주인 새끼는 도대체 뭐 하던 놈이야?’
[이름은 이민수, 현재 기준 26살입니다. 키와 체형은 수호 님과 같습니다. 외형은 다르지만, 1년 전에 죽은 터라 누구도 만나지 않아서 그동안 변했다고 설명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죽었대?’
[과격 시위대 소속으로 연구소에 몰래 잠입했는데, 박사의 보안 시설에 걸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시신은 최대한 비밀스럽게 처리했다고 말했습니다.]
‘얼씨구….’
죽은 건 안타깝지만, 죽을만했네. 왜 남의 시설에 몰래 들어가 미친놈아….
즉, 죽은 지 1년이 지났고, 주변 지인도 전혀 없는 상황.
에넬을 이용해서 변조한 건 지문뿐이었다.
일단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럼….
“…일단 청소부터 하자.”
먼지가 지배한 이 집을 해방할 시간이었다.
..
..
나는 깔끔해진 집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레나, 언제나 고마워.”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간단히 먼지만 털어내는 것이라면 모를까 아까의 상태를 청소하는 건 나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였다.
결국 나는 레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을 청소하면서 알아낸 사실이 있었는데, 전기와 수도, 가스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1년 동안 집을 비워도 기본적인 요금은 나갈 것인데, 기본적인 시설에 문제가 없다는 건 통장에 돈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죽기 전에 생활비 정도는 가지고 있었나 보네. 신기하네. 24살에 전세가 아닌 자가로 살았을 정도면 나름 열심히 살았던 거 같은데….”
그런데 왜 백수?
[원래는 프로그램 개발자로 성실하게 일하던 인물이었지만,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시위를 보면서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습니다.]
2년 전에 불현듯 퇴직하고, 시위대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게 아르모니아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결국 추측이 전부였다.
죽은 녀석에 대해서 뭘 알 수 있겠는가….
“죽은 녀석…. 잠깐!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능력이라 그런지 또 까먹고 있었다.
나는 즉시 영혼 소환술을 사용해서 이 신분의 원래 주인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내 눈앞에 멍청한 표정을 지은 영혼 하나가 튀어나왔다.
(흐어엇! 뭐, 뭐야!?)
“안녕, 이민수 씨?”
(다, 당신은 누구야!? 그리고… 여, 여긴 내 집이잖아!)
좋아. 일단 본인 확인 완료.
나는 딱히 남자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한 뒤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고… 대충 무당 같은 거라고 생각해.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간단해. 당신에 대해서 좀 알려줘.”
(나… 나에 대해서?)
처음에 나를 경계하던 이민수는 되려 내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당신 누군데 내 집에… 그리고 나를 어떻게 여기에… 아! 혹시 나 살아날 수 있는 거야?)
“거참 말 많네….”
매정해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지만, 억지로 대화를 이끌어갈 이유도 없었다.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거라고는 간단한 정보뿐인 녀석에게 굳이 시간을 내어줄 이유가 없으니까.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거라면 그냥 다시 보내줄게.”
(자, 잠깐만… 아, 알았어. 일단 질문해…. 대신 무슨 상황인지 좀 알려줘….)
이민수라는 녀석은 내가 현세에 자신을 소환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눈치껏 낮은 자세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좋다.
“좋아. 일단 당신에 대해서 최대한 설명해봐. 죽기 직전에 뭐 했어?”
(나… 나는 죽기 직전에 인류 보호 협회 출신이었어.)
인류 보호 협회.
협회라는 단어와 별개로 그냥 고민태의 연구를 방해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과격한 시위 단체였다.
성실하게 직장에 다니던 이민수는 우연히 협회 인물의 꼬드김에 넘어가 퇴직한 후, 그 단체의 소속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번 잘못된 길로 들어서자 뒤도 보지 않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위험한 명령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에 설립된 고민태의 연구소 잠입이었다.
(하아… 지금 와서 미치도록 후회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지.)
“….”
그래도 죽고 나서 정신을 차린 건 다행이었다.
만약 지금도 정신을 못 차려서 내 앞에서 난리 쳤다면, 당장 뇌속성 마법으로 지진 다음에 사후 세계로 보냈을 테니까.
(당신은… 나를 못 살려주겠지?)
“당연한 소리. 죽은 사람을 살리는 재주까지는 없어.”
(그래… 당연한 거겠지.)
심지어 죽고 나서도 현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마음에 드는 구석은 있었다.
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말 잘 듣는 데 싫어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이민수는 갑자기 내 옆에 있던 레나를 힐끔 바라보기 시작했다.
(….)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레나 정도의 수준이라면 지금 당장 밖에 나가서도 무수한 시선을 받을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시내에 돌아다니면 무수한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연예인이나 모델을 하지 않겠냐고 스카우트할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지녔으니까.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 새끼야, 적당히 봐라. 어디 남의 여자를….”
(히익! 미, 미안!)
아까까지 마음에 들었는데, 동정 짓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까 정나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여튼 대충 알았어. 그럼 그 인류 보완 협회?”
(인류 보호 협회야….)
“아, 미안 다른 거랑 헷갈렸네. 하여튼… 거기에 대해서 좀 알려줘.”
(….)
이민수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알았어.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오, 협조적이네. 좋아. 그럼….”
(대신 부탁이 하나 있어.)
그럼 그렇지….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이민수는 내 귀찮음이 잔뜩 머금은 표정을 보고는 흠칫 놀라면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혀, 협회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거 보면 보복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보복… 이라고 할 건 없고 그냥 알고 싶은 것뿐인데?”
나는 그 인류 보호인지, 인류 보완인지 하는 협회 이름도 오늘 처음 들었다.
내가 그 협회에 대해서 알고 싶은 이유는 그저 주인공 탐색의 일환일 뿐이었다.
‘이런 놈을 연구소에 잠입시킬 정도면 뭔가 있어 보여.’
그냥 얼간이 집단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둬서 나쁠 건 없었다.
(부탁이야! 만약 당신이 위험해진다 싶으면 내가 포기할게!)
“흐음….”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어. 한꺼번에 알려주려고 해도 설명도 쉽지 않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기억이라는 건 직렬로 나열된 꺼내기 쉬운 체계적인 시스템이 아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 섞여 있으면서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잘 숨어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시스템이었다.
당장 모든 것을 말하라고 해도 이민수라는 녀석이 말해줄 수 있는 사실은 드문드문 어설프게 구멍이 나 있을 것이다.
즉, 또 소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좋아. 일단 부탁이 뭔지나 들어보자.”
(오오! 고마워!)
귀찮거나 불가능할 시에는 안 들어주면 그만이다.
본인도 어렵다고 판단하면 포기한다고 했고….
이민수는 환호를 지르더니, 간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를… 나를 이 꼴로 만든 녀석에게 복수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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