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2화 〉 502화 가족과 가족의 사이
* * *
그저 여행을 왔다는 추억만 남기고 갈 줄 알았던 페르온 공국에 와서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다.
오웰과 비아트릭스, 그리고 페르온 공작.
레나와 베아트리체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던 가족을 만나면서 묵혀 있던 감정을 풀어낼 수 있었다.
“자, 그럼 돌아가자.”
성안에서 워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아르모니아의 의견에 따라서 우리는 대충 채비하고 성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시… 다시 꼭 방문하겠습니다.”
“다른 건 다 괜찮단다… 부디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네 몸 하나만 신경 쓰거라.”
“공작님….”
그 과정에서 레나는 페르온 공작과 백성들에게 배웅받으며 눈물의 장을 열었고….
베아트리체는 마족들과 부모의 배웅을 받으며 엄숙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크흠. 다들 내가 없다고 긴장 풀지 마라냥!”
“알겠습니다!”
(어머, 우리 비체가 성공했네.)
(역시 내 딸이야!)
성공한 자녀의 모습을 직접 보는 건 행복하겠지만, 빨리 끝내줘야겠다 싶었다.
지금 베아트리체를 배웅하겠다고 페르온 성에 있는 대부분의 병력이 도열하고 있었다.
오늘을 끝으로 그동안 장군의 눈치를 보던 녀석들이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다.
‘쟤들도 피곤하겠군….’
베아트리체가 여기에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마족들이 죽어 나갈 테니까.
그리고 마족이 피곤하면 결과적으로 그 밑에 있는 인간들에게 모든 것이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비올라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기다려주는 비올라.
‘비올라는 그 용사 녀석을 보고 싶어 할까?’
아무리 비올라가 오빠를 싫어했다고 해도 시기가 꽤 많이 지나 있었다.
원래 증오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비올라는 용사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가족애보다 더 크게 작용했을 뿐이었다.
나는 시끌벅적한 도시 사람들을 환하게 바라보는 비올라에게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건넸다.
“비올라.”
“네?”
“가족…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입밖에 단어를 내뱉고도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해서 비올라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비올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가족이요? 이미 보고 있잖아요.”
“….”
나는 비올라의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 모공이 전부 활짝 열리면서 소름이 활짝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 괴물 같은 놈이 여기에 있다면 여기 있는 존재들이 전부 덤벼도 몰살은 확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런 잔인한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저 아까부터 레나 씨와 베아베아체 계속 보고 있었어요.”
가족이라고 하면 당연히 피붙이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에 따라 기준점이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비올라에게 가족이란….
“그리고 지금은 수호 씨도 보고 있고… 아르모니아 씨도 저기 계시네요.”
지금 우리였다.
“후후… 수호 씨는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하네요.”
“하하… 미안해. 내가 이상한 말을 했네.”
“후후후.”
나는 비올라의 미소를 바라보며 살며시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래, 가족이지.”
이제 우리는 그냥 동료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가족과 다를 것이 없었다.
같이 지내면서 정을 쌓고,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같이 골머리를 앓는 사이.
나는 그렇게 흐뭇하게 대답하며 저 멀리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레나와 베아트리체는 가족과 헤어짐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다시 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아쉬움을 금세 털어낼 수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없을 때도 시간 나면 들르게 해줘야겠다.’
굳이 매번 내가 꼭 동행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자, 슬슬 출발할까?”
“네, 알겠습니다.”
“알았다냥!”
그렇게 우리는 긴 휴가를 마치고 다시 함선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
아르모니아는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가능합니다.”
“오오!”
“에넬만 있다면 뭐든 가능합니다.”
“쉿….”
나는 집무실 책상에 엎어진 뒤 세상을 잃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더러운 에넬….”
“….”
나는 함선에 돌아오자마자 아르모니아와 간부 회의를 진행했다.
간부 회의라고 해봤자 아르모니아와 나뿐이었지만….
아르모니아는 아까 내가 말했던 질문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만드는 건 지금도 가능하지만, 차음성을 지닌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화원도 당연히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두 가지 시설은 규모에 따라서 에넬이 소모됩니다. 하지만….”
아르모니아는 무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워프 횟수 증가는 큰 비용의 에넬이 소모됩니다.”
“아오….”
에넬, 에넬, 에넬.
모든 게 에넬로 귀결된다.
과장이 아니라, 에넬이 없다면 다음 날 먹을 음식도 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함선에서 나오는 음식도 모두 에넬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 피아노실과 화원은 저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바로 워프 횟수를 늘리는 것입니다.”
아르모니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첫 번째도 안전, 두 번째도 안전, 세 번째도 안전이다.
워프 횟수가 증가하면 임무의 안전성이 대폭 증가할 테니까.
“저번에 워프 횟수 1회 추가에 들어가는 비용이 50만 에넬이라고 했지?”
“맞습니다. 그리고 한번 추가하게 되면 1회 충전에 들어가는 시간이 12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원래 워프 1회를 사용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시간은 12시간이었다.
하지만 워프실을 업그레이드하면 워프 1회에 들어가는 에너지 충전 시간이 8시간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효율이 비약적으로 올라가는 셈이었다.
“일단 한 단계는 업그레이드해야겠는데….”
하지만 지금 우리 수중에 있는 에넬은 고작 해봐야 10만….
최소한 한 번 더 임무를 뛰고 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50만 에넬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실적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괜히 가서 별다른 실적도 없이 돌아오면 워프 충전도 못 하고 그냥 시간만 날리는 셈이 될 테니까.
내가 책상에 앉아서 골머리를 앓고 있자, 아르모니아가 차분하게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옆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뭐지? 설마 위로해주려고….’
포옹? 스킨쉽? 설마… 키스? 아니면! 펠라!? 섹스!!!???
순수했던 내 바람은 짧은 시간 만에 저열한 바람으로 변질하여 버렸다.
아르모니아는 다가오는 중에 내 표정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지만, 금세 다가와서 내 책상 위에 화면을 띄워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습니다.”
“…위로가 아니구나.”
“바로 단기 임무입니다.”
“…무시하지 마.”
“지금 보여드리는 건 조디악에서 의뢰한 단기 임무 리스트입니다.”
“….”
내 무시하지 말라는 말까지 무시한 아르모니아는 계속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단기 임무.
나는 지금까지 딱 한 번의 단기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비올라를 처음 만나게 되었던 첫 번째 임무.
그 이후로는 따로 단기 임무에 눈을 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나와 아르모니아가 단기 임무에 눈을 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몇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신분이었다.
“장기 임무는 기본적으로 조디악 측에서 신분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여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단기 임무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위그드라실의 경우에는 신분을 제공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초반 안전성을 염두에 둬서 의뢰한 것이었다.
‘설마 쇼크 비 같은 괴물이 나올 줄은 조디악도 몰랐겠지….’
그에 비해서 슈트라와 영사관의 경우에는 괜찮은 신분을 받고 시작했었다.
임무 시작 시에 괜찮은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매리트가 작용한다.
만약 내가 슈트라에 청소부 신분으로 들어가고, 영사관에 경비원 신분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해봐라.
청소부 신분으로 루나를 꼬셔야 하고, 경비원 신분으로 성수아와 초서현을 꼬셔야 하는 것이다.
‘난이도 자비 없어지는 거 보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그렇게 신분이 없었을 때를 가정하며 여자를 꼬시는 것을 상상하고 있을 때, 아르모니아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무엇보다 단기 임무는 지원금도 없습니다. 즉, 실패하는 순간 노력했던 시간만 날리는 셈이 됩니다.”
사실 그게 제일 큰 이유였었다.
장기 임무는 성공 보수도 크지만, 제일 끌렸던 점은 바로 지원금때문이었다.
에넬이 없어서 허덕이던 우리는 일단 푼돈 같은 수준의 적은 에넬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밥은 먹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하지만 지금 저희는 지원금에 허덕일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단기 임무를 수행해도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하긴….”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아르모니아가 화면의 리스트를 줄여나가면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페르온 공작령에 있는 동안 목록을 쭉 훑어보며 임무와 보상을 검토해봤습니다.”
“오….”
내가 밤에 애완견 산책하는 동안 아르모니아는 열심히 일했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엘리트.
아르모니아가 띄워준 리스트가 줄고, 줄더니 어느새 목록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이 남아 있었다.
아르모니아는 남은 문장을 펼쳐서 문서로 보여주면서 대답했다.
“바로 이 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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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 인물 탐색
보상 : 100만 에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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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는 내가 부여받은 임무와 보상만 적혀 있었다.
너무 정보가 없지 않나 싶은 순간 아르모니아가 바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임무의 개요는 출력으로 보여드리는 게 아닌, 제가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임무지의 배경은 내가 살던 세계와 비슷한 현대이고, 과학력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고 했다.
영사관처럼 괴수가 난립하지 않고, 슈트라처럼 마법이 주를 이루는 곳도 아니었다.
진짜 평범한 현대….
설명을 듣다 보니 의문이 들었다.
“그런 곳이면 내가 굳이 필요한가? 딱히 위험해 보이지 않는데….”
“분명 위험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낮습니다. 문제는 신분입니다.”
“신분?”
“조디악 측 인물과의 연결점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됩니다.”
이번 임무에는 따로 받는 신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부적인 도움 없이 몰래 숨어서 상대방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조디악 측에서 하는 말에 의하면 상대방의 정보력이 너무 뛰어나서 만약 연결점을 들키게 된다면 다시 임무에 투입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들킨다고 실패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디악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심지어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전에서는 이미 조디악 측 인물을 찾아낸 것 같았다.
현재 조디악은 주인공의 정체가 까발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몰라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인 것이었다.
아르모니아는 모든 것을 정리해서 설명해줬다.
“이번 임무는 최대한 신분을 들키지 않고, 성전의 인물을 찾기만 되는 임무입니다. 더 자세한 정보는 의뢰받고 나서 알려주겠다고 통보했습니다.”
“하긴… 비밀 엄수가 중요한 임무 같으니, 당장 모두 다 알려주지는 않겠지.”
임무 자체는 단순했지만, 절대 간단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그런데도 아르모니아가 내게 이 의뢰를 제안했다는 건 그녀도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내게는 딱히 선택권이 없었다.
“좋아. 하자.”
에넬 벌려면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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