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9화 〉 499화 가족과 가족의 사이
* * *
“부디 부탁일세! 내 딸… 내 딸이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주게!”
“일단 일어나서 이야기하세요. 몸 상태도 좋지 않으신데….”
나는 공작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바로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때릴 줄 알았는데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알 수 없는 부탁을 해올 줄이야….
페르온 공작은 내 부축을 받으며 바들바들 떨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자세는 아까 무릎을 꿇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며 또 한 번 아까의 대사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부탁이네… 제발 딸이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해주게….”
“갑자기 왜 그런 부탁을….”
“나는… 모든 것을 실패한 인간일세.”
공작은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한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도자로서 세상의 질서를 잡지 못했고, 공작으로서 나라를 지키지도 못했네.”
“….”
“심지어 내 남은 목숨 때문에 백성들의 미래까지 속박당하게 만들어 버렸네.”
페르온 공작은 신체적인 재능은 남들보다 뒤처질지언정 국가를 운영하는 재능은 나름 뛰어난 편이었다.
그건 기질창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나가 매번 그를 보며 아직도 아버지가 아닌 공작님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레나는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할 정도로 똑 부러지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는 사적인 사리에서도 공작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언변은 그저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레나가 페르온 공작을 진심으로 공작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페르온 공작이라면 당연히 현재 상황을 모두 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랑 아까 부탁이랑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나는… 부모로서도 실패해버렸네. 최소한… 최소한 딸만이라도 구하고 싶네!”
레나는 분명 페르온 공작에게 우리의 정체와 함선에 대한 비밀을 단 1도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페르온 공작의 입장에서 레나는 그저 마왕과 친분이 있는 인간인 내게 팔려 갔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 레나를 통해 잘 들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 자네를 오해했네. 하지만… 레나의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쳤네. 남자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던 그 아이가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면 분명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네.”
레나… 왠지 내가 없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감이 온다.
어… 음… 나는 훌륭하다.
나는 그렇게 자기 세뇌를 하며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내 뭐든 해주겠네! 개처럼 짖으라면 짖겠네! 아니!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돼지처럼 기어 다니며 돌아다닐 수도 있네! 내 손으로 백성들의 목을 치라고 해도 할 수 있어!”
“….”
“제발… 제발 내 딸을 최소한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만들어주게.”
나는 레나의 꿈을 통해서 페르온 공작에 대해서 꽤 많이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품과 성품을 지니고 있었는지….
하지만 그도 결국 인간에 불과했다.
자기 딸만 지킬 수 있다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벗어던질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까 했던 부탁의 종점에 다다랐다.
“제발… 내 딸이 이곳에 다시 오지 못하게 해주게….”
“….”
이제야 말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공작에게 있어서 페르온 성은 귀족들의 포로수용소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국가는 백성들의 포로수용소요, 성은 귀족들을 포로수용소가 된 것이었다.
만약 레나가 이곳에 다시 돌아온다?
페르온 공작의 입장에서는 레나가 남자에게 버려진 것도 모자라서 포로로 전락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즉, 페르온은 레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레나를 버리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페르온 공작은 내 침묵을 오해하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원한다면 내 평생 자네 시종도 들어주겠네!”
“아뇨. 그건….”
예쁜 여자 시종이면 모를까. 나이 많은 남자 시종은 좀….
일단 페르온 공작의 절실한 마음이 뭔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페르온 공작의 절실한 부탁을….
“죄송하지만, 그 부탁은 거절해야겠네요.”
“아… 크으….”
페르온 공작은 잠시 심장을 움켜쥐고는 숨을 내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호, 혹시 내가 너무 귀찮게 굴어서 그러는가? 미, 미안하네! 아니면 말투가 문제였는가! 만약 그렇다면 내가….”
나는 그런 공작의 말을 끊고 이유를 설명해줬다.
“제가 레나한테 그 부탁을 들어줬다고 하면 볼 면목이 없어지거든요.”
“…뭐?”
“레나한테 공작님을 평생 보지 말라고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어요.”
분명 의도한 말은 그게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건 없었다.
안전하게 함선에서 지내는 것을 모르는 페르온 공작의 입장에서는 그냥 평생 딸을 보지 않는 쪽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뭐… 그걸 설명할 방법도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페르온 공작에게 설명했다.
“저는 레나가 평생 아버지도 못 보고 지내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슬퍼할 테니까요.”
“크읏… 크흡….”
페르온 공작은 내 말에 울먹이더니, 내 팔을 잡고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고맙네… 고마워….”
“그럼 일단 쉬고 계세요. 제가 다시 레나를 불러올게요. 이왕이면 저보다는 레나와 있고 싶으실 테니까요.”
나는 그렇게 페르온 공작을 진정시키고 침대에 다시 눕힌 뒤 공작의 침실을 나와서 레나의 객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레나의 객실로 향하면서 새삼 이 세상이 무섭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레나나 페르온 공작이나 존재만 따지면 위인급이었을 텐데. 그럼 사람들도 세상에 휩쓸리면 결국 망가지는구나.’
아무리 대단한 재능과 훌륭한 성품을 지닌 인물일지라도 세상을 뒤트는 주인공들의 싸움에 휩쓸리면 그들도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귀족, 왕족, 황족 이 모든 게 대단하다고 추앙받더라도 결국 선택받은 존재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선택받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뭐, 나는 그나마 예외라서 다행이긴 하다만….’
새삼 나를 소환해준 아르모니아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르모니아가 아니었다면 나도 원래 살던 세계에서 그저 미세먼지 같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레나의 객실에 도착한 상태였었다.
내가 방문을 두드리자 레나가 빠르게 문을 열고는 나를 보며 미세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파악하고는 바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 싸우거나 이상한 말을 주고받은 게 아니니까.”
“불편한 만남을 주선해서 죄송합니다.”
“에이, 무슨….”
나는 불안한 얼굴을 하던 레나를 살며시 껴안으며 그녀의 귓속에 속삭였다.
“네 아버지잖아. 당연히 만나야지.”
“주인님….”
나는 그렇게 포옹을 마치고, 레나를 바라보며 마저 이야기했다.
“일단 대화는 끝났어. 여기 있는 동안 아버지 신경 많이 써줘. 그렇다고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또 들르면 되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레나는 미소와 눈물을 동시에 보이며 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막상 이런 모습을 보니 아쉬웠다.
산호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레나의 모습은 나중에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페르온 성은 나중에도 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레나를 며칠 동안 페르온 공작에게 뺏긴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는 레나를 보면서 결심했다.
“레나.”
“네, 주인님.”
나는 그런 레나를 보면서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에는 시간 비워놔.”
..
..
파아앗!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어두웠던 방이 환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레나와 베아트리체는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면서 감탄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다냥!”
“…정말 대단합니다.”
환한 빛이 한차례 방을 훑고는 가라앉은 뒤 빛의 중심에 있던 여자가 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뒤 싱글벙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어때요? 예쁘죠?”
하얀색 복장과 하얀색 머리카락.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그녀가 누구인지 레나와 베아트리체도 몰랐을 것이다.
“비올라 님… 설마 에테르의 힘입니까?”
“네! 맞아요.”
변신한 비올라가 폴짝폴짝 뛰면서 하얀색 복장을 두 사람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에테르의 힘으로 변신한 것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자들의 대화로 꽃을 피웠다.
특히 이 중에서 제일 관심을 가지던 건 바로 베아트리체였다.
“부럽다냥… 나도 변신하고 싶다냥!”
베아트리체는 비올라와 취향이 같아서 언제나 같은 만화를 보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올라의 모습이 부러운 것이었다.
“미안해요 베아베아체…. 저도 에테르한테 부탁해봤는데. 저 말고는 못 한대요.”
“히잉….”
저 말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비올라가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에테르는 나를 경계할지언정 레나와 베아트리체까지 경계하는 건 아니었다.
만약 정말 타인의 변신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면 진작에 베아트리체도 변신을 시켜줬을 것이다.
‘성별도 없는 무기질 놈이 사람을 가리네.’
뭐 그 때문에 재미있는 경험도 많이 하고 있으니 딱히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세 여자가 에테르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하얀색 복장으로 변신한 비올라가 내게 다가와서 묻기 시작했다.
“수호 씨, 그런데 오늘 왜 모인 거예요?”
“아….”
비올라의 질문과 동시에 레나와 베아트리체의 시선도 내게 향하기 시작했다.
오밤중.
해는 저물어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창밖은 서늘함을 품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 밤에 나는 세 사람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었다.
레나가 돌봐주던 공작도 이 시간에는 잠을 잘 테니 그녀가 옆에 없어도 됐다.
그리고 베아트리체의 부모도 사후 세계로 넘어간 상태.
비올라는 애초에 할 일이 없어서 내가 부르면 언제나 만날 수 있게 스탠바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남은 세 사람을 한자리에 모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레나와 베아트리체의 의문이 담긴 눈을 피한 뒤 비올라에게 먼저 대답했다.
“같이 산책이나 할까 싶어서.”
“아하!”
비올라는 번뜩이는 눈동자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산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올라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두 여자는….
“산책 말씀이십니까? 제가 미리 나가서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빨리 나가자냥. 나도 성 구경하고 싶다냥.”
산책이라는 단어의 의구심을 전혀 갖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미소를 지은 뒤 비올라에게 말했다.
“자, 비올라. 산책하러 나가자.”
그리고 내 말을 듣자마자 비올라는 바로 땅바닥에 엎드린 채 나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멍멍~”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