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3화 〉 483화 위그드라실 (431)
* * *
(하앙! 하읏! 끄으읏!)
화려한 석조건물 꼭대기에서 손혜은의 암컷 울음소리가 진득하니 들려왔다.
그런 손혜은의 암컷 소리를 들으며 한여름은 기진맥진하며 따가운 눈초리로 거울을 바라봤다.
“미친 새끼들….”
교미의 현장.
그것 말고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미 다섯 번째였다.
파티원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탐색은 어느새 섹스 타임으로 돌변해 있었다.
성수호는 커다란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손혜은에게 신호를 줬고, 손혜은은 성수호의 신호를 받자마자 바로 괜찮은 장소를 물색한 뒤 기꺼이 바지를 벗어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발정 난 새끼들….)
“….”
망을 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현자타임을 제대로 맛본 한여름은 이제서야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성수호… 이 새끼가 꾸민 짓으 분명해.’
분명 어제까지 거울에 갇혀 있던 건 손혜은이었다.
하지만 한여름이 숙취에 기절한 사이에 거울에 갇힌 건 한여름으로 바뀌었고, 심지어 거울은 성수호의 말에 절대복종하듯 꼬랑지를 내리고 있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 뭔가 일어났어.’
물증도 필요 없었다.
회귀 전에 성수호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면 한여름이 품고 있는 심증은 이미 완벽한 물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손혜은은… 거울에서 빠져나온 건가?’
손혜은의 행동만 보자면 거울에 홀린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거울에 갇힌 것이 자신이 되었다는 건 손혜은은 정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니면….
‘애초에 갇혀 있던 게 아닌건가? 씨발, 도저히 모르겠네.’
정보가 없었다.
손혜은이 갇힌 것도 확신할 수 없어졌고, 자신이 갇힌 이유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거울은 그 부분에서만큼은 입을 꾹 닫고 한여름에게 어떠한 정보도 내어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거울은….
(아, 씨발… 적당히 좀 하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계속 한여름에게 투덜대고 있었다.
한여름은 그런 거울에게 말을 걸었다.
“야, 내가 아까 말했잖아.”
(….)
한여름은 아까 거울에게 조언을 던져주듯 내밀어줬다.
“하연이한테 말하면 알아서 풀릴 거라고.”
민하연에게 오늘 있었던 사실을 꼰지르라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거울은 한여름의 조언에 경청만 하고 침묵할 뿐이었다.
(….)
거울의 침묵으로 한여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뭐 뻔하지… 성수호 새끼가 내 몸 준다고 하니까 빌빌 기는 거지.’
한여름은 아무런 정보가 없더라도 성수호와 관련된 일에는 모든 것을 끼워 맞추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여름은 한 번 더 입을 열어서 거울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왜 하기 싫은 건데? 그냥 몰래 말하면 그만이잖아. 누가 배신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자유를 갈망하던 녀석이라 그런지 이런 일을 평생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만이 금세 쌓인 모양이었다.
“왜? 들킬 거 같아서? 누가 직접적으로 말하래? 넘겨짚듯이 말하면 그만이잖아.”
(그야 그렇지… 그런데….)
“…?”
(민하연이 오히려 허락하면 어떻게 해?)
“푸핫!”
한여름은 거울의 말에 듣고 폭소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허락? 하연이가? 푸하하하!”
(왜 웃냐? 네 기억 속에 민하연은 분명 개방적인 여자인데….)
“…개방?”
한여름은 머리를 굴려서 골똘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내 회귀 사실도 몰랐지? 역시 모든 기억을 뽑아내는 건 아닌가 보네.’
하지만 의문만 가지고 모든 것을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한여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한가지 질문을 했다.
“너는 하연이가 바람피우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
(시, 싫어하겠지? 아, 아니다! 한봄이랑 그렇게 한 걸 보면 그 정도는 아니려나?)
“….”
확정타였다.
‘위그드라실에 오기 전에 일은 대부분 모르나 보네.’
한여름은 그제서야 왜 거울이 망설이는지 알 수 있었다.
민하연이 바람피는 것에 대해서 크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야, 내가 하연이에 관해서 이야기해줄게.”
한여름은 거울에게 자신과 민하연의 과거사를 낱낱이 이야기해줬다.
바람을 피우던 나날을 보내던 자신과 민하연이 그걸 이해해줬다고 착각하던 자신.
그리고 결말까지….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나서 한여름은 속으로 열불이 터지기 시작했다.
‘씨발… 내가 생각해도 좆같은 놈이었네.’
소를 잃고 외양간 고치려는데, 갑자기 외양간이 불타고, 그렇게 전소되어서 재가 남은 곳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늦어도 완전히 늦은 상황.
하지만….
‘하연이를 뺏은 것처럼 나도… 너한테서 다시 뺏어주겠어.’
그렇다고 한여름이 포기할 위인은 아니었다.
한여름은 모두 설명한 다음 거울의 반응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거울은….
(민하연이 그런 성격이라고? 내가 가진 기억이랑 괴리감이 있는데….)
“정말이라니까! 내가 지금 와서 뭣 하러 거짓말을 해! 나도 저 성수호라는 녀석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
(그, 그건 맞는 거 같네.)
한여름에게 설득되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해보자. 나도 이런 식으로 망보면서 평생을 살고 싶지는 않아….)
한여름은 지금 상황이 짜증 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설득됐어.’
한여름의 계획은 지금 당장 성수호와 민하연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성수호… 너도 나처럼 만들어주마. 너도 모르는 사이에 야금야금 조각칼로 긁어주겠어.’
한여름, 자신이 저지른 과오처럼 비슷하게 만들어주려는 속셈이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올라가다 보면 다시 원상 복귀되는 날이 오겠지.’
한여름은 민하연이 성수호에게 진심으로 반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저 실력이라고 확신했다.
성수호가 실력이 주목받아서 민하연의 마음을 홀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안전한 현대가 아닌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이 종이 카드 뒤집히듯 가볍게 뒤집히는 곳.
이런 곳에서는 결국 민하연과 한봄도 여자로서의 본능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었다.
‘회귀하다 보면… 분명 기회가 올 거야. 일단 이번 회차는 이미 망해서 다음 회차를 기약해야 하겠지만….’
한여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언제나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
한여름은 그동안 회귀에 너무 기대고 있었다.
회귀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한여름은 그런 생각을 지우기로 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한 회차, 한 회차에 최선을 다해야 해. 비록 초기화가 되더라도… 초기화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임해야겠어.’
한여름이 위그드라실에 발을 디디고 처음으로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쌀게요!)
(흐끄으으읏!)
그의 귀에 두 남녀의 교성이 다시 파고들어 왔다.
하지만….
“씨발, 존나 시끄럽네.”
다시 들려오는 두 남녀의 교성이 한여름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기 시작했다.
“잠이나 한숨 자야겠다.”
(이런 씨… 왜 나만 귀찮게 이런 일을 해야 해….)
“꼬우면 몸 돌려주던가.”
한여름은 거울에 갇히고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
..
밤과 낮이 구분이 없는 도시.
잠을 자는 도중에 깨어나도 지금이 일어나야 할 시간인지, 더 자야 하는 시간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도시였다.
그렇다면 이런 곳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주변을 밝힐 횃불? 활기찬 대화? 비타민 D3?
그것들만큼 중요한 게 있었다.
바로 시간이었다.
거울 바깥에서는 다시 모인 멤버들이 식사를 하면서 시간에 관해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맨 먼저 입을 연 것은 성수호였다.
(오늘 탐색해봤는데, 전부 훑어보려면 열흘 정도는 머물러야 할 거 같아요.)
(그럼 시간이 중요하겠어. 시계 같은 걸 구해오는 게 좋지 않을까?)
민하연의 말대로 시계가 없이 이곳에서 무작정 탐색했다가는 시차가 틀어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시간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믿고 맡기면 또 누군가는 나태해지기 마련이었다.
성수호는 고민하더니 결단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아쉽지만, 내일 돌아가자. 돌아간 다음에 시계를 챙겨서 나중에 다시 오자.)
다들 성수호의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한여름만 빼고….
“씨발 나 구해달라고!! 이 개자식아!!”
하지만 그런 한여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성수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거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여름, 너도 고생했다. 오늘은 쉬어라.)
(으, 응….)
한여름의 몸을 빼앗은 거울이 성수호의 말을 듣고 터벅터벅 자기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서 의아한 한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쟤가 왜 저렇게 말을 잘 듣는데?)
(이제 정신 차렸나 봐.)
(에이… 아저씨… 내가 저 녀석을 평생 봐왔어요. 쟤는 절대 정신 안 차려요. 그런데 진짜 딴 사람 같네….)
“한봄! 나야! 나 여기 안에 있다고!! 야!!!”
유일하게 구원처럼 느껴지던 한봄의 목소리에 비명처럼 그녀를 불렀지만, 결국 허사였다.
한봄은 잠시 한여름에게 시선을 주다가 금세 성수호의 팔짱을 끼면서 희희낙락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거울에 갇힌 한여름이 필요없다는 듯이….
“씨발! 야! 거울!”
(…왜?)
“빨리 하연이한테 말하라고! 병신아!”
(씨발 상황이 되어야 할 거 아냐! 지금 그럴 상황이냐!?)
거울의 말대로 민하연은 지금 성수호와 딱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상황이 아니었다.
“씨발….”
한여름은 다급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는 중에도 거울은 오히려 흥겨운 듯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인제야 여길 떠나서 다행이네. 빨리 바깥에 나가보고 싶다. 밖이 어떤 곳인지 정말 궁금했는데!)
“그렇게 자유롭게 굴고 싶으면 빨리 말하라고….”
(아 거참! 할 거야! 누가 하지 않는다고 했나….)
한여름은 거울의 투덜거림에 머리가 터질 듯한 두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씨발,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도 신경 써야 하고, 성수호 새끼 견제하는 것도 신경 써야 하고… 머리 터지겠네.’
평생 암약 같은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한여름이었다.
운과 외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다 보니 그동안 머리를 쓴다는 개념이 없었던 한여름이었다.
그 덕분에 간단한 일임에도 멀티테스킹을 하게 되면 머리가 핑핑 돌면서 그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거울이 한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진행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네가 가진 스킬… 나도 쓸 수 있나?)
“….”
한여름은 확신하지 못했지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뭐 쓰려고?”
(그… 뭐냐… 유령의 시간이라는 스킬 써서 성수호 녀석이나 잠시 염탐해보려고.)
“…써보던가?”
한여름은 내심 기대했다.
[유령의 시간] 스킬은 기본적으로 육체를 가사 상태로 만들고 영혼 상태로 돌아다니는 스킬이었다.
거울이 영혼을 빠져나온 틈을 타서 다시 육체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 것이었다.
(끄응… 이거 안전지대에서는 못 쓰네? 일단 나가서 시험해봐야겠다.)
거울은 숙실을 나가서 조용히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안성맞춤인 장소를 발견했다.
그 장소는….
(오, 여기 좋네. 안전지대도 아니고, 심지어 방이네.)
한여름은 전에 이용했던 1층에 있는 위그드라실 주민용 방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거울은 바로 누워서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킬을 사용한 거울은….
(오오~ 신기해!)
“….”
거울 바깥에서 영혼 상태로 주변을 신기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원래 유령의 시간 스킬을 사용하면 자신의 영혼의 모습으로 유체 이탈을 하게 되지만, 거울은 그런 모습 없이 그저 원형의 보라색 구슬 형태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일단 염탐하러 갔다 온다~ 얌전히 있어라~)
거울이 그렇게 말하고 금세 자리를 떠나버렸다.
한여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조용히 속삭이며 거울을 불러봤다.
“가, 간 거야? 갔지?”
한여름의 부름에 대답하는 존재는 없었다.
“좋아! 그런데….”
한여름은 가사 상태에 빠진 자기 모습을 거울 너머로 보면서 중얼거렸다.
“…어떻게 나가지?”
한여름은 어리숙하게 거울을 매만지면 계속 거울 밖으로 나가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씨발! 안 되잖아!”
거울 바깥으로 나가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일단 침착하게 생각하자. 내가 방법을 모르는 걸 수도 있으니까.’
불가능한지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렇게 한여름이 거울을 더듬으며 나갈 방법을 찾고 있을 때였다.
(에이 씨발!)
“!?”
한여름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허벅지에 모든 힘을 쏟아서 침대로 점프했다.
콰당!
“크엇!”
아무리 편안한 침대라고 해도 그의 갑작스러운 몸짓의 모든 충격을 흡수해주지는 못했다.
한여름은 침대 위에서 신음을 죽이고, 태평한 모습으로 거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거울 바깥에 있던 보라색 구슬은 금세 다시 몸으로 들어갔고, 방 안에 있는 한여름에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얌전히 있었지?)
“뭐… 내가 어디 가겠냐?”
(흐응… 너라면 분명 딴짓했을 거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잘 갔다 왔냐?”
(하아… 야, 성수호 그 새끼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
(미친 새끼가 또 손혜은이랑 엉겨 붙어서 섹스하더라.)
“….”
이쯤 되면 한여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수호는 성욕에 미쳤지만, 그만한 성욕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정력을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기대하던 모습이기도 했다.
‘하연이랑 한봄만 아니면 돼….’
이미 갈 데까지 간 두 여자였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두 여자가 성수호랑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
“빨리 하연이한테 가서 말하라고!”
(아! 맞다!)
거울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민하연의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민하연의 방을 앞에 둔 거울은 바로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나온 민하연은….
(누구세… 하아… 왜?)
(그… 그게….)
민하연은 거울 바깥에 있는 한여름과 거울 안에 있는 한여름을 동시에 보듯 한숨을 쉬면서 짜증이 담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은 기억을 토대로 그런 민하연의 모습에 기세가 눌렸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한여름이 시킨 대로 오늘 탐색 내내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섹스.
그 단어가 모든 설명의 핵심이자 중심이었다.
성수호와 손혜은이 짐승처럼 교배하던 장면을 생생하게 설명해줬다.
그리고 그런 설명을 듣던 민하연은 점차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던 살기를 띤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거 말하려고 나한테 온 거야?)
(으, 응! 하연이 네가 좀 알아야 할 거 같아서 말해주러 왔어.)
(….)
민하연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방문을 나오면서 입을 열었다.
(…알았어. 가봐.)
(하연아…?)
(가보라고… 나 가볼 곳 있으니까.)
(아, 알았어!)
거울은 그렇게 대답한 뒤 후다닥 1층 방으로 대피하듯 뛰어가 버렸다.
그렇게 1층에 도착한 거울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휴 무서워… 직업만 타나토스의 신녀인 줄 알았는데, 진짜 죽음의 무녀가 따로 없네….)
“크흐흐흐… 잘했어.”
한여름은 아까 민하연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연이 분명 성수호한테 갔을 거야. 크흐흐… 한바탕 난리 치겠네.”
한번 화난 민하연은 절대 화를 그냥 쌓는 법이 없었다.
그야 어느 정도 범주야 있겠지만, 저렇게 화난 민하연의 모습은 한여름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제대로 터트릴 것이었다.
“야.”
(왜?)
“구경 가자.”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심지어 지금 성수호와 손혜은은 성수호의 방에 있었다.
그런 성수호는 언제나….
“그 녀석 분명 안전지대 개방해놨을 거야. 몰래 가서 문만 살짝 열어서 엿보자.”
(크흐… 그건 재미있겠네. 가자!)
거울은 단순했다.
자유를 얻었는데, 불가피하게 성수호에게 끌려다니는 처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직접 복수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간접적으로 통쾌함을 느끼고 싶은 건 한여름과 같은 마음이었다.
성수호의 방에 다다를 때쯤에 한여름의 귀에 서서히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수호… 혜은 씨….)
(하, 하연 씨….)
(하연아….)
“크… 이제 막 시작이네. 딱이야!”
한여름은 침대에 편하게 누워서 영화를 감상하듯 거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기대됐다.
민하연이 어떻게 나올까?
어떤 식으로 나오든 상관없었다.
오로지 한여름이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성수호… 그 새끼한테 화살 구멍… 아니, 귀따기라도 때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한여름은 증명하고 싶었다.
민하연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때려! 아니 화살로 쏴 죽여! 내가 회귀해서 초기화하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거울이 점차 방에 다가가서 살짝 열려 있는 문틈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성수호… 내가 혜은 씨랑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 이런 거야?)
민하연은 천천히 두 사람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가면서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었다.
첫인상으로 한여름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던 신녀복이었다.
(이렇게 둘이서만 있으면 내가 뭐가 되겠어? 응?)
(하하… 미안. 나는 좀 더 나중에 같이 안아주려고 했지.)
“…어?”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분위기는 민하연이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가면서 짐작이 아닌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만 빼놓고 이런 짓을 해? 오늘 밤새 재워주지 않을 거니까 각오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