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0화 〉 480화 위그드라실 (428)
* * *
(혹시 시간 되세요?)
“하… 한여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등장으로 손혜은은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한여름이 나타나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지금 한여름이 앞에 둔 손혜은이 진짜 손혜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손혜은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거울 안에 있는 한여름을 보는 사이에 거울이 마음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제가 오늘은 피곤해서 이제 자려고요.)
(아하, 그래도 조금만 시간 내주세요. 잠깐이면 돼요.)
(하하하….)
“…?”
거울은 손혜은의 예상과 다르게 한여름의 모습에 경계하고 있었다.
손혜은은 거울의 모습을 보면서 어리둥절하기 시작했다.
‘뭐지? 그냥 바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여자의 기준에서 한여름의 첫 이미지는 최고 중의 최고였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손혜은뿐만 아니라, 그녀와 같이 지내는 박선희와 박진희도 한마음으로 동감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첫 이미지였다.
오히려 지금의 한여름은 첫인상 때문에 친했던 사실을 지우고 싶은 오점일 뿐이었다.
삼인방은 성수호와 붙어 있으면서 그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 호감은 점차 늘어나서 어느 순간 애정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번져나가는 애정에는 한여름이라는 존재가 오점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콜로세움에 소환된 뒤에 한여름에게 달라붙어서 친절하게 굴던 자신들의 모습.
그리고 한여름에게 붙어서 성수호라는 존재의 이름조차 관심 없던 자신들의 모습.
분명 그 상황 자체는 삼인방도 잘못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성수호에게 행동했던 과오를 빨리 잊고 싶었다.
하지만 한여름이 옆에서 깔짝대면서 그 과오의 형태가 계속 주변에 끈덕지게 남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오가….
(아씨… 이 얼간이 새끼는 왜 자꾸 달라붙는 거야.)
거울에게도 흘러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휴우… 다행이야. 일단 최악의 상황은 면했어.’
성수호와 관계를 갖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
한여름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원치 않는 남자와 관계를 가지고 싶은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손혜은에게 한여름은 그런 수준의 남자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거울도 마찬가지였다.
(이 새끼 아무것도 없는 허접한 놈 같은데….)
“그렇게 귀찮으면 빨리 쳐내고 방에 들어가면 되잖아.”
손혜은은 자신도 모르게 거울에게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그녀의 발언은 오히려 거울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냐… 이렇게 된 거 이 녀석을 이용해서 그 성수호라는 녀석을 자극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자, 잠깐!”
당황한 손혜은은 어떻게든 거울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입 밖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뿐 이었다.
그런 손혜은의 비명 같은 외침은 외부에 닿지 않았다.
(하긴… 심심했는데 잘됐네요.)
(하하하, 퇴짜맞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제가 마침 인벤토리에 술이 있거든요. 같이 마실래요?)
(흐음~ 좋아요.)
“안돼! 야!! 죽을래!! 죽는다!! 하지 마!!”
손혜은은 당황한 나머지 어린아이에게나 먹힐법한 어리숙한 협박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거울 건너편에서는 오히려 상황이 악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근처는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바깥에서 술을 마시기에는 좀 그렇죠?)
(흐음… 그럼 어디서 마실까요?)
(…혜은 씨 방이 어떨까요? 제 방보다는 그쪽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흐흥~ 좋아요.)
“안된다고!! 하지 마!”
손혜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거울 바깥에 있는 손혜은은 한여름을 데리고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 가지 마!”
거울 바깥에 있는 손혜은의 손이 자신의 숙실 문고리를 잡기 시작했다.
안전지대만큼 안전한 곳은 위그드라실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안전지대가 펼쳐져 있는 자신의 방이….
“아… 안돼….”
지옥의 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문에 걸쳐져 있는 푸른 경계선을 지나는 순간 외부와 모든 소통이 차단되고, 그 장소에는 한여름과 자기 육체, 두 존재는 안전과 비밀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경계선을 넘어가는 순간…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 아….”
손혜은은 절망하며 거울 너머에 자신이 경계선을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두 분 뭐 하세요?)
“…어?”
익숙하고 안도감이 스며드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곳에서 남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두 명뿐이었다.
(어머? 수호 씨?)
(…너야말로 여기는 무슨 일이냐?)
거대한 거울에 성수호가 비쳤고, 그런 성수호는 손혜은을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심심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뭐 하시려는 건가요?)
..
..
손혜은은 또 한 번 폐에 남아 있던 이산화탄소를 전부 끄집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 살았다.”
손혜은이 바라보는 거울 바깥에는 성수호와 한여름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불만이 그득히 피어오르는 한여름과 느긋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성수호.
‘하마터면 저 한여름이랑 단둘이 묶일 뻔했어… 정말 다행이야.’
거울의 변심 때문에 한여름과 자칫 몸이 엮길 뻔했던 찰나에 성수호가 나타나 줬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를 느낀 성수호는 술자리에 합석하고 싶다고 제안을 해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거울의 의도에 지나지 않았다.
(오호… 이거 괜찮은데? 이렇게 술 마시면서 계속 싸움 붙이다 보면… 저 성수호라는 녀석도 자극되겠지?)
“….”
손혜은은 이 이상 거울을 막을 힘을 내지 못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들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모습을 봐온 손혜은이었다.
그녀는 이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아냐…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아까 성수호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을 때, 손혜은은 안도하는 것과 동시에 자존심도 많이 깎여 나갔었다.
결과 자체는 좋았지만, 그 결과로 인해서 손혜은이 가진 여자의 자존심도 깎여 나간 것이었다.
성수호를 좋아했다.
하지만 민하연도 좋았다.
성수호가 꾸준히 자신을 도와줬다면, 민하연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
손혜은은 꾸준히 민하연 쪽으로 저울을 기울여왔지만….
‘차라리… 이렇게라도 넘어가면….’
거울에 갇힌 손혜은은 어느 순간 마음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손혜은의 마음이 약해져 가는 순간에도 거울 건너편에서는 신나게 이야기를 떠드는 거울과 그 거울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수호와 한여름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성수호와 한여름….
한여름은 불만이 그득한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고, 성수호는 그런 한여름에 맞춰서 한 잔씩 들이켰다.
(와… 두 사람 술 엄청 쎄네요?)
(제가… 술 하나는 좀 하죠.)
한여름은 자신만만하게 소주잔에 술을 채워서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한여름과 같이 마신 뒤, 성수호가 흐뭇하게 입을 열었다.
(전에는 술에 약한 거 같던데? 금세 취해서 잠들었잖아….)
(흥… 그때는 몸이 안 좋았어.)
(다행이네. 나는 또 그때처럼 비실댈 줄 알았지.)
(너 이 새끼….)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손혜은을 앞둔 채 술 대결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여름은 어느새 얼굴에 홍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홍조를 드러냈음에도 술잔이 비워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성수호는….
‘술이… 정말 쎄시네.’
한여름과 다르게 얼굴에 취기 따위는 전혀 묻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소주를 들이켤 때마다 엄청나게 쓴 표정을 지을 뿐….
‘…설마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가?’
성수호의 표정은 여유롭다가도 술을 들이켜는 순간에는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억지로 술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간단하게 교류하는 느낌의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었지만, 이미 교류 따위는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그저 성수호와 한여름의 술 대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모습을 즐기는 건 다름 아닌 거울이었다.
(오호… 저 성수호라는 녀석 생각보다 분발하네?)
“….”
(흐흐흐… 너도 은근슬쩍 바라고 있지? 성수호가 이기길?)
“….”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아니,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싫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중에….
“끄으….”
콰당….
누군가가 옅은 심음과 함께 식탁에 드러누워 버렸다.
손혜은은 거울 건너편에서 여유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보면서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 술 쎄시네.’
한여름은 식탁에 쓰러져서 어느 순간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고, 거울 안에 비치는 성수호가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바라보던 그는 손혜은에게 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남자 둘이 유치하게 구느라 신경을 못 썼네요. 드세요.)
(흐응~ 괜찮아요. 오히려 재미있었어요.)
거울이 한 말이었지만, 손혜은도 동감했다.
남자들의 싸움이 유치하다고는 하지만, 여자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 상황 자체가 즐거움으로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성수호가 이긴 시점에서 손혜은은 즐거움을 느낀 것이었다.
거울 바깥에서 성수호와 거울이 분위기를 잡으며 단둘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거울도 취기에 잠긴 듯 흐트러진 목소리로 성수호에게 말했다.
(다시 물어볼게요. 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렇지 않아요. 혜은 씨는 누가 봐도 미녀인걸요.)
성수호의 말을 들은 거울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성수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다가간 뒤 그를 뒤에서 껴안으며 그에게 요염한 목소리를 그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 네?)
(….)
성수호의 침묵에 긴장하는 건 거울이 아니었다.
‘수호 씨… 그냥 받아줘요.’
손혜은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이 모든 것을 빨리 끝내고 불안감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다른 남자에게 안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보다는 차라리 민하연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성수호에게 안기는 쪽이 훨씬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연 씨… 미안해요.’
그렇게 손혜은이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순간이었다.
(흐으으….)
“…?”
거울 건너편에서 거울의 힘을 잃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
거울 건너편에서 쓰러져 누워 있는 손혜은을 팔로 지탱하며 받치고 있는 성수호가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경고? 뭐지? 나한테 무슨 스킬을 쓴 건가?’
주황색의 보석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성수호는 갑자기 잠들어버린 손혜은의 몸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힌 뒤,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육신이 아닌… 진짜 거울 건너편의 자신을 바라보듯 거울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울을 응시하던 성수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빨리 구해드릴게요.)
“아….”
손혜은은 다리가 풀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어! 내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던 거였어!’
성수호는 그렇게 짧게 말한 뒤, 한여름을 데리고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성수호의 뒷모습을 보면서 손혜은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물도 오래가지 않았다.
거울 앞에서 주저앉았던 손혜은은 천천히 일어나서 거울 방에 있는 침대 위에 천천히 눕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든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면서 그녀의 마음속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손혜은은 침대 위에서 실실 웃으며 점자 눈을 감고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
나는 한여름을 들쳐메고 손혜은의 방을 나온 뒤 그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콰당!
바닥에 줄이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누워버린 한여름을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 녀석 갑자기 소리 없이 사라져서 뭔가 했는데….’
손혜은이 내 방에서 나간 뒤, 한여름이라고 추측했던 소리도 덩달아 사라진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진짜 단순하네.’
내 예상대로 한여름은 손혜은에게 마수를 뻗기 위해 접근한 것이었다.
단순하다. 하지만 합리적이다.
어디가 합리적이냐고?
‘회귀자가 그렇지 뭘….’
회귀자는 뭘 하든 다 합리적이다.
비록 반쪽짜리 회귀자이지만, 내가 만약 입장을 바꿔서 회귀자의 능력을 가졌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가능성이 컸다.
실패하면?
아, 다음에는 조심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넘어가면 그만이니까….
애초에 인성이 바르면 회귀자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회귀자의 미래는 두 가지 중에 하나다.
우울증 비슷한 정신병에 걸려서 골골대든가 아니면 감정에 취해서 더 거침없이 행동하던가….
한여름은 후자다.
내가 봤을 때, 성전에서 이 녀석을 주인공으로 뽑은 이유는 회귀해도 이기심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리라 판단해서 뽑은 것 같았다.
‘뭐… 그건 그거고….’
나는 바닥에 누워서 골골대고 있는 한여름을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 생각보다 일이 너무 잘 풀렸는데?’
한여름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맞아서 기절했다면 일어날 여지가 있겠지만, 지금 술에 완전히 꼴아서 최소한 몇 시간 동안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한여름을 발로 굴려서 복도 구석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끄으으… 어, 어지… 러워….”
그렇게 한여름은 대강 사람이 지나지 않는 구석에 몰아넣은 다음 시원하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자, 그럼 가보자.’
[어디로 가실 겁니까?]
나는 여관을 나온 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신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귀찮은 건 빨랑빨랑 넘기고, 3층으로 갈 준비를 해야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소우타가 나를 덮칠만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