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8화 〉 478화 위그드라실 (426)
* * *
2층에 오고 나서 두 번을 회귀하는 동안 한여름은 손혜은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만약 저번 회차에도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면 진작에 내 귀에 이야기가 흘러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손혜은의 이런 이야기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
그렇다는 건….
‘저번 회차에서 한여름이 손혜은에게 관심이 생겼다?’
[손혜은은 수호 님과 관계를 갖지 않은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오호….’
저번 회차에서 거울에 갇힌 한여름은 내가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관계에 유일하게 포함되지 않는 손혜은에게 그나마 가능성을 엿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한여름은 지금 인간관계가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다.
그나마 숨구멍을 한봄이 틔워주고 있으니 망정이지, 만약 한봄도 없었다면 진작에 사회적으로 익사해서 둥둥 떠다녔을 것이다.
‘아니지, 익사해도 다시 살아났겠지.’
그동안 가만히만 있어도 몰려드는 여자로 인해서 인간관계 욕구라는 개념이 없던 한여름은 처음 느껴보는 욕구 불만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해소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손혜은에게 접근하는 것일 것이다.
악의든 선의든,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어느 쪽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한여름이 지금 손혜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던전을 앞에 두고는 고민했다.
‘한여름이 저번처럼 거울 안에 들어가 준다면야 편하겠지만….’
한여름이 이번에도 거울에 쉽사리 들어가 줄 리가 없었다.
강제로 쑤셔 넣는다면 가능하지만, 나는 지금 거울에 대해서 몰라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서 상황을 보면서 각을 재보자.’
나는 던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자, 들어가죠.”
..
..
이번 회차로 3번째 진입하는 던전.
갈림길 하나 없는 이 던전은 이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마을에 있는 녀석들은 똑같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던전에 있는 녀석들을 살기 위해 똑같이 발악한다.
‘지겹다….’
슬슬 떠날 때가 됐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색을 진행하다 보니 또 여관 패거리의 혼령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나 없이 다시 싸움에 돌입하는 멤버들은….
‘오… 이번에는 잘 싸우네.’
처음 싸울 때와 똑같은 분위기로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분명 전 회차에 고전했던 멤버들이 왜 이번에는 잘 싸우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한봄이 고개를 돌려서 질타하기 시작했다.
“야! 한여름! 안 싸울 거야!?”
“그, 그게….”
한여름이 파티 중앙에서 주변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 장소에서 왜 한여름이 저런 행동을 하는지는 나와 민하연만 알고 있었다.
1회차 한여름이 아예 없었고, 2회차 한여름이 파티에 들어와 전투에 참여했었다.
그런데 2회차에서 오히려 한여름이 전투에 참여하는 바람에 싸움이 개판을 넘어서서 진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몰렸었다.
한여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씨… 씨발… 나도 들어가고 싶다고!”
자신이 참여해봤자 오히려 또 방해꾼 이미지가 생길 것을….
하지만 그건 또 회귀 전의 이야기다.
한봄은 회복 스킬을 사용하면서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병신….”
“….”
참여하면 죽일 놈이 됐지만, 참여하지 않으면 병신이 되는 상황.
그렇게 한봄의 질타를 받은 한여름은….
“씨발! 모르겠다!”
본격적으로 싸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가 싸움에 참여하는 순간 다들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만 미간을 찌푸리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민하연.
그녀는 한여름이 싸움에 참여하고 나서 전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기 때문에 긴장하는 표정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싸움에 참여한 한여름은….
“크으읏! 하아앗!”
생각보다 잘 싸우고 있었다.
‘뭐지? 생각보다 잘 버티네.’
[싸움 실력 자체는 늘지 않았습니다. 다만, 혼령들의 공격이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대로 한여름의 검 실력은 예전처럼 엉망진창이었지만, 적에게 당하는 공격에 크게 타격을 입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잘 버틴다기보다는 데미지가 잘 안 박히는 느낌이랄까나?
[아마 [유령] 스킬로 데미지를 경감시키는 것 같습니다.]
‘하긴 혼령들의 공격도 기본적으로 무속성이니까….’
이럼 나가린데….
‘한여름이 여기서 또 실수를 해줘야지 내가 부려 먹기 편한데….’
하지만 내 걱정은 금세 의미가 없는 걱정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크핫! 아아악!”
잘 싸우던 한여름이 여러 군데에 상처를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다시 뒤로 빠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녀석이야! 이쪽을 노리면! 커억!”
“저쪽은 제가 맡을게요! 일단 정비하세요!”
“네!”
그나마 민하연이 미리 한여름이 맡은 쪽을 손을 써준 덕분에 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악화의 길이 그려진 위험은 민하연의 재치 덕분에 잠시 흐릿진 것뿐이었다.
상처를 회복한 한여름이 다시 참전하고, 다시 빠지고….
결국 싸움이 지속되자 위험을 표현하는 캔버스에 당혹감과 긴장감이라는 물감이 흩뿌려지면서 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10분….
처음부터 한여름이 전투에 참여했다면 5분도 안 돼서 전멸이 났을 법한 파티가 이번에는 10분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뇌속성 마법으로 혼령들을 내쫓아 버렸다.
파지지지직!
“끄아아악!”
“사, 살려줘!”
이미 죽은 혼령들은 또 죽고 싶지 않은 마음에 도주하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탈진한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거나, 드러누운 채 내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허억, 허억, 허억… 고, 고마워요. 수호 씨.”
“후우… 한 방에 끝내 버리네요.”
“다들 열심히 하셨어요. 이제부터는 제가 다 처리할게요. 쉬세요.”
그리고 근방에서 한봄이 한여름을 치료해주고 있었다.
나는 한봄에게 회복을 받은 한여름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넣을 방법이 없을까?’
[일단 수호 님께서 거울을 획득한 다음 자연스럽게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제일 나은 방법이겠네….’
나는 일단 거울을 회수하는 것에 집중하며 다시 던전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던전을 탐색하다 보니 어느새 거울을 들고 있는 벤 크래쉬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똑같은 자리구만. 저 놈들 먼저 잡고 나서 거울을 뺏자.’
이제 한 무리가 우리에게 덤빈 뒤에 숨어 있던 벤 크래쉬를 찾아내서 거울만 뺏으면… 한여름을 또 가둘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와 대치한 혼령들이 집단으로 덤비는 순간이었다.
“흐아아앗!”
“야! 한여름!?”
한여름이 갑자기 자살특공대처럼 혼령의 무리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한여름은 우리가 막을 새도 없이 혼령들 사이에 파고들었고, 나는 마법을 난사하려던 것을 멈추면서 마법진을 지워버렸다.
한여름이 무리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광범위한 뇌속성 마법을 시전하게 된다면 자칫 내가 레드 소환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런 미친놈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다 당황했고, 나는 그런 당황함을 빠르게 지운 뒤 작은 형태의 뇌속성 마법진을 여러개 구사하기 시작했다.
내 뒤에 있던 멤버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무기를 들어서 혼령들의 무리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혼령들은 평범한 무기에 죽지 않는다.
하지만 한여름은 죽는다.
그런데도 회귀하지 않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금세 혼령들을 소멸시킨 나는 바로 혼령들의 안개 뒤편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한여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놔!”
“이, 이 새끼가 왜 이래!”
한여름은 벤 크래쉬에게 달라붙어서 무언가 뺏고 있었다.
벤 크래쉬는 그렇게 한여름과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기겁하며 몸을 돌려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어딜!”
파지지직!
“끄아아아악!”
벤 크래쉬의 3번째 죽음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네오 니플헤임에 잘 갔을 테니, 딱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엉망이 된 현장을 지나가며 한여름에게 다가갔다.
한여름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가슴팍에 소중한 물건을 가진 듯 품에 안고 있었다.
‘저 미친 새끼… 거울 먼저 가지려고 저 짓을 한 거야?’
[현재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뺏을까?’
케르베로스의 안구는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게 가능했지만, 전날 한봄의 부탁도 있고 해서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미친 짓을 벌였다면 한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안구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유는 묻지 않으되, 얻어낸 아이템만 빼앗는 것.
케르베로스의 안구가 있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한여름에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한여름이 고개를 슬며시 돌려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설마.’
한여름이 왜 저렇게 거울에 집착했을까?
거울에 갇히기 싫어서?
아니다….
한여름이 갑자기 몸을 홱 하고 돌리더니, 품에 있던 물건을 내게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성수호!!”
한여름의 회심의 행동은….
“뭐야?”
내게 이미 간파된 상황이었다.
거울을 내게 뻗으며 비추는 한여름의 팔을 피해서 옆으로 획 하니 몸을 돌리면서 그의 팔을 쳐냈다.
타악!
“크엇!”
“갑자기 왜 나한테 안기려고 해. 게이처럼….”
땡그랑!
한여름의 팔을 쳐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에 있던 거울이 동굴 벽에 부딪히면서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나는 일단 거울에 신경을 쓰지 않고, 한여름을 보면서 짜증을 냈다.
“깜작이야. …너 설마 나한테 관심 있었냐?”
“닥쳐!”
“닥치라고? 이게 뚫린 입이라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케르베로스의 안구를 꺼내서 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 그, 그건…. 어?”
한여름은 한동안 내 케르베로스의 안구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 그거 이제 소용없나 보네? 크흐흐흐….”
“….”
한여름의 환한 표정을 보니, 지금 당장 케르베로스의 안구가 효과가 없어 보였다.
이유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유령의 도주… 그동안에는 안구가 효과가 없구나.’
[무적에는 상태 이상 무효화도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까비….’
나는 한여름에게 한탄하며 고개를 돌려서 거울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민하연이 동굴이 울리듯 외치고 있었다.
“혜은 씨!”
“!?”
내가 시선에 담은 거울은….
“….”
손혜은이 들어서 쳐다보고 있었다.
***
손혜은은 눈을 뜨자마자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에 동굴에서 떨어진 거울을 들고 바라봤는데, 어느 순간 꿈속에 빠진 듯 동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방의 형태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손혜은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 분위기 싫었는데, 나도 여기에 익숙해진 건가? 그래서… 여긴 어디야?”
금세 감상을 접고,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손혜은의 눈을 사로잡는 거대한 거울이 그녀를 반겨주고 있었다.
“거울…? 뭐지?”
거울 바깥에는….
(혜은 씨! 괜찮아요?)
민하연이 자신을 걱정하면서 불렀고….
(네? 저는 괜찮아요.)
거울 건너편에서는 자신의 목소리가 하울링 처리가 되어서 방을 맴돌고 있었다.
“뭐, 뭐야! 저게!”
당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던 손혜은은 그제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주변을 헐레벌떡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방은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고, 유일한 소통구는 거울뿐이었다.
그리고 그 거울 안에서는….
(혜은 씨… 어디 다친 곳 없어요?)
(네, 저는 괜찮아요. 하연 씨는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자신을 겸연쩍게 바라보는 민하연이 계속 대화를 걸고 있었다.
그런 민하연의 모습에 손혜은은 다급하게 거울을 두드리며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하연 씨! 저 여기 있어요! 저예요!”
하지만 손혜은의 구조요청에도 불구하고 거울 바깥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오로지 거울만이 반응할 뿐….
(시끄러워. 나 지금 대화 중이야.)
“뭐, 뭐야! 너 누구야!”
(누구긴 그 방의 주인이지.)
거울은 건너편에서 민하연과 대화를 나누며 손혜은에게도 이야기해줬다.
거울의 저주와 거울의 목적을….
(흐흐흐… 아주 좋은 몸인데? 이왕이면 성수호라는 남자를 먹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포기해야겠네. 네 기억에 따르면 보통 녀석이 아니니까.)
“웃기지 마! 내 몸 돌려줘!”
(흐흐흥~ 아쉽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 같네.)
거울은 손혜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흥얼거리며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거울은 빈정대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점차 자신이 앞으로 하고 싶은 희망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산 자의 몸이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보니까 너 외모가 괜찮잖아? 이런 몸으로 왜 그런 고생을 해? 바로 남자한테 달라붙어야지.)
“우, 웃기지 마! 내가 왜 그런 짓을….”
손혜은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중에 거울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가식은… 너 보니까 저 성수호라는 남자한테 관심 있지?)
“…뭐?”
(내가 그냥 영혼만 빼앗는 녀석이 아냐. 기억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
손혜은은 성수호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그에게 호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민하연이라는 여자 때문에 다가가지 못했구나?)
“너….”
(좋아!)
“…?”
거울은 웃는 목소리를 방에 울리며 손혜은에게 말했다.
(내가 대신해줄게! 민하연에게서… 성수호를 뺏는 거 말이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