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5화 〉 455화 위그드라실 (43)
* * *
“혜은 씨한테 사과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서….”
손혜은이었다.
“사과?”
“그게….”
민하연은 보스전에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 케르베로스를 유인하며 다른 사람들을 출구로 보냈을 때, 민하연은 나를 두고 온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나를 구하기 위해 난동을 피운 것이었다.
그렇게 나를 구하겠다고 난동을 피우는 민하연을 말린 여자가 손혜은이었다. 그녀는 민하연을 기절시키고 억지로 출구로 나온 것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게… 내가 흥분해서 하면 안 되는 말들을 해버렸어.”
민하연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흥분한 나머지 손혜은과 한동안 다툼을 이어왔다는 것이었다.
사실 입장을 바꾸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민하연 입장에서는 아무리 회귀가 있다고 해도 나를 버려두고 왔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손혜은의 입장에서는 민하연을 사지로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걱정하지 마. 혜은 씨는 이해해줄 거야.”
“그래도 사과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막막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손혜은을 바라보면서 기질창을 확인했다.
=====
손혜은
[무술], [불안감], [은인에 대한 죄책감]….
=====
‘은인에 대한 죄책감? 저런 게 있었나?’
[보스전을 치르기 전에는 없었습니다. 아마 민하연이나 수호 님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호….’
그럼 일단 손혜은이 민하연에게 상처받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민하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줬다.
“이 일 끝나고 복귀해서 내가 자리를 마련할게. 그때 대화로 풀어보자.”
“정말 대화로 푸는 거 맞지?”
“….”
내 이미지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나는 그렇게 한탄하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수호 님. 주변에 사람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사람? 몬스터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사람, 죽은 자들입니다.]
여기는 던전이고, 죽은 자들만 돌아다니는 곳이다.
무엇보다 지금 레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은신으로 접근했다면 아르모니아에게 포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르모니아는 어떻게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일까?
[기질을 띄워드리겠습니다.]
‘기질?’
알 수 없는 말만 계속 들려오는 상황에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미친… 뭐야?’
내 주변으로 수십 개의 기질창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기질창이란 본디 한번 직접 상대를 봐야 띄울 수 있는 기능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어두운 곳에서 몰려드는 녀석들의 기질창을 직접 보지도 않고 한꺼번에 왕창 띄워버리니….
‘아르모니아, 지금 뭐야? 설마 보이지 않아도 기질창 띄울 수 있어? 아니면 죽는 녀석들이라 가능한가?’
[죽은 자도 기질창을 띄우는 건 직접 봐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오는 자들은….]
아르모니아가 내게 설명하려는 찰나 수많은 기질창이 어둠의 경계선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내 들고 주변을 겨누며 소리쳤다.
“다들 일어나요! 적이에요!”
“뭐!?”
다들 갑작스러운 내 말에 당황하며 허둥지둥 일어섰고, 힐러인 한봄만 혼자 랜턴을 들고 주변을 밝히며 우리들의 시야의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야가 넓어지자 어둠의 경계선이 넓어지면서 그 경계선에 발을 내딛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귀, 귀신이야!!!”
한봄의 외침대로 마을에서 보던 영혼들이었다.
나는 호들갑 떠는 한봄을 보면서 진정시켰다.
“봄아! 진정해! 저 녀석들도 마을에 있는 귀신들이랑 같은 녀석들이야.”
“아! 네!”
내 외침을 듣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하고 랜턴을 똑바로 들기 시작했다.
나는 여차하면 케르베로스의 안구를 사용하기 위해 인벤토리에서 초록색 눈깔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하지만 아이템을 사용하기 전에 영혼들 무리에서 한 영혼이 무리를 뚫고 우리 쪽으로 걸어보더니, 귀신처럼 속삭이듯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왔구나.”
“히익! 저, 저는 아무 짓 안 했어요! 저 오빠 말고 때린 사람도 없단 말이에요!”
“….”
이번에도 한봄이 지레 겁먹고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 귀신은 한봄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찾았다… 성수호.”
“…응?”
내 이름을 알고 있다고?
내가 의문을 가지자 아르모니아가 내게 설명해줬다.
[수호 님. 그의 이름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이름?’
=====
벤 크래쉬
[무술], [원한], [복수심]…
=====
나는 그의 이름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벤 크래쉬? 누구지?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는 한데….’
[….]
‘왜….’
나 남자 이름, 기억 못 하는 거 잘 알잖아….
내가 그렇게 아르모니아의 침묵에 변명하듯 침묵하자, 벤 크래쉬라는 영혼은 어느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위치까지 다가와서 낮게 깔린 음성을 내뱉었다.
“성수호… 나를 죽여 놓고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아!”
이제야 기억이 났다.
‘아! 혹시 여기 있는 녀석들….’
[맞습니다. 지금 기질창이 띄워진 유령들 전부가….]
맨 앞에 나서 있던 벤 크래쉬를 비롯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영혼들이 동굴이 무너질 정도로 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너도 우리처럼 죽었구나! 크하하하!”
[1층에서 수호 님에게 죽은 여관 패거리들입니다.]
벤 크래쉬를 필두로 몇몇 유령들이 조금씩 우리에게 접근하면서 비릿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야… 설마 한봄까지 죽은 거야?”
“크크크… 죽어서야 품에 안아볼 수 있겠네.”
“저기 여자들은… 이 녀석들이랑 같은 패거리 아냐?”
“와우! 오늘 파티다!”
엄청난 숫자의 영혼이 우리를 에워싸기 시작했고, 위협을 느낀 멤버들은 내게 딱 달라붙어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민하연이 활을 치켜든 채 고개를 살짝 들어서 내게 말했다.
“수호야. 지금 당장 처치하지 않을 거야?”
“일단 대화가 가능한 거 같으니까 대화를 해보자.”
내 말에, 민하연뿐만 아니라 한봄과 삼인방도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다들 이미 해결책을 알고 있어서 내 여유로움에 맞춰주고 있었다.
선두로 우리에게 다가오던 벤 크래쉬가 우리… 아니, 나를 뚫어지게 보며 험상궂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너희들 뭐야? 모습이… 죽은 녀석들 같지가 같은데?”
그의 물음에 다른 유령들도 그제서야 상황 파악을 하면서 서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뭐야? 쟤들은 왜 죽었는데 산 녀석들 모습을 하고 있냐?”
“설마 안 죽었나?”
“뭔, 개소리이야…. 여기에 산 녀석이 어떻게 들어온다고….”
“만약 진짜 살아 있는 거라면…?”
“….”
아까까지는 복수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우리가 살아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봤던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죽은 자는 단순하다.
자신의 의지로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을 기억하는 존재에 의해서 기억을 유지하는 존재들….
그저 살아생전에 못 해본 것을 갈구하고, 다시 살아남기를 소망하는 존재들….
나는 그렇게 단순한 녀석들을 보면서 안쓰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도 죽으면 저렇게 단순하게 행동하려나?’
[….]
내 물음에 아르모니아의 침묵이 흘러들어왔지만, 침묵이 흐르던 주변은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선두에 서 있는 벤 크래쉬가 나를 향해 다시 묻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묻자. 너희들… 죽은 녀석들 맞지?”
“우리가 죽은 사람처럼 보여?”
“….”
내 차가울 정도로 냉정한 대답이 불씨가 되었고, 어느새 그 불씨는 심지를 타고 들어간 뒤, 폭탄을 터트리는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진짜냐! 진짜 살아 있는 거냐고!”
“어떻게 들어온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들어온 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한테 알려줘! 어떻게 나가야 해!? 어떻게 나가냐고!!”
다들 우리를 향해 고함을 치며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소란이 일어나는 순간 벤 크래쉬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
“지금 조용하게 생겼어!? 살 방법이 있는데!?”
“그러니까 진정하라고 멍청이들아! 굳이 그걸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무슨 말이야?”
벤 크래쉬는 희미한 안개 같은 얼굴 속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굳이, 우리가 고개 숙이면서 부탁할 필요가 있어?”
“…그렇네?”
다들 웅성거리는 틈을 타서 벤 크래쉬가 창을 꺼내 들며 우리를 겨누며 광기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흐흐흐… 너도 죽기 싫지? 빨리 말해…. 말하라고!!”
나는 벤 크래쉬의 외침과 함께 그에게 활을 겨누며 멤버만 들리게 조용히 속삭였다.
“다들 싸울 준비 하세요.”
“네?”
내 말을 들은 멤버들은 당황하며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행동했으니, 그만큼 당황함도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민하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당황하며 내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수호야? 왜 그래? 설마 아이템에 문제 생겼어?”
“아니, 문제없어.”
“뭐!? 그럼 왜 싸우라는 거야? 지금 바로 그 눈을 쓰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민하연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좋은 기회야.”
“좋은 기회?”
민하연과 한봄, 삼인방은 1층 보스전을 통해서 대규모 몬스터 디펜스를 경험하면서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다.
바로….
“자! 빨리 말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뭔지 알려줄까!? 산 채로 팔다리가 잘려볼래? 엉!?”
사람과 싸워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1층에서도 소환사와 엄청난 마찰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분명 3층에 올라가면 레드 소환사와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칠 것이다.
즉, 지금 이 상황은….
“사람과 싸워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파티원들이 대인전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아….”
민하연의 짧은 음성과 함께 여자들도 긴장한 듯 무기를 꼬나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준비가 다 마친 것을 확인한 나는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처 하나 없이 끝날 것이라고는 보장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나는 활을 정확하게 벤 크래쉬에게 겨누면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여러분들의 목숨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벤 크래쉬가 내 쪽으로 창을 들고 뛰어오면서 외쳤다.
“저 새끼들 말할 생각이 없단다! 일단 불구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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