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4화 〉 454화 위그드라실 (42)
* * *
“혹시 떠나시기 전에 곤란한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
나는 자리를 일어나려는 찰나에 묘지기의 말을 듣고 다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흠… 평생 한 번이나 와주실까 하는 손님에게 부탁을 드리려니 걱정이군요.”
“말해주세요. 저희야말로 이런 대접을 받아놓고 그냥 가기에는 너무 민망하니까요.”
민하연이 묘지기를 안심시키면서 그의 마음을 풀리게 했다.
묘지기는 민하연의 말을 듣고는 턱을 달그락거리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호호호…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묘지기는 슬며시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환 시즌.
위그드라실이 우주 곳곳에 살아 있는 인격체를 소환해서 위그드라실이라는 거대한 탑을 오르게 하는 성대한 의식.
일단 의식을 시작하면 몇백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0층에 있는 콜로세움에 소환되고, 7일간 튜토리얼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보스전을 치르던가, 무시하는 식으로 진행해서 1층으로 향하게 된다.
소환된 사람 중에서 80~90%는 보스전에 도전해서 죽는다.
즉, 얼마 전에 나와 민하연이 1층에 왔을 때 엄청난 숫자의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시기에는 언제나 죽는 사람이 많고, 바쁘기 마련이니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죠?”
묘지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을 했다.
“최근 죽은 자 중에 다른 영혼에게 피해를 주면서 저를 굉장히 곤란하게 만드는 친구가 있습니다.”
“…묘지기님을요?”
여기를 관리하는 자를 곤란하게 만든다?
사신의 외형만으로도 묘지기라는 자는 나름대로 실력깨나 있는 인물 같았다.
그런 존재를 곤란하게 만든다라….
“대부분 반항하는 친구들은 선에서 처치할 수 있었지만… 그 친구는 도통 쉽지 않더군요.”
“강한가요?”
“강한가라… 사실 어떤 능력인지조차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사실 제일 큰 문제는….”
“…?”
“저와 맞붙을 상황이 되면 재빠르게 던전으로 숨는다는 것입니다.”
“던전이요?”
그게 무슨 문제인가 싶었지만, 금세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위그드라실의 태생인 저는, 던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건 위그드라실의 규칙 중의 하나입니다.”
“아, 맞다.”
위그드라실 주민들은 던전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규칙이 존재했다.
그건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기도 던전이 있나요?”
“반나절 정도 거리에 던전 하나가 있습니다.”
“저희야 도와줘도 괜찮긴 한데… 던전 진입이 문제라면 이번에 소환된 사람 중에 죽은 사람에게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요?”
“호호호… 의외로 소환사로 오신 분 중에서는 던전이 뭔지도 모르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아하….”
요정에게 머리가 터진 녀석부터 시작해서, 대부분 죽은 소환사는 0층에 죽기 마련이다.
이유는 보스전.
대부분 0층 보스전에서 죽는 바람에 던전이라는 개념도 모르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었다.
그야 1층 이상에 들어가서 죽은 인물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 대규모 사건이 있었는지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대규모 사건이요?”
“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갑자기 많은 인원이 몰려오는 바람에 통제가 쉽지 않았고 급기야….”
묘지기를 턱을 쑥 앞으로 내밀며 한숨을 쉬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많은 친구를 아까 말한 저를 곤란하게 만든 친구가 선동해서 데리고 갔습니다.”
“아이고….”
지도자 격 되는 녀석도 문제지만, 선동된 다른 녀석들도 문제라는 이야기였다.
다들 원한을 품고 죽어서 그런지 몰라도, 실력이 좀 있는 소환사들끼리 뭉쳐서 그룹을 형성한 모양이었다.
일단 단순하게,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도 모르는 녀석이 신출귀몰하게 잘 숨어서 다른 영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제도 어떻게든 쫓아서 잡아보려고 했지만,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리더 녀석도 결국 영혼이죠?”
“맞습니다. 대략 두 달 전쯤에 죽어서 이 네오 니플헤임에 들어온 자입니다.”
“흐음….”
나는 민하연과 한봄과 다른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럼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
..
우리 일행은 마을을 떠나서 몇 시간의 산행 끝에 묘지기가 말한 악령이 사는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그 악령이 숨은 던전인가 보네.”
“아! 저기 붉은 보석이다!”
민하연의 외침에 모두가 던전 앞에 표시가 되어 있는 붉은 색 보석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던전 앞에 붉은색 보석이 있다는 건….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공용 위상이네.
“아, 색깔마다 위상이 다르다고 했죠?”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응.
게꼬수가 내게 위상에 관해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개별 위상, 개별 위상(침입 가능), 그리고 공용 위상.
각 위상을 체크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던전 앞에 설치된 보석의 색깔을 확인하는 것이다.
푸른색은 개별 위상, 주황색은 침입 가능한 위상, 붉은색은 공용 위상.
즉, 우리가 눈앞에 두고 있는 던전은….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여기는 공용 위상이니까. 그 녀석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겠네. 잡는 건 별개지만 ㅋㅋㅋㅋ
들어가는 족족 죄다 만나는 만남의 장이라는 의미였다.
“에이, 까짓거 해봤자 귀신
인데요 뭘….”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그래도 조심해.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게 죽은 녀석이야.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거든.
“하긴….”
나는 게꼬수의 조언을 가볍게 들으며 붉은색 보석을 바라봤지만, 다른 동료들은 눈치를 보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한봄이 제일 걱정하는 모습으로 내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아, 아저씨… 괜찮을까요?”
한봄은 그동안 보여주던 자신만만하던 태도를 2층에 오고 나서 쉽사리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약점….
“귀… 귀신이라잖아요! 아, 악귀라면 혹시 이상한 능력 있는 거 아닐까요?”
귀신이었다.
그녀는 극도로 귀신이라는 형태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거참 아이러니하네, 그 당돌한 녀석이 귀신을 무서워하다니 심지어 힐러가….
내 눈에 한봄은 퇴마사가 악령보고 겁먹고 덜덜 떠는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나는 내게 철썩 달라붙어 있는 한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안심시켰다.
“괜찮아. 어차피 악령이라고 해봤자 결국 우리처럼 사람이었던 녀석이야. 여차하면 내가 처리하면 그만이잖아.”
“아, 히히…. 하긴 아저씨 있으면 걱정 없지.”
사람 관계라는 게 참 대단하다.
그 까칠하던 한봄이 이 유치찬란한 대사를 듣고 기뻐서 헤헤거리다니….
그 모습을 본 민하연이 짤막하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수호가 있다면 걱정은 없을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영혼들은 수호한테 덤비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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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베로스의 안구*
죽은 자들이 안치된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의 한쪽 눈.
이미 죽어서 혼이 없는 존재에게도 공포를 심어주고, 육체라는 껍데기가 없는 자유로운 영혼조차 속박하는 존재, 케르베로스.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언데드, 혼령 계통의 종족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 (단, 신과 반신처럼 상위 존재의 명령에는 무효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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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템이 있는 한 위그드라실에서 내가 혼령과 언데드를 상태로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범위만 축소해서 2층에서는 아예 내게 반항할 수 있는 녀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강제로 굴복시키니까….
묘지기에게 사용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충분히 통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런데도 내가 묘지기에게 케르베로스의 눈을 사용하지 않은 건 그의 호의 때문이었다.
‘그런 배려를 받아놓고 막무가내로 눈깔 빔 날리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
[마을 영혼들에게 사용하신 건…?]
‘걔들은 귀찮게 하잖아….’
아까 던전으로 향하는 내내 우리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은 영혼들에게 눈깔 빔을 하사해줬다.
이미 죽었지만, 좋아 죽는 모습을 하며 홍해처럼 갈라지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오면서 확인했잖아. 결국 영혼 상태라고 해도 우리의 공격이 먹혔던 거.”
민하연의 말대로 영혼 상태가 특별할지언정 더 대단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죽어서 영혼 상태로 조우한 몬스터도 똑같이 격파했고, 몬스터의 수준도 2층에 걸맞은 수준으로 맞춰져 있었다.
그럼 2층 몬스터의 수준은 어땠을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삼인방을 보며 물어봤다.
“스킬 레벨 10까지 올리셨죠?”
민하연과 한봄을 제외한 삼인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우리가 2층에 막 올라왔음에도 2층 수준의 몬스터를 쉽게 잡은 건 우리들의 수준이 이미 2층을 돌파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1층 보스전을 올 클리어하는 바람에 엄청난 수치의 포인트를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받은 포인트는 기본 스킬을 10레벨까지 무난하게 찍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민하연과 한봄이 조용한 건 어차피 두 여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스킬을 10레벨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1레벨이라도 더 올리면 좋긴 하겠지만, 내가 10레벨 이상 올리지 말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삼인방을 보면서 말했다.
“혹시라도 가호를 정할 때, 부족하다 싶으면 꼭 말해주세요. 제가 가진 포인트도 여러분들의 가호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쓸 거니까요.”
“고마워요.”
박진희를 필두로 나머지 두 여자도 내게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매번 도움만 받네요….”
“괜찮아요. 같은 팀이잖아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죠.”
내 말에 삼인방은 미소를 지으며 방실방실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포인트의 사용처를 완벽하게 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민하연, 한봄, 박선희, 손혜은, 박진희, 그리고….
나는 민하연을 보면서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여름은… 오기 싫대?”
민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툴툴거렸다.
“응, 오고 싶지 않다고 하길래 그냥 놓고 왔어.”
사실 오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되긴 했다.
그런 녀석이 와봤자 귀찮기만 할 뿐이니까….
하지만 녀석은 회귀자다.
한여름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중에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눈앞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층에서 했던 계약은 촬영용 보석을 건네주면서 끝났기 때문이다.
‘멍청한 녀석… 보석으로 혼자 딸이나 치고 있어라.’
[….]
나는 그렇게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우리끼리 들어가죠.”
그렇게 우리 일행은 한여름을 빼고 던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
..
던전의 내부는 외형과 똑같이 동굴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똑… 똑… 똑….
벽면에 잔뜩 끼어 있는 이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우리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던전에 진입할 때 느꼈던 긴장감도 어느새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유는….
“몬스터가 없네요?”
박진희의 말대로 던전 탐색을 진행한 지 30분이 지났음에도 몬스터를 한 마리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시커먼 어둠 속에 있어서 여유롭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아까에 비해서 목과 어깨에 긴장을 풀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원래 몬스터가 없었을까요?”
나는 박진희의 말에 고개를 절레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이곳 던전에도 몬스터가 나온다고 들었어요.”
죽은 자의 세계는 지성체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위그드라실에 존재하는 몬스터들도 죽으면 사람처럼 영혼 상태로 2층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했다.
다만 평범한 인간들과 다르게 원래 살아있을 때처럼 본능대로 행동할 뿐….
“제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은 몬스터한테도 효과가 있으니까. 다들 적당히 긴장을 푸세요.”
“네.”
케르베로스의 눈은 몬스터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다만, 인간과 다르게 효과가 좀 아쉬웠다.
몬스터는 본능대로 살아가서 그런지 케르베로스의 눈에 즉각 반응해서 냅다 도망가기 일쑤였다.
대놓고 잡아다가 명령을 내릴 수 있겠지만, 아마 지성체처럼 구체적인 명령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발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좀 쉬자.”
“응.”
민하연의 대답과 함께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전부 밝게 빛나는 랜턴을 천천히 낮추면서 바위에 앉기 시작했다.
평범한 동굴을 걷는 것이라면 모를까 우리는 지금 악령이 살고 있다는 동굴에 들어온 것이다.
휴식을 자주 가져서 나쁠 건 없었다.
포인트를 벌기 위해 던전에 진입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퇴치 의뢰를 받고 온 것이니까.
하지만 모두 앉아서 휴식을 취하더라도 나는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를 섰다.
내가 그렇게 둘러보자, 한봄이 내게 다가와서 내 팔을 당기기 시작했다.
“아저씨, 그냥 앉아서 쉬어요.”
“나는 괜찮으니까. 쉬고 있어.”
오히려 평범한 던전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어떤 식으로 달려들지 모르니, 누군가는 이렇게 경계를 철저하게 서야만 했다.
무엇보다 경계를 서는 건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봄과 다른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괜히 내 걱정하지 말고, 쉬어. 지금 임무에서 중요한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니까.”
“후우… 알았어요. 만약 힘들면 꼭 말해요.”
한봄을 포함해서 다른 여자들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들도 다 알고 있었다. 네오 니플헤임만큼 나한테 상성이 맞는 곳도 없다는 사실을….
민하연과 한봄처럼 삼인방도 나중에 내가 도와준 일에 대해서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내가 무언가 해준다면 나중에 꼭 보답해줄 사람들이다.
내가 좀 나선다고 해서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한봄은….
나는 한봄의 귓속에 대고 조용하게 속삭였다.
“숙소에 돌아가서 풀어줘.”
“흐흐…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는데요?”
나는 한봄의 말에 웃으며 그녀를 슬며시 밀며 쉬라고 재촉했다.
그렇게 한봄을 보내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이번에는 민하연이 내게 다가와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 했어?”
“응? 아무것도 말도 안 했어.”
“진짜?”
“…아니요.”
거짓말하면 왠지 혼날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왔다.
‘나란 남자… 거짓말 못 하는 남자….’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
저렇게 저렴한 말을 아르모니아의 입에서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우리 둘이 친해지긴 많이 친해졌나 보다….
민하연은 내 장난기가 담긴 대답을 듣고 나서야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수호… 첫인상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구나.”
“하하, 친해지고 나서도 눈치를 보면 연인이 아니지.”
“흐음… 연인이라….”
민하연과 나는 공표하며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몰래 사귀는 사이였다.
사실 이제 와서 공식적인 게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한봄은 이미 나와 민하연과 쓰리썸 관계였고, 삼인방도 사실상 이미 우리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숨기는 건 한여름 때문이었다. 오직 한여름을 괴롭히기 위해서….
민하연이 얼마나 한여름을 싫어하면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나는 나와 민하연을 향해 울부짖던 한여름을 떠올리면서 배시시 웃었다.
‘평소에 잘하지, 멍청한 녀석….’
[이제는 수호 님께서도 잘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네….’
이제 나도 조심해야 할 처지였다.
다른 건 몰라도 민하연과 한봄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종속이 걸려있다고 해도 나는 두 여자와 종속으로 묶이는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진짜 진심으로 같이 나란히 걸어가는 사이가 되고 싶은 거지….
그런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자지를 놀릴 때는 신중을 기해야했다.
내가 그렇게 경각심을 갖자, 민하연이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아….”
“왜 그래? 혹시 몸 안 좋아?”
“그게….”
민하연은 잠시 뜸을 들이며 삼인방 쪽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삼인방은 서로 가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차에 한 여자가 우리 쪽을 힐끔 보더니, 우리의 시선을 눈치채고 바로 후다닥 다시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눈치를 봤던 여자는….
“혜은 씨한테 사과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서….”
손혜은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