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0화 〉 440화 마법 학교 슈트라 (351)
* * *
“안녕하세요, 성수호 씨. 이렇게 부름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나가 이곳에 있는 건 그녀의 방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카린이 이곳에 있는 좀 의외였었다.
그것도 사람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이런 야밤에….
카린이 들고 있는 촛불과 식탁 위에 올려진 촛불로는 방 전체를 밝히는 건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정 부분만 밝히는 촛불 덕분에 오히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집중할 수 있었다.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린에 비해서 안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의 기류를 느끼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했었나 보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곳에 나를 부른 건 안나라기보다는 카린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제보!
[제프 포츠가 방 안에 있습니다.]
‘뭐!? 어디?’
[현재 방 옷장에 숨어 있습니다. 다만 기질창으로 봐서는 숨은 것이 아닌, 수면제에 취해서 잠든 것 같습니다.]
너무 황당한 상황 때문에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인상을 찡그려 버렸다.
이 괴상망측한 일을 누가 한 것인지 따로 고민할 필요도 없이 지목할 수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제프가 숨어 있다는 옷장에 시선을 빼앗겼고, 카린은 그런 내 시선을 간파했는지 나와 같이 옷장을 힐끗 보고 나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일단 앉으세요.”
“네….”
분위기가 흡사 흡혈귀의 저택에 들어온 분위기였다.
꼭대기에 대롱대롱 달린 샹들리에에는 불씨 한 점 달리지 않았고, 오로지 촛불 두 개로만 방을 밝히고 있었다.
지금 내 눈에 카린과 안나는 뱀파이어 모녀처럼 보일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일단 카린의 말대로 촛불이 올려져 있는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불만이 서려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안나가 자리에 앉았고, 그 뒤에 카린은 주최자가 된 것마냥 서서 나와 안나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번갈아 보기를 잠시… 분위기를 타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성수호 씨, 그동안 저희 어머니와 불같은 사랑은 즐거우셨나요?”
“카린!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모함하지 말거라!”
“모함이라뇨. 어머니….”
카린은 우아한 붉은 색 드레스로 바닥을 끌며 구두 소리와 함께 앉아 있는 안나의 등 뒤에 서서는 그녀의 어깨 위에 양손을 올리며 야릇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설마 제가 알아차리지 못 하리라 생각하셨나요?”
“오해다! 지금 네가 감히 이 어미를 모욕하려 드는 것이냐!?”
“대단하네요….”
카린은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는 나를 힐끗 보면서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머니가 고작 남자 하나에 이렇게 쩔쩔매시다니요.”
“…지금 말 취소하거라.”
안나는 일어서면서 지금까지 기세에 눌리던 모습을 벗어 던지고, 평소에 보여주던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카린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카린은 그런 안나를 보면서도 전혀 기세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어머? 설마 저 남자를 모욕해서 화나신 건가요?”
“말조심하거라. 이분은 우리 가문의 손님이다. 네가 하는 행동은 손님에 대한 예의에서 벗어났다.”
“손님이라… 하지만 반대로 손님 쪽에서 결례를 범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크읏….”
안나는 화가 날지언정 쉽게 말을 내뱉지는 못하고 있었다.
안나는 카린을 낳았고, 그녀를 평생 봐오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빈틈을 보이면 그것을 비집고 들어와서 약점으로 만드는 여자라는 것을….
안나의 말실수 하나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카린은 침묵하며 노려보는 안나를 보면서 나긋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침착하시고 앉으시죠. 어머니.”
“….”
분명 카린의 대사에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이 흠씬 묻어 있었다.
하지만 카린의 표정과 목소리 톤은 강압적이고 명령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카린에게….
“….”
안나는 쉽사리 덤비지 못하고 꼬리를 내리며 다시 의자에 앉아버렸다.
방 안에는 주황빛을 퍼트리는 촛불이 어색한 침묵을 풀기 위해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린은 침묵을 즐기듯이 눈을 감고 미소를 짓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눈을 뜨고는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실 변명이 있으신가요?”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저분은 아무런 연관이….”
“어머니, 저는 저분에게 묻고 있는 거예요. 조용히 해주세요.”
“크읏….”
카린의 매서운 눈에 안나는 기세가 눌리며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카린은 안나를 침묵시킨 뒤에 나를 바라보며 강렬한 눈빛으로 다시 물어왔다.
“변명해보세요. 저희 어머니와의 불같은 장난은 즐거우셨나요?”
“….”
이쯤 되니 카린의 의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안나의 관계를 이용해서 엉망진창으로 묶여 있던 모든 관계들을 한 번에 정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아직 카린의 계획을 완벽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린은 분명 내게 말했다.
(두 남자가 당신의 유흥거리로 전락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게요.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나와 안나, 나와 루이스, 나와 제프, 그리고 그 모든 사이에 나와 연관된 카린.
‘좋아. 장난에 맞춰주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저와 공작부인은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
안나는 내 말에 상처를 입을 것처럼 울상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든 건 제 욕심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욕심?”
“제가 공작부인에게 접근했고, 참지 못하고 그녀를… 덮쳤습니다. 모든 건 제 잘못입니다.”
안나는 그런 내 말을 듣자마자 경악하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나를 향해 외쳤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건가요!”
“안나 님에게 책임은 없습니다. 모든 죄는 저에게 있습니다.”
“죄라뇨!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오히려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 내가….”
나는 끊임없이 안나의 잘못이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내 죄로 전부 뒤집어썼고, 안나는 그런 나의 행동을 질타하며 자신의 죄로 덮고 있었다.
나와 안나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연인처럼 물러섬 없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게 카린이 원하는 그림인가 싶어서 그녀를 잠시 흘겨봤는데….
‘뭐야? 이걸 원하는 게 아닌가?’
카린은 서로 죄를 뒤집어쓰는 나와 안나의 모습을 차게 식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한 계획을 모르겠지만, 서로를 위하는 모습에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듯합니다.]
‘…어렵다.’
여자란 어려워.
자기가 꾸며놓고 뭘 또 화를 내는지….
나와 안나의 애정이 담긴 다툼을 보던 카린은 짜증이 서린 표정으로 어색하게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사랑싸움… 재미있네요.”
“카린….”
안나는 카린의 차갑게 식은 목소리를 듣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그녀에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어미로서 부탁하마. 이 일을 함구해다오.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마.”
“어머니의 이런 모습… 정말 낯서네요.”
안나는 평생 카린에게 이런 식으로 자세를 낮추고 부탁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녀로서 사랑하지만, 여자로서 서로를 질투하는 애증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저 길바닥에서 지내는 평민이 아닌 귀족으로서 가문의 기둥이 될 정도로 재능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서로 눈앞에서 격식을 차리면서도 평생을 기 싸움을 하며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치열한 체스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격렬한 싸움 속에서 처음으로 고개를 숙인 안나의 모습이 카린에게 낯선 것이었다.
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입가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이 일은 함구할게요.”
“저, 정말이냐!?”
“물론이에요. 저는… 어머니가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해줘서 정말 고맙구나.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은 뭐든 들어주마. 결혼하기 싫었지?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파혼 이야기를 주도하마.”
안나는 그동안 카린에게 몰래 저지른 흉계를 자기가 저지른 게 아닌 것처럼 모두 해결해주겠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안나는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을 전부 토해내듯이 카린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품의와 격의를 갖추던 안나의 모습은 없었다.
오로지 나와 자신의 사랑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안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제안을 하고 나서 카린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카린의 묘연한 미소에 안나는 긴장하며 침을 삼키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카린은 그런 안나를 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안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후계자 자리… 저에게 주세요.”
“그, 그건….”
현재 브란트루프 가문의 가주는 카이 브란트루프, 루이스와 카린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안나와 카린의 꿈속을 돌아다니고, 그녀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알 수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카이 브란트루프… 안나한테 붙잡혀 사는 인간이었지.’
설마 그런 카리스마 있는 남자가 여자에게 휘둘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즉, 가문 자체는 안나의 영향력이 꽤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안나의 결정권 하나만으로 후계자를 결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너처럼 영특한 아이라면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 그건… 불가능하단다.”
“….”
아무리 안나가 가문의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대외적인 부분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루이스라는 희대의 마법 천재가 나왔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카린에게 가문을 승계한다?
아마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왕가에서도 압박해올 것이다.
심지어 루이스는 지금 주변 귀족들의 우상과도 같았다.
오히려 브란트루프 가문의 중심이 쫓겨난 루이스에게 옮겨질 것이고, 카린이 중심이 된 브란트루프 가문은 점차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런 가문을 갖는 건 카린에게 절대 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역사에 브란트루프 가문의 마지막 가주를 장식하는 치욕을 당할 수도 있었다.
카린은 안나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3년 후에 있을 후계자 선택에서 저를 지지해주세요.”
“…알았다.”
지지하는 것 자체는 표면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어차피 루이스가 후계자가 된다면 카린이 민망하지 않게 지지하는 것이라고 주변에 말하는 것으로 변명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
안나는 나중 일보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일단 상황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카린은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안나를 몰아붙였다.
“남자 하나에 쩔쩔매시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아까도 말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지금 안나는 자신을 욕하는 것보다 내 흉을 보는 행위에 더 분개하고 있었다.
종속이 걸려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안나의 저런 모습은 사실 보기 좋았다.
어떤 의미에서 여기서 제일 용기 있는 여자는 안나일 것이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그저 나를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굽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안나의 모습을 보던 카린은 오히려 냉소를 짓더니, 나와 안나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저분을 인정해요. 이번에 성수호 씨와 같이 다니면서 어머니가 왜 반했는지 저도 깨달을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어요.”
“후우…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분을 보내주거라. 그리고 나와 단둘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자.”
안나가 그렇게 나를 돌려보내려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어요.”
“부탁? 일단 무슨 부탁인지 이야기는 들어주는 줄 테니, 저분을 보내고….”
카린은 그런 안나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서 나를 도발적인 미소를 하며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카린은 장갑을 끼고 있는 얇디얇은 손가락으로 내 턱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올린 뒤, 나를 내려다보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저… 이분을 갖고 싶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