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 398화 마법 학교 슈트라 (39)
* * *
여행 자체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우리를 몰래 쫓아오는 존재들은 우리가 향하는 곳과 가는 곳이 비슷한 것처럼 위장해서 계속 따라오긴 했지만, 전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지는 않았다.
정황상 그들의 행동은 의심이 갔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틀거나 늦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제일 마음에 드는 점은 루이스였다.
내가 루이스를 왜 마음에 들어 하냐고?
“…루나랑 단둘이 있다고 이상한 생각 품지 말아라.”
“….”
루이스의 저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루나가 루이스를 따로 불러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나는, 당분간 루이스가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듯 말해줬다.
심지어 이번에는 가문을 들먹이며 나를 초대해서 그런지 학교에서처럼 수준 낮은 도발도 걸어오지 않았다.
나름 존중하는 태도로 나를 대했다.
재미가 있는 것과 별개로 웃기기도 했다.
‘귀족 녀석들은 참 피곤하게 사네….’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내건 자존심 때문에 더 싫은 행동을 하는 존재들….
내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이유는 묻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늘어 놓기 시작했다.
“루나는 시험으로 지친 몸을 풀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는 중이다. 괜히 평소에 좀 친해졌다고 귀찮게 굴지 말라는 말이야.”
“귀찮게라….”
나는 어젯밤에 루나가 내 골반 위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춤을 추고는 내 상체 위에 쓰러진 채 잠든 장면을 떠올렸다.
피곤하긴 피곤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허리를 흔들었으니….
“귀찮게 할 생각은 없어. 그저 상대해오면 내가 답할 뿐이야.”
“으드득….”
루나가 먼저 내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말속에 숨겨서 알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도발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살의를 풍길 뿐,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이 정도 속도라면 사흘 정도 후에는 국경을 통과해서 진입하고, 이틀 정도 더 이동하면 레빈 왕국에 도착할 거다.”
그리고 국경을 통과하게 되면 지금처럼 상인들이 달려들어서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다른 귀찮은 존재들이 달려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아마… 왕국에서 사절단을 보낼 거다.”
“사절단?”
“그래, 학장님께서 방문하시니 지금도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그냥 준비 수준이 아닐 것이다.
지금 레빈 왕국은 내가 살던 세상에서 군대로 치자면 후방에 방문한 대통령을 맞이하는 기분일 것이다.
평생 볼 일도 없는 양반이 오겠다고 하니 난리가 날 수밖에….
그런데 사절단이 오는 게 나랑 뭔 상관이지?
“분명 사절단에는 우리 왕국의 귀족들이 전부 대동해서 참여할 가능성이 커.”
“…?”
“그때만큼은 제발 예의범절을 지키고, 입 다물길 빌겠어.”
“하하….”
루이스가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지….
하지만 그의 말이 이해는 갔다.
루이스의 입장에서 나는 평민이고, 귀족의 예법 따위는 배우지 않았으니까.
그냥 놀러 가는 것이라면 모를까, 귀족들과 엉기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내 행동이 루이스 녀석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는 녀석의 초대를 받은 처지니까.
“알았어. 나도 초대 받은 입장에서 예의는 지켜야겠지.”
“…진심이냐?”
루이스는 매번 나랑 티격태격 한 사이라 그런지 내 배려가 담긴 말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내기에서 이겨서 받아낸 보상이라고 해도 초대받은 건 사실이잖아. 예의는 지켜야지.”
“으드득….”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루이스와의 시험 대결에서 이긴 것을 은연중에 말해버린 것이었다.
이번에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루이스는 한참을 이를 갈더니 말했다.
“여행 중에 시간 나면 소냐 교수님이나 칼에게 예법 정도는 물어봐라. 최소한 평민 취급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
루이스의 말의 의도는 최소한 천민 취급은 받지 않게 잘하라는 의미였다.
“그래, 그래…. 다른 사람한테 잘 물어볼 테니까. 이제 신경 끄고 네 할 일이나 해.”
“흥….”
루이스는 콧방귀를 뀌고는 식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예의라고는 밥 말아 먹은 듯한 루이스의 태도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루나한테 물어봐야지~”
나는 그렇게 흥얼거리며 루나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루나의 숙박시설로 찾아와서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예법이요?”
“응, 최소한 기본적인 것만이라도 부탁할게.”
루나는 정복 차림으로 나를 골똘히 보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해줬다.
“확실히… 그냥 평범하게 방문하는 거라면 모를까 지금은 꼭 필요하겠네요.”
루나도 대충 내 말을 듣고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학장님과 대동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경우가 생기겠네요.”
내가 그저 루이스의 집에 놀러 가는 것이라면 그냥 그 집안의 사람들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학장과 대동해서 방문하는 것이라면 목적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공작가 뿐만 아니라, 중앙정권에 몸을 담은 귀족들부터 시작해서 몰락한 귀족들까지… 모든 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제일 큰 존재는….
“분명 거기에는 왕족도 끼어 있을 가능성이 커요.”
생각해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학장이 방문한다는 것을 알면 왕족들도 눈썹을 미친 듯이 휘날리며 맞이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나는 학장과 동행하고 있으니, 보기 싫어도 그들을 봐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학장이야, 본인 자체가 그냥 움직이는 예법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평범한 인사 한마디조차 사람들 세례를 받고, 축복받는 기분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그나마 좋게 평가하자면… 슈트라 봄학기 1등 학생 정도?
“일단 왕족보다는 공작님을 뵐 때의 예법을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뵙게 되면….”
왕족은 직면할 가능성이 ‘조금’ 있다 수준이지만, 루이스의 부모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대접받으려면 그만큼의 예의도 따라야 하는 법.
나는 루나의 설명을 집중하며 듣기 시작했다.
일단 만나서 해야 할 기본적인 행동과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들을 중점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공작과 만났을 때, 공작의 부인을 만났을 때, 왕족을 만났을 때 등등….
루나가 설명해주는 예법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고,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애초에 내가 살던 세상도 기본적인 예의는 중시하는 곳이니까.
하지만 생소한 것들투성이다 보니 완벽하게 습득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기본적인 인사에서부터 대화할 때 주의점까지 경청하며 듣다 보니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그다음은 테이블 매너인데….”
“그건 내일 할까? 이미 식사 시간은 한참 지난 거 같은데.”
무엇보다 이미 저녁을 먹은 상태였다. 굳이 테이블 매너를 배운다고 음식을 억지로 배 속에 넣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루나의 생각은 달랐다.
“테이블 매너는 일단 식기만 있어도 충분해요. 잠시만요.”
루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황금색의 종을 들고 방문을 열어서 종만 내밀어서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복도에는 경쾌하며 고요한 종 소리가 살며시 울려퍼졌다.
찰랑찰랑찰랑~
세 번가량 흔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으니 여자 직원이 후다닥 달려와서 바로 용무를 묻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기본적인 풀코스 식기 좀 가져다주세요.”
“식기… 말씀인가요?”
“네, 음식은 필요 없어요. 그리고….”
루나는 그 이후 내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직원에게 뭔가 말을 건넸고, 직원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금방 가지고 오겠습니다.”
직원이 떠나자마자 루나는 방에 들어와서 망토를 벗으며 내게 말했다.
“수호 씨, 슬슬 옷 갈아입으세요. 욕실 먼저 이용하실래요?”
“아냐. 먼저 씻어.”
“그럼 저 먼저 씻을게요. 혹시라도 식기들 오면 테이블 위에 올려만 놔주세요.”
“응.”
루나는 내 대답을 듣고 정복을 입은 채 파자마를 들고 욕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같이 헐벗고 섹스를 하는 사이이지만, 정작 내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건 창피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점이 있다면….
‘아예 내가 자고 가는 걸 상정하고 이야기하네.’
루나는 당연히 내가 여기서 자고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루나에게 예법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내 숙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오늘 루나와 같이 이동하면서 느꼈지만, 확실히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조금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피곤하지 않으려나?’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나 슈타트펠트가 애초에 싫어했다면 진작에 거절 의사를 밝혔을 것입니다.]
하긴… 최근 루나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루나가 들어간 욕실 안에서는 어느새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루나의 샤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궁금하다… 우리 사이라면 몰래 엿봐도 문제없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엿보는 건 추천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무슨 소리죠?’
[누가 봐도 수호 님의 표정은 엿보고 싶어 하는 남자의 표정이었습니다.]
‘….’
나는 너처럼 눈치 빠른 애가… 좋아….
아르모니아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은 계속 루나가 있는 욕실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욕실 안에서 들려오는 루나 목소리….
(혹시라도 말씀드리는데, 보지 마세요.)
“….”
내 이미지도 도대체 어떻게 자리를 잡았으면 루나가 보지도 않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나는 머릿속으로 루나의 샤워하는 몸을 떠올리면서 식탁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숙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똑.
(요청하신 물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직원의 목소리를 확실히 들은 나는 문을 열어서 직원을 맞이했다.
“식기를… 어!? 여기가….”
나와 마주한 여자 직원은 나이가 대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뭐랄까… 평범한 여자였다.
여자 직원은 문이 열리자마자 내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며 방문에 적혀 있는 호실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방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워서 제가 받기로 했어요. 괜찮아요.”
“아….”
여자 직원은 내 말을 듣자마자 시선이 자동으로 방 안에 있는 욕실 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찰박, 찰박….
욕실 안에서는 옅은 물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녀는 바로 상황을 이해한 듯 보였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하는 젊은 여자 직원을 향해 말했다.
“가지고 오신 건 저기 테이블 위에 올려놔 주세요.”
“네, 네!”
직원은 황급히 테이블 위에 가지고 온 식기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나는 직원이 올리는 식기들을 보면서 한탄하기 시작했다.
‘나이프가 왜 저렇게 많냐….’
[각자 사용처가 따로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아이고… 이건 좀 귀찮겠다.’
밥 먹을 때 신경 쓰는 것만큼 귀찮은 게 없는데….
그렇게 식기 들이 전부 올라가고 나서 식기 말고 예상외의 존재가 식탁 위에 올라가 져 있었다.
“응?”
“일단 풀코스에 쓰이는 식기를 전부 가지고 왔습니다. 혹시라도…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그럼….”
여자 직원은 한 방에 남녀가 있는 장면이 살짝 쑥스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방을 나갔다.
하지만 내 눈에는 딱히 여직원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냥저냥 한 외모였으니까…. 오히려 내 시야를 잡고 있는 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보라색 병이었다.
내가 그렇게 병을 보고 침묵하고 있을 때, 욕실 문이 살짝 열리면서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와인… 괜찮으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