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화 〉 368화 영웅 사관 학교 (49)
* * *
초서현은 성수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속삭였다.
“…자나?”
초서현은 자신의 속삭임에도 전혀 미동하지 않는 성수호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는 그의 품에서 조용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초서현은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멈칫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가기 싫다.”
한겨울에 이불 밖으로 나올 때, 느껴지는 한기.
그것도 육체적인 한기가 아닌 마음속을 품던 따뜻한 온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남자 품이라는 건 그저 나약하고, 내숭 떠는 여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초서현이었다.
그랬던 초서현은 자신을 소중하게 품어주는 남자의 품을 빠져나가는 것만으로 상실감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참 많이 변했네.”
초서현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옷을 다 갈아입고 나서 벽에 달린 숫자로 이루어진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02:24
한창 새벽의 한기가 세상을 뒤덮은 시간에, 제일 따뜻하고 행복한 장소를 빠져나가야 하는 초서현.
하지만….
“…가자.”
초서현은 성수호의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미소를 짓고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고 나서야 조용히 속삭이던 목소리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생도나 다른 교관한테 들키면 진짜 귀찮아지니까….”
교관의 사생활은 보장받는다.
그게 바로 영웅이자, 영사관에 근무하는 교관들을 향한 배려였다.
하지만 초서현도 우연히 아침에 남자 교관 기숙사를 나오는 모습을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이제야 이해가 가네.”
초서현은 영사관에서 생도와 교관으로 지내면서 교관들의 은밀한 만남을 간간이 목격한 적이 있었다.
아침 일찍 훈련을 나오다가 보기도 하고, 심지어 교관 복무를 하다가 여자 기숙사에서 나오는 남자 교관을 보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초서현은 속으로 웃기만 했다.
(거참…. 남자, 여자가 만나는 게 뭐가 창피한 일이라고 저렇게 변명을 늘어놓는 건지….)
그렇게 생각했던 초서현이지만….
“하아… 가는 길에 들키면 창피해서 학교생활 내내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것 같아….”
정작 본인은 들키지 않고 싶어서 이렇게 새벽에 몰래 자신의 기숙사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빨리 남자 기숙사를 빠져나가기 위해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순간이었다.
“…읏.”
순찰하고 있던 경비원과 마주한 것이었다.
‘휴… 교관인줄 알았네.’
초서현은 그에게 최대한 얼굴을 비치지 않게 하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는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
초서현은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느끼고, 자신을 지나치는 경비원을 슬쩍 바라보기 시작했다.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는 경비원.
영사관, 그것도 이런 기숙사에서 근무하는 경비원들은 함부로 눈을 돌리면 안 된다.
그걸 알고 있는 초서현은 그런 부분에서는 터치하는 주의가 아니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만한 사안이었다.
평소라면….
‘…아씨.’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밤중에 남자 기숙사에 방문한 여자 교관이 왔으면 뭐하러 왔겠는가.
경비원의 생각을 마음대로 판단한 초서현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그를 올려다보며 노려봤다.
“저기요.”
“네, 네!?”
“구경났어요?”
“아! 죄, 죄송합니다.”
“아씨… 짜증 나게.”
초서현은 경비원에게 짜증을 낸 뒤 기숙사 출구로 향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건 한마디 해야겠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숙사 출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
고충신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니, 그냥 좀 본 거 가지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비를 서기 전에 들었던 경고가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기숙사 내부에 돌아다니는 분들과 절대 눈 마주치지 마세요. 아셨죠?)
그는 졸렸던 정신이 번뜩 들면서 한숨을 푹푹 쉬기 시작했다.
“설마 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하아… 되는 게 없네.”
그는 그렇게 근무 시간 내내 짜증을 내면서도 나중에 닥칠지 모르는 핀잔에 대해서 걱정하며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실눈을 뜨고는 초서현이 닫고 나간 문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갔네?”
내가 자는 척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 새벽 몰래 게임할 때, 들키기 직전에 후다닥 누워서 자는 척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보니….
내가 누워서 뒤척거리자 아르모니아가 내게 물어왔다.
[성수아는 만나지 않으십니까?]
‘응, 이번 주는 최대한 만남을 자제하려고.’
성수아에게는 혹시 몰라서 오늘 접속하지 못한다고 말해놓은 상태였었다.
초서현과 몇 시에 마무리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도 있지만, 다른 큰 이유가 있었다.
[어째서입니까?]
‘기대감을 줘야지.’
이번 주말, 성수아와 같이 식사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그냥 밥 한 끼 먹고 끝날 수도 있고, 어쩌면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하루를 보내냐가 아니었다.
‘내가 없는 공백을 계속 만들어서 본인이 뭘 할지 기대하게 해주려고.’
기대감은 큰 원동력이 된다.
처음 해외여행을 갈 때, 안전을 위해 여행지에 대한 주의사항을 숙지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주의사항을 넘어서서 여행의 모든 것이 담긴 책이나 블로그, 영상들을 보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컨텐츠에 푹 빠져들어서 정작 진짜 여행을 갈 때, 흥미가 식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나와 성수아는 어떤 의미에서 첫 데이트를 하는 것이다. 만남을 자제해서 기대감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성수아가 아직 내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일단 기대하게 만들어서 나쁜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일단 성수아는 좀 거리를 두고…. 문제는….’
나는 즉시 침대에서 일어난 뒤에 침대 밑에 있는 상자를 꺼내서 조용히 열기 시작했다.
아르모니아가 말했던 보안이 철저한 보관함.
그 안에는….
“이거 가지고 있으니까 좋긴 한데, 좀 불안하네.”
던전 기믹 활성화 구슬.
크기는 고작 해봐야 야구공만 하지만,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물건.
문제는 그 가치와 별개로 몰래 훔친 것이라 함부로 팔거나,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나마 내 방은 나름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이 밑에 조심히 숨겨두고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방법을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초서현이 수호 님의 방을 뒤지는 성향은 아니겠지만, 실수로라도 들키면 곤란해질 것입니다.]
‘그러게… 거기다 고충신 새끼가 혹시라도 내 방 위치를 알아서 염탐하다가 발견하면…. 아!’
[…?]
나는 노트를 꺼낸 뒤, 내가 지금까지 배웠던 마법진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마법진을 차곡차곡 그리기 시작하자 아르모니아가 내 행동을 이해했다는 듯이 통신으로 말해왔다.
[연금술…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일단 되는지 확인만 해보자.’
된다고 해서 무턱대고 연성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연금술 특성상 결과물이 뭐가 나올지 미리 알려주기 때문에 확인해봐서 나쁜 것은 없었다.
만약 원하는 게 나와서 연금술로 만들 수 있다면?
이렇게 숨겨놓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든 마법진을 그린 뒤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불가
불가
….
하지만 내가 가진 마법진과의 궁합이 좋지 않은지 다 불가라고 뜨는 상황이었다.
‘뭐야? 설마 안되나? 어!?’
그렇게 계속 시도하는 중에, 하나가 떴다.
[마기 트랩 마법진 성공률 : 100%]
지속성 마법진과 섞어서 나온 확인 창이었다.
‘마기?’
독기는 들어봤어도 마기는 처음 들어봤다.
[아마 이곳에서 독기라고 불리는 것이 마기라는 정식 명칭이 있는 것으로 추론됩니다.]
‘독기든, 마기든 그냥 같은 건가 보네. 그럼….’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자.’
[좋은 선택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고 해도 수호 님의 거처를 생각한다면 빨리 소모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아르모니아의 말대로였다.
좋은 마법진과 조합하려고 시간을 끌다가 구슬을 들켜버리면 가지고 있느니만 못한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어차피 이름만 들어도 대충 이 구슬의 성능을 잘 끌어내는 마법진이라고 판단하고 연금술을 시도하기로 했다.
파앗!
그렇게 연금술로 나온 마법진의 설명을 보면서 감탄했다.
‘…진짜 연금술 개쩐다.’
=====
마기 트랩 마법진
마기가 존재하는 곳에서 랜덤한 상태 이상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마기의 농도에 따라서 상태 이상의 강도가 결정됩니다.
단, 일정치 이상의 마기가 존재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나 소모 X)
=====
그저 연금술로 섞었을 뿐인데, 구슬의 성능을 완벽하게 담아낸 마법진이 완성되어 있었다.
비록 구슬은 사라지는 바람에 팔거나 누군가에게 양도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내게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랜덤이라는 게 아깝다.’
[원래 가지고 있던 물건도 랜덤성을 지녀서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이게 어디야.’
원래 욕심이라는 건 끝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씁쓸하게 웃으며 나는 마법진을 머릿속에 입력시킨 뒤에 종이를 불로 태워서 완벽하게 증거를 인멸했다.
..
..
나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연차가 있는 경비원에게 한가지 보고를 받게 되었다.
그건 바로….
“클레임이요?”
“네.”
“무슨 클레임인데요?”
“그… 이번에 새로 온 경비원 친구가 실수했습니다.”
내용의 요지는 경비원 한 명이 남자 교관 기숙사에 방문한 여자 교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여자 교관과 실수한 경비원 모두 나와 연관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 초서현 교관님과 고민혁 씨입니다.”
‘고충신….’
사고를 알아서 쳐주네?
뭔가 꼬투리 잡을 건덕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책 잡을 일이 굴러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연차가 있는 경비원은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을 더 잇기 시작했다.
“그… 초서현 교관님께서는 적당히 주의시키라고 하셨지만, 나중에 일이 커질지 몰라서 미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하….”
지금 내 앞에 있는 경비원은 내가 초서현 교관이 남자 교관 기숙사를 들른 이유를 대강 알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싶어도 지금 남자 교관 기숙사의 출입을 통제하는 인물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경비원이었다.
즉, 빨리 입을 털어서 자기에게 피해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의미였던 것이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가 초서현 교관님께 직접 찾아가서 사과드려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경비원은 안도가 섞인 한숨을 쉬면서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고민혁 씨 불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경비원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충신이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와… 왔습니다.”
“….”
그의 표정에는 불안, 초조, 걱정, 긴장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
딱 봐도 자기가 왜 불려왔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었다.
나는 바로 일어서면서 한마디로 정리했다.
“다음부터 주의해.”
“네?”
“다음부터 주의하라고. 처음이니까 넘어갈 테니까.”
고충신의 낯빛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고충신의 태도를 보아하니 밤새 근무를 서면서 얼마나 고충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었다.
가뜩이나 근무표 때문에 나한테 잘 보여야 하는 처지에 실수까지 했으니 말이다.
나는 고충신에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진짜 조심해. 그냥 기숙사 근무할 때는 고개를 푹 숙이고 신원 확인할 생각도 하지 말고 근무해.”
“네, 알겠습니다.”
“그냥 근무 내내 그냥 고개 숙이고 다녀. 누가 말 걸면 그때 고개 들고 대답하고. 알았지?”
“…알겠습니다.”
나는 고충신의 썩어가는 표정을 보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남의 눈치를 쥐뿔도 보기 싫은 녀석이 밤새 고개 숙이고 다닐 생각을 하니 열불이 터지겠지.’
기질창만 봐도 남에게 굽히는 녀석이 절대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밀어붙이며 고충신의 기분을 잡치게 했다.
“아니, 그냥 숙이고 다니는 것도 부족해. 뭐 주워 먹을 거 없나 하는 파리 새끼처럼 바닥만 보고 다녀. 알았지?”
“아… 알았습니다.”
“절대 고민혁 씨를 파리라고 비하하는 게 아니야. 정말 그 정도로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강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알았지?”
“…네.”
고충신의 썩어들어가는 얼굴… 너무 보기 좋았다.
나는 기분이 한껏 업된 상태에서 슬슬 계획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해볼까?’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근무표 말인데. 작성하다 보니 실수를 한 거 같아. 수정은 바로 힘들겠고, 며칠 안에 수정해서 다시 게시판에 올려둘게.”
“가, 감사합니다!”
고충신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감사가 깃든 표정을 지으며 내게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해왔다.
정말 싫긴 싫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나는 속으로 비릿하게 웃으며 그에게 조용히 묻기 시작했다.
“고민혁 씨.”
“네?”
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는 고충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워오레라고 알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