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6화 〉 356화 새로운 휴가 (4)
* * *
나는 투명 케이스 안에서 새하얀 빛을 희미하게 품고 있는 에테르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영롱하도다….’
반 장난으로 한 말이긴 했지만, 반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안에서 퍼져 나오는 빛은 주변을 밝히는 강한 빛이 아닌, 희미하게 주변을 품는 아늑한 빛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아늑함을 품고 있는 에테르는 진가를 모르는 나조차도 끌려들어 가게 만드는 강렬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가지고 가자.’
[죄송합니다. 불가합니다.]
‘아이고… 역시나.’
막상 저지를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아르모니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훔쳤던 던전 기믹 발동 구슬조차도 소지한 채 함선으로 가지고 가지 못했었다.
그런 마당에 한 세계를 변화시킨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이템 정보는 볼 수 있어?’
[일단 가능은 하겠지만, 그것도 엄청난 에넬을 소모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단 확인하는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고작 정보 하나 보는 데에도 엄청난 에넬을 소모하는 녀석.
최소한 어떤 녀석인지 알아낸 뒤에 조디악과 거래를 해보든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자, 그럼 빠져나가기 전에 마무리는 지어놔야겠지?’
나는 한창 자고 있는 꼬맹이 쪽을 보면서 뇌속성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뇌속성 마법의 종착지는 저 꼬맹이가 아니었다.
꼬맹이 주변에 있던 물건들….
파치칙! 파지지직! 파지지….
저 꼬맹이가 쓰던 물건들은 전부 기계였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전기에 취약하다는 의미였고, 전기를 난사해주면 제아무리 좋은 성능을 지닌 물건이라고 해도 결국 고철 쓰레기로 분류될 뿐이었다.
나는 괜히 어설프게 정전기를 내는 수준이 아닌, 강도 높은 마법력을 이용해서 전자 기기들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었다.
‘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생각 같아서는 불덩이를 만들고 싶지만, 그건 왠지 불안하니까.’
[잘하셨습니다. 저 정도라면 마법이라는 의심은 전혀 하지 못할 겁니다.]
‘자, 탈출하자!’
창고만 나가면 일단 내 볼일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어렵다.
콰앙!
‘미치겠네!’
내 옆에 커다랗게 기울어져서 놓여 있던 열차 노선에 뭔가 부딪히더니, 내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끼리리리릭! 콰아아아아앙!
‘하마터면 깔릴 뻔했네.’
다행히 깔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 불행을 피했다고 미래의 불행도 막힌다는 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하늘에 둥둥 날아다니다가 걸리면 좆될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려는 순간이었다.
“끄으읏… 하으….”
“응?”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신음이 들여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내가 향한 곳은 아까 쓰러졌던 레일 쪽이었고, 그곳에는….
“끄으… 하아….”
파란색의 복장을 한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푸른색과 흰색으로 어우러진 치마가 달린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는 소녀 소녀 한 매듭들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파란색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어디서 흔히 보기 힘든 순수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기절한 아이의 머리 위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
신지수
[에테르 LV 1], [의존적인], [휘둘림], [성실함], [친절], [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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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자기가 좋아서 저런 복장으로 하고 다니는 거겠지?’
[에테르가 사용자에 맞춰서 형태를 변화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진짜 나도 갖고 싶은데?’
저거 있으면 의복 걱정은 없겠다.
싸우는 장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쇳덩어리 레일에 정면으로 부딪치고도 기절에 그친 것을 보면 엄청난 물질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물질이면 뭐하나….
“미친 너는 뭐 하는 놈이길래 여자한테만 달라붙냐?”
내가 유리 케이스 안에 있는 에테르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에테르는 내 말에 어쩌라고 라고 대답하듯이 형체를 반 바퀴 돌려서 다른 곳을 보듯 행동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여유로운 와중에도 주변은 점점 더 엉망진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가만 안 두겠어!)
(한 놈 처리했다! 내가 이 녀석을 맡는 동안 포획해!)
(네!)
(웃기지 마! 내가 보내줄 거 같아!)
(히이익!!)
(이 멍청이들아!)
뭐랄까… 애들 싸움 같아 보이는 건 착각인가?
나는 창고를 울리는 싸움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내려서 푸른색 여자아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이 애는 놓고 가기 좀 그런데.’
아까 그 남자 꼬맹이는 안전한 장소에서 쿨쿨대면 자고 있다고 하지만, 이 애는 좀 다른 입장이었다.
놓고 가면 위험할 거 같은?
‘아르모니아, 혹시 주변 탐지 불가능하고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케이스 같은 거 있어?’
[비슷한 건 만들 수 있습니다.]
1만 에넬을 소모해서 만들 수 있는 케이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유리 케이스가 얼마나 안전한지 모르는 이상 나도 대비를 해놔야 했다.
[차원 주머니처럼 완벽하게 탐지 차단이 되거나, 유성우 충돌에도 버티는 건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히 효과가 있는 케이스입니다.]
‘응, 일단 그거 좀 부탁할게. 나는 그거 나올 때까지 얘 좀 돌보게.’
[알겠습니다.]
나는 에테르가 담긴 투명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구석에 숨긴 뒤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일단 이 애는 레일에서 빼내 주자.’
[그럴 의리가 있습니까?]
사실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인사성은 밝았잖아. 이 정도는 해줘도 되지.’
무엇보다 이쪽 세계관은 아직 조디악과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관이었다.
내 행동에 실리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일단 다가가기 귀찮으니까, 마법으로 빼낼까나.’
나는 조심스럽게 바람 마법을 이용해서 그녀를 레일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빼내려고 했다.
분명 하려고 했다.
‘뭐야?’
그녀를 파묻고 있는 레일들은 분명 마법의 영향을 받아서 마찰음과 함께 빠져나왔지만, 내 풍속성 마법이 저 신지수라는 아이에게 다가가자마자 마력이 흩어지며 사라져갔다.
몇 차례를 실패한 끝에 한가지 알 수 있었다.
‘마법도 무효화… 대단한데?’
아마 내 마법력이 낮아서 그런 것이겠지만, 에테르 레벨 1인 것치고 너무 사기적인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마법력은 이미 10을 넘었고, 풍속성도 레벨 5였다.
그런데 저 에테르 기질이 내 마법을 상회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의미였다.
‘안 되겠다. 그럼….’
나는 천천히 꼬마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끌어안아 올리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사사삭!
“아… 이거 곤란하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어여쁜 옷에서 푸른색 빛을 띤 액체가 튀어나와서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자기 주인을 건드리지 말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다.
나는 에테르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네 주인 위협하려는 거 아냐. 안전하게 꺼내주려는 거야. 너 치료는 가능하냐?”
스스, 스스슥….
에테르는 잠깐 나를 경계하더니, 이내 다시 옷깃으로 스며들어 갔다.
‘이야…. 사람 말도 이해하네?’
혹시나 던져본 말이었는데, 진짜 내 말을 이해하고 경계를 풀었다.
나는 곧바로 신지수라는 아이를 양팔로 안아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평평한 바닥이 나오자 나는 그녀를 거기에 눕히는 순간이었다.
파앗!
겉으로 봤을 때는 평범한 상자처럼 보이는 케이스가 떡하니 나타났다.
[그 상자는 초기 소유자만 여닫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물론 유성우 급의 충격이 가해지면 내용물이 유출된다는 것을 명심해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유성우가 떨어지면 진짜 볼만하겠다.’
그때는 진짜 워프로 탈출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나는 숨겨 놨던 에테르가 담긴 투명 케이스를 상자에 담은 뒤 잘 놓은 뒤에 푸른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거참… 진짜 외형만 보면 마법 소녀네.’
무릎이 살짝 보이는 치마에 푸른색과 하얀색이 어울리며 줄과 면을 귀엽게 표현한 옷이었다.
하지만 그런 귀여움 속에 안쓰러운 부분이 눈에 띄었다.
‘크게 다쳤네. 이거 치료해야겠는데?’
신지수라는 아이는 종아리와 팔뚝에 엄청난 상처를 입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아도 죽지는 않겠지만, 자칫 흉터가 남아서 여자로서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초서현처럼 되면 안타깝지.’
나는 초서현에 대해 안타까움을 떠올리며 아이에게 회복을 쓰려고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으으으….”
“응? 일어났….”
“꺄아악! 누, 누구세요!”
신지수라는 꼬마는 누운 상태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기겁하는 목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서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지금 나는 인식 저해 망토를 쓴 상태였다.
정신 차리고 눈을 떴더니 웬 얼굴이 보이지 않는 괴한이 내려다보고 있으면 나 같아도 기겁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은 그녀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누, 누구신데… 하아윽! 꺄악!”
“조심해!”
다리가 다친 것도 모르고 몸을 억지로 뒤로 빼다가 갑자기 몰려온 통증에 휘청거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장소가 그저 평범한 창고가 아니라, 주변에 온갖 고철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는 위험천만한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신지수가 철로 된 잡동사니로 쓰러지려는 순간이었다.
콰당!
“꺄으응!”
“크으….”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철 잡동사니 안에 파묻힌 상태로 물었다.
“괜찮니?”
“그… 어… 네….”
내가 도와준 행동 덕분인지 신지수는 나를 보면서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안은 채 잡동사니에서 조심스럽게 일어선 뒤에 다시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일단 많이 다쳤어. 치료해줄 테니까. 기다려.”
“네? 어, 어떻게 치료를… 어?”
신지수는 내가 회복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자기 다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피와 흙이 엉겨서 더러웠던 다리의 상처가 점점 아물더니, 어느새 깨끗했던 피부로 점차 돌아오고 있었다.
신지수는 마법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신기하게 내 치료 능력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지, 지금 뭘 하신 건지….”
“나머지 팔도 줘봐. 거기도 다쳤으니까.”
“앗, 네!”
신지수는 내게 깍듯하게 대답하며 팔을 내어주었다.
나는 금세 팔고 치료한 뒤 그녀의 팔을 확인하고는 놓아주며 말했다.
“이제 됐다. 혹시 또 아픈 곳 없니?”
“그… 어, 없는 거 같아요.”
신지수는 그렇게 말한 뒤 일어나서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 금방 치료해서 다행이다.”
나는 망토를 두른 상태로 몸을 돌려서 다시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이 좀 나아졌다 싶더니, 또 귀찮은 상황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파란 꼬마 녀석, 분명 이쪽으로 왔어!)
(크게 다쳐서 기절했거나, 몸을 가누지 못할 거야. 그 녀석을 인질로 잡으면….)
딱 봐도 상대편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신지수의 입을 막고 그녀를 안은 채 좁은 틈으로 숨었다.
“흐읍!”
“쉿! 조용….”
“…..”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기색을 하며 통신으로 말했다.
‘이거 이미 빠져나가기는 글렀는데?’
[워프를 이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이렇게 된 거 정보 값을 좀 더 올려보자.’
[…들키지 않게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들키지 않으면 좋은 거래가 되지만, 정체를 들키면 오히려 조디악과 적대적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롸져~’
나는 호쾌하게 대답한 뒤 통신으로 말했다.
‘아르모니아, 일단 딱콩 좀 10개 만들어줘.’
[알겠습니다.]
아르모니아는 잠깐의 침묵을 유지한 뒤 바로 대답하며 일 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개당 200 에넬밖에 하지 않는 저렴한 녀석이다. 일단 만들어 놓고 위급상황에 쓰기로 했다.
나는 딱콩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신지수에게 물었다.
“너희는 누구야? 왜 이런 곳에서 싸우는 거야?”
“그… 그건 말씀드리기가… 곤란해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신가요?”
“응? 나?”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그냥 지나가던 행인 5라고 생각해라.”
“해, 행인이요?”
“그럼 다음 질문. 너는 악인이냐? 아니면 선인이냐?”
“….”
신지수는 보이지 않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선인이에요. 저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나는 탄환이 주머니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구해주길 잘했네. 가자.”
“네? 어, 어디를….”
“어디긴.”
나는 주머니에서 탄환 하나를 손가락에 끼운 뒤에 신지수를 찾아다니는 녀석을 향해 조준하며 말했다.
“네 친구 구해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