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7 287화 마법사의 여자를 빼앗는 방법 (2-23)
학장은 내 부탁을 온전히 들어줬다.
나는 학장에서 루나가 1등을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루나는 분명 나와 같이 필기를 1등 한 상태였었다.
하지만 실기는 무조건 방을 빼져 나온 순서로만 점수가 결정되기에 조작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도와준 방식은 나와 루나가 동시에 1등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 성적을 낮춰서….
‘일 처리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드네.’
학장은 마지막 말을 끝내고 시끌벅적한 강당 내부를 등지며 나와 루나가 서 있는 수상자들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을 앞두고 있군요. 다들 시간이 되십니까?”
“네.”
3학년과 2학년생들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나와 루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학장을 바라봤다.
학장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저는 이렇게 수상을 받은 학생들과 학기를 같이 마무리하고 싶어서 언제나 식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도 제 초대에 응해주시겠습니까?”
“아… 네!”
“네.”
루나와 나는 흔쾌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1학년 실기 등수>
1. 성수호
2. 루이스 브란트루프
3. 루나 슈타트펠트
…
<1학년 필기 등수>
1. 루나 슈타트펠트
2. 루이스 브란트루프
3. 성수호
…
“….”
루이스는 학생들 사이에 낀 채로 강당 내부에 크게 붙여진 등수를 보며 멍하니 바라봤다.
‘하아… 씨발… 씨발… 씨발….’
슈트라에 수석으로 입학할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인생은 꽃길만이 자신을 반겨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금세 숙달되는 마법과 그런 자신을 우러러보는 학생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루이스도 그 학생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다.
학생들은 루이스보다 자기 성적에만 관심을 보이며 울고, 웃고 있었다.
하물며 루이스의 추종자처럼 따라다니던 여학생들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자기 등수에만 시선을 두고 감정을 내뱉고 있었다.
그나마 등수에 만족하거나, 인정한 학생들은 서서히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는 단상에 올라간 학생들 뿐이었다.
“이야… 루나 슈타트펠트가 필기 1등이라니….”
“나 이번에 필기 5등 안에 들어갔는데, 이참에 같이 공부나 하자고 말이나 걸어볼까?”
같은 강의실을 이용하거나 같은 속성을 배우는 학생들, 특히 남학생들은 루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웠다.
루나가 워낙 냉랭한 기세를 내뿜어서 그렇지, 몇몇 귀족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학생들은 아직 루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야. 아까 못 봤냐? 성수호랑 손도 잡고 있더라.”
“무슨 손 잡으면 사귀는 거냐? 그냥 공동 1등이라 한번 잡아본 거겠지.”
“야, 아무리 봐도 두 사람 사귀는 거 아냐?”
루이스는 그 남학생의 말에 순간 발끈해서 주먹을 내지를 뻔했다.
하지만 루이스가 나서기 전에 남학생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장난하냐? 아무리 지금 1등이라고 해도 어디 국가 소속인지도 모르는 평민이랑 루나가 사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래도 그렇게 같이 붙어 있는 거 보면….”
남학생들은 루이스를 주변에 널려있는 학생5 정도로 생각하며 의식하지 않고 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들어보니까, 같은 동아리라며? 그 뭐냐… 존나 작은 동아리인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그래, 나도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우연히 두 명만 입부해서 친해졌다고 그러더라.”
“그런가….”
방금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던 남학생도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학생들과 동조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희망적인 동물이다.
완벽한 힌트가 눈앞에 있어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답이라고 판단되면 문을 열어보지 않고 회피를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다.
하물며 성수호와 루나는 생각보다 강의실 안에서 큰 대화를 주고받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남학생들 관점에서 루나가 성수호와 친한 건 옆자리와 같은 동아리, 그리고 생각보다 공부를 잘해서라고 결론을 내리기 시작했다.
절대 그 이상이 아니었으면… 하는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 나 이미 동아리 들어가서 나오기 애매한데.”
“나도.”
“시험에 관해서 계속 도움받아놓고 지금 와서 나갈 수는 없지….”
다들 한탄하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도중에 의아한 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수호는 어떻게 필기 3등을 했지?”
“거기다 실기는 1등….”
그 말에 다른 학생들도 모여서 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냥 열심히 한 거 아냐?”
“우리는 뭐 놀았냐? 정학당한 녀석이 그렇게 잘 본 게 이해가 안 가는 거잖아.”
“하긴….”
“야, 혹시….”
“…?”
한 학생의 말에 모두 고개를 돌렸고, 자신을 보는 시선에 부담스럽던 학생은 간신히 생각을 내뱉을 수 있었다.
“…시험 문제 학교에서 빼돌려서 구한 거 아닐까?”
적당히 잘 보는 것이라면 이런 의심이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 동안 정학을 당한 학생이 1등을 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거기다 필기시험 당시에 같은 강의실을 쓰는 학생들은 전부 봤다.
성수호가 제일 먼저 시험장을 나가는 모습을….
“그런데 뭔 수로?”
“그거 빼돌리면 퇴학으로도 안 끝날걸?”
“궁금하네. 나는 선배한테 물어봐야겠다. 그런 사례가 있는지….”
강당에 남아서 성적을 보던 학생들은 모두 그 이야기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단 한 명만 빼고.
루이스는 이미 강당 안에서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상태였다.
***
학장과 수상을 한 학생들은 원형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형 테이블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상석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다들 한쪽으로 시선이 가 있었다.
학장은 웃으며 간단한 학생들에게 간단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곳에 시선을 두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나.
‘이야… 이 정도면 거의 폐가 아냐?
[폐가치고는 청소와 정돈은 깔끔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가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아마 폐가처럼 보이는 주요 원인인 듯싶습니다.]
사실 루나도 처음 학장의 집에 들어왔을 때 나와 같이 살짝 당황이 서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표정을 풀고 차분하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조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학장이 나긋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말했다.
“너무 누추한 곳에 초대해서 미안합니다.”
학장의 말에 학생들은 일제히 내게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소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이 양반은 내 편이라고 그렇게 말해놓고 나를 골탕 먹이려는 건가….
다행히 진짜 학장이 골탕 먹이려는 것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탈출 루트가 존재했다.
“감탄했습니다.”
“음? 감탄이요?”
“학장님은 한번 거둬드리신 것을 최대한 오래 간직하시는 것 같아서 감탄했습니다. 사람은 물건을 다루는 것을 보면 사람을 대하는 것도 알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호.”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하는 대답이었는지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학생들뿐만 아니라, 루나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휴우… 일단 다행히 넘어갔군.’
[임기응변이 뛰어나십니다.]
‘게임에서 들은 내용이야.’
[…게임 응용력도 뛰어나십니다.]
칭찬이지?
그렇게 내가 대답하고 나서야 음식이 도착했고, 학장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내용은 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출신이나 학교에서의 불편한 점, 그리고 기타 건의 사항 등등이었다.
그리고 건너 건너와서 도착한 것이 루나였다.
“루나… 슈타트펠트 학생 맞죠?”
“네.”
학장은 아까부터 루나에게 시선을 쉽게 떼지 못하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친 영감탱이… 아니, 산송장이 루나를 좋아하나 하고 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조교수 사건에서 만난 루나에게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보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장은 루나의 외모나 이름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 뒤에 있는 성(姓)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슈타트펠트… 레빈 왕국 출신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루나도 학장이 자신의 출신과 성에 관심을 가지자 자부심이 담긴 듯 어깨를 펴기 시작했다.
학장은 그녀의 모습에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오랜만이군요. 슈타트펠트…. 클라우디아 슈타트펠트….”
학장은 과거를 회상하듯 침묵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에 루나에게 귓속말로 물어봤다.
“클라우디아가 누구야?”
“저희 가문의 초대 가주님이세요.”
“아하….”
이름이 여자 같긴 한데, 굳이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학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루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들어보는군요. 클라우디아 슈타트펠트… 정말 고집불통의 친구였는데.”
“….”
루나의 심기가 살짝 거슬리는 것이 느껴졌다.
초대 가주가 어느 시절의 인물인지 모르겠지만, 학장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전쟁 중에 만났을 가능성도 컸다.
학장은 클라우디아라는 인물의 대한 평을 서슴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매사 답답하고, 융통성이라고는 정말 없는 친구였죠.”
“….”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을 때는 정말 바보 같았고….”
“학장님….”
아무리 루나가 나라에도 버림을 받고, 가문이 없어졌다고 해도 저 말을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나도 가족에게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지만, 가족 욕을 하면 일단 주먹부터 내지르고 볼 테니까.
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학장에게 대신 뭐라고 할 생각으로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클라우디아… 그 친구 죽었을 때, 정말 많이 울었는데….”
“….”
“생각해보면 그때가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던 날이라 더욱더 기억에 남는군요.”
이제야 학장과 클라우디아라는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어떤 관계인지는 본인이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감정을 나누는 사이처럼 보였다.
루나는 학장이 했던 말들의 의미를 파악한 뒤 표정을 풀었다.
학장은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왔던 위르겐 슈타트펠트가 생각나는군요.”
“아… 아버지는….”
“지금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
루나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한 방울씩 음식에 떨구기 시작했다.
학장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도…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학장은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세상사에 너무 관심을 두지 않다 보니.”
“괘,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갑자기 이런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는 옆에서 루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면서 위로를 했다.
“괜찮아?”
“고마워요. 그리고 학장님…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나가 바로 상황을 정리하며 분위기를 다시 띄우기 시작했고, 다행히 식사는 즐겁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
..
“괜찮아?”
“으으… 네, 괜찮아요.”
루나는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내 팔에 붙어서 최대한 앞으로 걸어갔다.
루나는 평소에도 초대받은 자리에서는 와인을 한두 잔 정도 마시곤 했다.
당연히 지금까지 고작 한두 잔으로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까 대화 때문인지 평소보다 술을 더 마시게 됐고, 주량을 생각하지 않고 계속 마셔서 결국 지금처럼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휘청거리는 루나를 옆에서 껴안은 상태로 부축한 상태로 기숙사로 향했다.
그런데 루나가 가는 중에 나는 끌어당기며 말했다.
“잠깐… 잠깐만 쉬었다 가요.”
“응? 기숙사 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알았어.”
나는 휘청거리는 루나를 데리고 결국 테라스로 향했다.
그곳만큼 우리 둘에게 어울리는 장소는 없었다.
아, 아니다. 캐비닛좌가 있다는 것을 깜박했다.
테라스가 아무리 추억이 많다고 하더라도 캐비닛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내 허리를 붙잡고 안겨 가는 루나의 모습은 가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다행히 밤중이라 학생들도 돌아다니는 시간이 아니었고, 조수나 교수가 진귀한 광경을 보듯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테라스에 도착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밤을 넘어서 새벽이 되어가는 중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 앉아서… 응?”
루나를 앉히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내 허리를 강하게 끌고 가면서 테라스 끝 쪽으로 향했다.
테라스 구석에 있는 장소.
루나와 내가 어떤 의미에서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던 장소였다.
루나는 자신이 안쪽으로 들어가며 나를 당기면서 그 공간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품에 안겨서 취기가 담긴 숨을 몰아쉬는 루나를 보면서 말했다.
“오랜만이네. 시험 때문에 올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흥.”
루나는 콧바람을 내보내면서도 내 품에 안겨서 가슴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취하긴 했네. 평소보다 애교가 많아졌네.’
잠자리에서는 몰라도 평소에는 여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루나도 취하니 애처럼 굴기 시작했다.
나는 애교를 부리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제 가서 자야지. 내일 또 만날 수 있잖아.”
“…못 참겠어요.”
“응?”
“저번에 수호 씨가 스위치가 올라간 것처럼 저도 올라갔는데….”
루나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얼굴을 붉히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 스위치, 지금 내려주시면 안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