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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우리에게 편의를 봐주면서 이곳에 자유롭게 머물러도 된다고 설명해줬다.
“저희 저택 정원에서 편하게 공부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저희 직원을 부르시면 해결해줄 겁니다.”
칼은 그렇게 우리에게 집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한 뒤 다시 일이 있다며 악기점으로 향했다.
배가 불러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데이트가 꽝이 되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칼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악기점 다음으로 생각해둔 곳은 있었습니까?]
‘정 안되면 모텔에서 쿵짝쿵짝 하려고 했지.’
[…칼 프리드리히를 만나서 천만다행입니다.]
왜? 모텔에서 꽁냥꽁냥대는 게 얼마나 좋은데?
옆에서 루나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나 싶어서 물었다.
“왜?”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말해봐.”
“…소냐 교수님과는 어쩌다 그런 관계가 되신 거예요?”
“….”
지금까지 던져오지 않았던 강속구를 날려왔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정말 곤란한 부분이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문제, 거짓으로 말해도 문제.
루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소냐도, 칼도….
유부녀와 몸 관계를 한 나, 유부녀임에도 바람을 피운 소냐, 그것도 모르고 자기를 탓하는 칼.
루나의 시점에서는 이 세 가지가 전부 미스테리할 것이다.
나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루나… 지금 당장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냐.”
“….”
루나는 내 말을 듣고 섭섭한 표정으로 저 멀리에 있는 하늘 끝에 달린 뭉게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라보던 루나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부탁드릴게요.”
“….”
“제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후회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
내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루나가 내 말을 끊고 하늘 끝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바람을 피워도 좋아요. 다른 여자한테 시선을 돌려도 좋아요. 다만….”
“….”
“나를 떠나서 제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루나는 그 말과 동시에 나를 바라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꼭 명심할게.”
“….”
루나는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애 옆에 바싹 붙인 다음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저도 당신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언젠가 말하겠죠. 하지만…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만큼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어깨에 기댄 루나의 앞머리를 쓸어 내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것만큼은 절대 약속할게. 어떤 경우에라도 너를 떠나지 않을게.”
“…고마워요.”
우리는 정원에 앉아서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키스했다.
쿵….
책상에 많은 서류뭉치가 한꺼번에 놓이면서 책상다리를 통해 방에 미세한 진동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서류뭉치를 놓은 여자의 가슴도 세차게 흔들렸다.
“후우…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소냐는 중얼거리면서 의자에 쓰러지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조교수 평가를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일단 1차 평가는 충분한데…. 2차 평가는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네. 오랜만에 시험 보는 기분인데?”
소냐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모든 인간이 위로 올라가기를 갈망한다.
그건 소냐도 마찬가지였다.
기회가 왔을 때 잡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여유를 부리다가 결국 정처 없이 헤매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다.
소냐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혐오하지 않고, 오히려 타산지석으로 삼으며 자신을 더욱더 채찍질해왔다.
“일단 1차 평가는 아직 2주나 남았으니까. 오늘은 돌아가자. 저녁은 칼이랑 먹어야지.”
책상을 정리한 뒤 건물을 나와서 교문으로 향했다.
소냐는 교문으로 향하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학생들을 관찰했다.
대부분 학생은 소냐와 마주하면 바로 인사를 건넸고, 소냐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아줬다.
하지만 그렇게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작년부터 몸도 이상하고….’
평소에 집중할 때는 주위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집중하는 소냐였지만, 모든 정신을 쏟아내고 잠시 긴장이 풀리면 순식간에 욕구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칼과 만나기 전에 연애 따위는 관심도 없었고, 결혼하고 나서도 딱히 성행위를 못 하는 것에 불만을 품지 않았었다.
하지만 작년쯤부터 성욕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갑자기 변한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그걸 참아내기 위해 노력해왔었다.
그나마 성수호를 만나고 나서 꽤 많이 풀렸지만,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처음에 성수호와 부둥켜안고 나서 그날 집에서 자책감에 몸서리를 쳤던 소냐였다.
하지만 다음 날 다시 그를 앞에 서면 그에게 퍼지는 체취가 소냐의 몸을 휘어 감으면서 자괴감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에게 퍼지는 향.
평소에도 간신히 참으며 버텼지만, 그 향을 맡으면 이상하리만큼 가슴에 달린 자물쇠가 강제로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소냐가 할 수 있는 건 그와 거리를 두는 것뿐이었다.
‘이제 루나 학생이랑 잘 지내잖아. 내가 끼어들면 정말 곤란해.’
소냐에게 있어서 성수호와 루나는 둘 다 마음에 들어 하는 제자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을 축복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게 소냐가 정문까지 나오는 동안 성수호를 만나지 못했고, 안도하는 한편 아쉬움이 묻어난 한숨을 쉬었다.
소냐는 헛웃음을 내면서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마법을 배우는 자로서 자긍심을 품고 살아왔던 그녀가 한낱 성욕에 무너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남편과 연애할 때도 언제나 절제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욕구불만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소냐였다.
그런 소냐가 지금은 여유시간마다 한 남자를 떠올린다는 건 지금의 그녀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돌아가자. 이제 잊어야지.’
소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교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교문에는….
“응?”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는 루이스를 볼 수 있었다.
‘하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애네….’
소냐가 처음부터 루이스를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첫인상은 다른 학생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호감적이었다.
예의바르고, 열정적이고….
하지만 갑자기 단독으로 이야기할 때 껴안는 행위를 했던 루이스를 그 이후로 좋게 볼 수 없었다.
거기다 멀리서 세심히 그를 바라보니 행실이 마냥 좋다는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때 일은 이제 없는 일로 마무리했으니까.’
소냐는 그렇게 생각하며 루이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큿… 아, 안녕하세요. 소냐 교수님.”
루이스는 평소와 다르게 덥수룩한 수염과 퀭한 눈을 하고 있었다.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거 같은데, 무슨 일이신가요?’
“그, 그게….”
루이스는 몇 차례 고민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루나가 외박을 나갔다고 해서 좀 불안해서요.”
“외박이라….”
외출도 아닌 외박. 소냐는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성수호 학생도 같이 나갔겠네. 그러니까, 이렇게 불안하지. 그런데… 그럼 본인도 외출증이나 외박증을 끊어서 나가면 되지 않나?’
소냐는 그렇게 의구심을 가지며 물었고,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오늘 담당하시는 교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
루이스는 루나가 걱정된 나머지 외출증을 끊으려고 했고, 허락을 맡기 위해서 조교를 찾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담당자인 조교는 허락했지만, 그의 옆에 있던 교수가 바로 고개를 절레거리며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상하네요. 상점을 받았다면 허락하지 않으실 이유가 없으신데….”
“그, 그게… 저번에 수업 태도가 문제가 된다면서 시험공부나 하라고….”
“아하….”
아무리 상점이 있다고 해도 교수, 그것도 정교수가 안 된다고 한다면 가망이 없었다.
최소한 오늘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소냐는 자기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루나 학생이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엇보다 슈트라의 모든 지역은 학교만큼 치안이 좋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냐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가려는 순간이었다.
“소, 소냐 교수님!”
“네?”
“호, 혹시….”
루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호, 혹시 외출하는 것만이라도 도와주실 수 없으실까요?”
..
..
악연도 인연이라고 소냐는 결국 루이스의 부탁을 들어줬다.
소냐는 거부권을 행사했던 담당 교수에게 찾아가서 루이스의 불안정한 상태를 앞세워서 외출의 허락을 받아줄 수 있었다.
(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이스는 소냐를 향해 연신 감사의 말을 내뱉고는 바로 학교 밖으로 뛰어갔다.
소냐는 저택을 눈앞에 두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소냐가 루이스의 부탁을 들어준 건 그녀 안에 숨어 있던 질투심 때문이었다.
자신과 다르게 모든 것을 가진 루나가 너무 행복한 것에 소냐는 자신도 모르게 행동으로 이행해 버린 것이었다.
‘루이스 학생이 두 사람을 찾아낼 정도로 도시가 작은 것도 아니고, 만약 찾는다고 해도 큰 탈은 없겠지.’
루이스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면 도시 안에서 분란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거기다 루이스는 그 유명한 브란트루프 가문의 장남이었다.
오히려 몸을 사려야 할 처지이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성수호 학생에게 이상한 짓을 하면 내가… 응?’
소냐가 그렇게 저택에 발을 들여놓을 때 정원에 누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 두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성수호와 루나였다.
***
소냐는 와인잔을 슬며시 올리며 우리를 향해 장난기가 담긴 말을 걸어왔다.
“설마 동아리실을 이용 못 하게 했다고 우리 집에 쳐들어오실 줄은 몰랐네요.”
“하하….”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쯤 소냐가 돌아왔고, 그 당시 우리 둘은 한창 정원에서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라면 괜히 불순한 행위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루나와 내가 담이 크다고 해도 교수의 집에서 몰래 그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소냐가 오기 전에 다른 곳으로 향할까 했지만,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그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소냐의 제안으로 칼과 소냐, 그리고 나와 루나가 같이 저택 내부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막상 이렇게 식사하니 걱정이 하나 들기 시작했다.
“그… 소냐 교수님, 저희가 이렇게 같이 식사해도 되나요? 괜히 시험문제 건으로 교수님께 불이익이 가실까 봐 걱정이네요.”
“….”
소냐는 한동안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대답해줬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시험문제는 정교수님들께서 만드시는 거예요. 같이 논의하는 것도 최소한 부교수님 정도는 되어야 하고요. 겸임교수나 조교수는 시험문제와 관련이 없어요.”
“다행이네요.”
나는 그렇게 안도하면서 다시 식사를 시작했고, 소냐는 잠시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되고 우리는 바로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소냐는 우리가 돌아가는 것을 막으면서 자기 집에서 묵기를 권했다.
“이왕이면 여기서 잔 다음에 내일 저랑 같이 학교에 들어가면 좋지 않을까요?”
“갑자기 방문한 상태라 그런 실례까지 저지르면….”
“실례라뇨. 두 사람이라면 오히려 환영이에요.”
결국 칼과 소냐의 제안을 거절 못 한 나와 루나는 저택에서 묵기로 했다.
객실의 경우에는 루나와 내 방을 각자 따로 마련해줬다.
사실 교수의 집에서 묵는데 같이 자는 것도 입장상 편하지는 않았다.
“그럼 내일 보자.”
“네, 주무세요.”
그렇게 루나와 헤어지고, 어느새 밤이 되었다.
나는 저택의 하인에게 받은 파자마를 입은 채 침대에 누워서 기분 좋게 발버둥쳤다.
‘으어어어…. 진짜 편하다.’
아까 입었던 옷은 화려함은 만점이었지만, 화려함이 드러났다는 건 결국 편의성이 꽝이라는 의미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편함이 주렁주렁 매달린 탓에 무게추를 짊어진 것처럼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서히 몸과 마음이 편해지니 딴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안 됩니다.]
‘…뭘요?’
나 아무 말 안 했는데요?
분명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르모니아는 내 생각을 읽는 듯이 한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소냐 프리드리히에게 가시려는 것 아니십니까?]
‘귀신일세….’
아르모니아의 말대로였다.
사실 이왕 이렇게 소냐의 저택에 머물게 된 거 그녀의 방에 몰래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칼은 허락했고, 소냐도… 어느 정도 허락해줄 거 같았고.
다만 루나가 문제지만, 그녀도 타인의 집에서 묵으면서 함부로 집을 돌아다닐 리도 없었다.
나와 다르게 교양이 넘치는 여자이기에 저택에 소리 좀 난다고 몰래 구경할 리가 없을 테니까.
[제가 안 된다고 한 이유는 수호 님을 위해서입니다. 소냐 프리드리히라는 인물은 저도 믿음이 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거 아냐?’
[분명 관계를 돈독하게 맺으면 학교생활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적당히 이용하려고 하다가 발목이 잡히면 안 됩니다.]
‘이용이라니….’
분명 소냐나 나나 당시에 욕구가 쌓인 상태였었고, 거기에 페로몬이라는 기폭제가 터져서 이렇게 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그녀를 이용하겠다는 계산이 들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소냐라는 여자가 외모와 직위가 어우러져서 엄청난 매력을 발산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매력에 빠져들었을 뿐이고….
[최소한 안전장치가 생기기 전까지는 저는 개인적으로 막고 싶습니다.. 임무가 최우선이라는 것을 명심….]
아르모니아가 나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퍼붓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똑.
‘우오~!’
[수호 님….]
‘…알았쓰.’
데자뷔인가?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던 거 같은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방문을 열어서 상대방을 확인했다.
“누구… 응?”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소냐나 칼이 왔을 거라는 내 예상을 박살 내고 문 건너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루나였다.
아까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어 던진 루나는 간편한 파자마 차림과 슬리퍼 차림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