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스는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후우… 드디어 내일부터 시험이군.”
루이스는 눈을 비비면서 자신의 방을 훑어봤다.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치장된 가구들은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주인을 반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주인은 그 가구들에 전혀 눈을 주지 않고, 그저 또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새끼 때문에 내가 왜 이런 처지에 몰린 건지….”
루이스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물며 그 식사조차도 사람이 적은 시간을 골라서 최대한 빨리 먹고 방에 돌아와서 바로 공부에 매진했다.
이유는 심플했다.
한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새끼한테 휘둘려서 내가 손해 볼 필요는 없으니까.”
루이스는 동아리실에 갔다가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나서 밖을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어차피 그 새끼는 분명 어디서 자고 왔던 게 분명해. 쓰레기 같은 새끼… 실력으로 못 이길 거 같으니까 그런 비열한 짓을 해?”
루이스는 성수호가 치졸한 짓을 벌이고 있다고 확신했고, 괜한 도발에 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도서관에도 가지 않았다.
덕분에 컨디션도 다시 정상 회복했고, 시험공부에 충실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슈트라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재는 분명 모든 마법서의 집약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훌륭한 마법서였다.
하지만 집약체라는 건 결국 집약 과정에서 요약이 강제화되고, 루이스의 머리에 없는 요약된 부분은 그에게 불안감을 안겨줬다.
그가 그렇게 원하는 요약된 부분이 적힌 책은 그가 발길을 주고 싶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서관… 가자.”
루이스는 방을 나오면서 식당보다 도서관으로 먼저 발길을 향했다.
“분명 저번 일로 깐죽거릴 게 분명해. 여차하면 무시해야지.”
이미 성수호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루이스는 처음에 성수호를 보고 이용하기 좋다고 생각해서 손을 내밀었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루이스의 입장에서는 손을 내밀어줬다는 행위도 충분히 배려해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배려가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평생 안고 갈 굴욕이었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놈. 구두라도 잘 핥았으면 내 밑에서 평민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루이스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전이라 그런지 도서관에는 돌아다니는 학생의 수가 적었다.
빨리 책을 찾아서 떠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루이스의 머릿속에 전류가 튀더니, 한 사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나….”
루이스는 공부하면서도 계속해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루나 슈트타펠트.
루이스는 루나와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거주지는 기본적으로 브란트루프 가문에서 제공한 저택이었고, 그 저택의 위치는 브란트루프 저택과 멀지 않았다.
루이스는 매일 그녀를 찾아갔고, 집안일로 못 찾아가더라도 사흘을 넘게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희미한 미소로 맞이해주던 루나.
그랬던 그녀가 슈트라에 오고 나서 변했다.
“…잠깐만 만나자.”
루이스는 성수호와 마주쳐서 겪는 치욕보다 루나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렬히 피어올랐다.
그런 그는 도서관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나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직 안 온 건가?”
“어머, 루이스!”
“끙….”
루이스가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저 먼발치에서 여학생들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루이스를 보자마자 감탄하기 시작했다.
“어머!? 루이스, 수염 기르세요?”
“진짜… 멋지다.”
“하하…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 추한 모습을 보였네.”
루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최대한 여학생들에게 미소를 보여줬다.
그렇게 미소를 보여주면서 그녀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혹시 루나 어디 갔는지 알아? 요새 못 만나서 이야기나 나눌까 했는데….”
“아! 아까 봤어요.”
“오! 어디서 봤어?”
루이스는 환한 미소로 물었고, 질문의 답을 듣자마자 루이스의 미소가 깨지듯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까 아침 식사 마치고 그 성수호…? 라는 분이랑 같이 학교 밖에 나갔어요.”
나는 학교 정문을 나오면서 툴툴 거렸다.
“아… 귀찮아. 그냥 정복 입게 해주면 안 되나?”
“규정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내 뒤에서는 사르르 흐르는 튤립의 향 같은 목소리가 고막에 울렸고, 나는 뒤를 돌아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튤립 목소리의 주인은 살랑이는 긴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 거기에 주변을 시선을 휘어잡을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루나를 보면서 말했다.
“…공부하러 가는 사람의 복장이 아닌데?”
“그건 수호 씨가 하실 말씀이 아닌데요?”
사실 나도 루나 못지않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복장은 전에 소냐가 남편에게 소개해줄 때 사준 옷이었다.
사실 좀 더 평범한 외출복을 입고 싶었지만, 간만에 루나와 나오는 건데 평범한 옷으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마 제일 무난한 게 정복인데, 슈트라의 정복은 외부로 입고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과거에 입고 나갔다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그렇게 강제하고 있다고 했다.
즉, 적당한 수준의 의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옷을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입을 옷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어.”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원래 내가 오늘 학교 밖에 나가자고 제안했던 이유는 산책하면서 시험에 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기 위함이었다.
중세판 스터디의 느낌으로 제안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와 루나의 복장만 보면 이미 데이트하러 나오는 꼴이었다.
‘그냥 산책이나 하려고 했는데, 걱정이네.’
이대로 그냥 카페에서 디저트 먹으며 대화 나누다 쫑낸다?
진짜 그렇게 마무리하면 루나의 호감도가 박살 나는 소리를 귀로 직접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식이든 저녁까지 루나가 지루하지 않게 해줘야 했다.
‘뭐, 둘 다 혹시 몰라서 외박증 끊었으니까.’
생각해보면 루나도 루나였다.
나는 분명 산책하자는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오늘 확인해보니 아예 외박증을 끊고 나온 것이었다.
나랑 같이….
‘세상일 모르니까.’
나는 나를 향해 골똘히 바라보는 루나를 보면서 손을 쓱 내밀었다.
“가자.”
“…이럴 때는 좀 격식 있게 해주시면 안 돼요?”
“그럼….”
나는 손을 정중하게 내밀며 점잖은 미소로 루나를 바라봤다.
“루나 슈타트펠트 양, 오늘 저와 하루를 보내주시겠습니까?”
“후… 좋아요.”
루나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턱을 올리고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살포시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경비원들….
“학교 앞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
분위기 박살 내긴….
나와 루나는 빨개진 얼굴을 숙인 뒤 빠르게 자리를 이탈했다.
..
..
슈트라.
지금까지 나는 슈트라라고 하면 그냥 마법 학교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오늘부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마법 학교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 도시가 곧 슈트라였다.
루나는 나와 화려한 도로를 거닐면서 슈트라에 대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다.
“슈트라는 대륙에 있는 유명한 상회나 귀족들도 한 발 걸치려고 발버둥을 칠 정도예요. 더 나아가서 왕족도….”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상회는 지부 하나를 놓으려고 매년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쏟아붓고, 귀족들은 이곳의 자신의 터가 있다는 사실이 명예가 되기 때문에 몰려든다고 한다.
하지만 돈과 외부의 명예는 이곳에 들어오는 데 하등 쓸모가 없었다.
슈트라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인맥이에요.”
“…인맥?”
생뚱맞은 말이었다.
뭔가 대단한 방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인맥이라니….
“인맥이라는 건 슈트라 지부 내에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아뇨. 단 한 사람의 인맥이에요.”
“…?”
“대마법사 루트비히 리펜슈타인, 학장님의 인맥이요.”
내가 뭔 소린지 모르는 표정을 짓자, 루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입을 열었다.
“수호 씨는 정말 마법만 배우러 오신 거였군요. 하지만 대부분 여기 오는 학생들은 달라요.”
루나는 눈에 힘을 주면서 나를 올려다 왔다.
“바로 슈트라 마법 학교에서 얻어내는 졸업장이야말로 학장님과의 첫 번째 인연을 맺는 최고의 수단이기 때문이죠.”
“아….”
루나의 말을 듣고 나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를 완벽하게 평화로 물들게 한 인간.
이 대륙에서 학장은 내가 사는 세계로 치자면 예수님이나 부처님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전설이 아닌 현존한다?
그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모이고, 조직이 되고, 국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슈트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곳에 발을 담그는 건 돈, 명예, 권력 모든 것에 발을 담그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들 슈트라에 입학하려고 기를 쓰는 거예요. 사실 마법을 배우는 건 두 번째죠.”
“그렇구나. 난 몰랐네.”
“수호 씨는….”
“…?”
루나는 한창 말을 흐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짜 그런 욕심 없이 마법만 배우러 오신 거예요?”
“음… 그렇지?”
“…진짜 대단하네요.”
지금 루나의 말을 들어보면 확실히 내가 이상한 케이스일 것이다.
아마 지금 슈트라 마법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중에 진짜 마법 하나만 보고 오는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사실 그건 나도 포함이고….
‘너 꼬시러 왔어! 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왜? 내 목적이 그거잖아. 창피해!?
루나는 나와 돌아다니며 슈트라에 대해서 계속 설명해줬고, 오래간만에 터진 루나의 수다를 들으며 산책을 이어갔다.
그렇게 구경하는 중에 루나의 시선이 어딘가에 꽂히더니 입을 열었다.
“아, 저기가 칼 프리드리히 씨가 운영하는 악기점이네요.”
“오….”
커다란 갈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석조 건물이었다.
높이만 5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인데, 그 건물 전체가 악기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루나는 그런 악기점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번 들어가 볼래요?”
“그래.”
이미 공부는 뒷전이었고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루나와 같이 악기점에 들어갔다.
악기점 내부에서는 직원이 바로 맞이해줬고, 우리는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악기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흐미, 존나 비싸네….’
업체가 유명한 만큼 내부에서 판매하는 악기들도 평범하지 않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애초에 사려고 들어온 게 아니라고 해도 갑자기 커다란 금액을 바라보니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렇게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중후한 외모를 한 중년 한 명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칼 프리드리히, 소냐의 남편이었다.
..
..
정원 테이블에 음식이 올려졌고, 그와 동시에 칼이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괜히 두 분을 방해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설마요. 저희야말로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 루나는 얼떨결에 칼의 저택에 초대되었다.
마침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하는 찰나에 초대받아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택에는 소냐가 없었다.
“소냐는 요새 한창 바쁜 시기인지라 학교에 있습니다.”
“조교수… 정말 되셨으면 좋겠네요.”
“소냐 대신 감사드립니다. 비록 소냐가 없어서 불편하시겠지만, 눈치 보시지 마시고 편히 있어 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 세 명이 어색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작은 어색할지언정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칼은 어지럽던 분위기의 줄기를 한데 모아서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상재와 음악의 재능을 가진 사람다웠다.
“제가 이렇게 슈트라에서 지부를 뿌리내릴 수 있었던 건 모두 소냐 덕분이었습니다.”
“아… 그럼 칼께서는 원래 이곳의 시민이 아니셨군요.”
“그렇습니다. 아마 두 분도 아시겠지만, 이곳의 정착하는 건 저 같은 평범한 인간은 엄두를 내기 힘듭니다.”
칼은 소냐가 없음에도 소냐를 치켜세워주며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설파하듯 이야기해줬다.
그리고 루나는 그의 말에 최대한 호응해주며 그를 치켜세워줬다.
“칼도 대단하시잖아요. 소냐 교수님께서도 결혼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소냐는….”
칼은 머금고 있던 미소를 속으로 삼킨 뒤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저 같은 남편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네?”
“….”
루나는 갑자기 변화된 분위기에 당황했고, 나는 칼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불쌍하네…. 이상한 성벽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저번에 소냐랑 나랑 자는 걸 허락한 거 아냐?’
칼 프리드리히에게 이상한 성벽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정상이었고, 발기부전만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성벽이 없음에도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안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소냐의 행복을 위해서.
[아마 중간에 많은 과정을 겪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희로서는 그저 발기부전과 욕구불만만 보았지만,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이 문제에 대해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아르모니아의 말대로 단편적인 부분만 봐서는 이상한 오해를 할 수 있겠지만, 기질창과 두 사람의 과거를 대충 알게 되니 동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칼은 바로 우리 두 사람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침울함을 풀고 쓰게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그리고 그런 칼을 향해서 루나가 미소를 지으며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사정은 누구나 있는 법이죠. 다만 소냐 교수님께서는 칼을 만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아닙니다. 소냐는 저랑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아뇨.”
루나는 표정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두 분이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소냐 교수님께서 칼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은 확실해요.”
“….”
“사랑의 시작에 후회를 넣지는 말아주세요. 그건 교수님도 슬퍼하실 거예요.”
칼은 루나의 말을 전부 듣고 나서 눈을 감고 한참을 침묵하더니, 입을 열면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저야말로 죄송해요. 두 분의 사정도 모르면서….”
“아뇨. 정말 큰 조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다시 분위기는 환기되었고, 우리는 다시 밝은 분위기에서 식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