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엘의 한숨에 성수아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예리엘 님? 왜 갑자기 한숨을….”
“…좋은 의도로 시작했어도 결국 마지막이 이 꼴이 났으니, 생도들을 볼 면목이 없네.”
생각보다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건 현성들과 현직 교관들이 모두 동행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두 존재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을 것이고, 탑은 한동안 곤욕을 치렀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건 탑의 곤욕과 더불어서 생도에 대한 걱정이었다.
예리엘은 생도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준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내가 나이를 먹었나…. 이제 진짜 물러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
“예리엘 님, 절대 그렇지 않아요. 보세요.”
“….”
그녀는 성수아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생도들이 엉겨 붙는다는 게 귀찮다고 했던 현성부터….
“진짜 대단하셨어요!”
“끌끌… 내가 이래 봬도 정신 바싹 차리면 저런 녀석들은 마법 없이 맨손으로도 잡는다.”
“푸하하!”
“이 쌍놈이 웃어!?”
생도들이 손주 같다고 좋아하던 현성까지….
“그때 어떤 마법 사용하신 건가요?”
“그건 말이지. 마음속에… ‘불이여!’ 하고 생각하면 튀어나온단다.”
“…전혀 이해 못 하겠는데요?”
“다 노력하면 된다. 흐흐흐….”
생도들과 아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그 꽃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공포도, 심지어 작은 불안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예리엘이 담당하고, 구해줬던 생도들이 그녀에게 물밀듯이 다가와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예리엘 님! 감사합니다!”
“예리엘 님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저도 언젠가 예리엘 님처럼 강해질 거예요!”
“….”
예리엘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성수아를 올려다봤고, 성수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어떤가요? 요즘 애들은?”
예리엘은 피식 웃으며 성수아에게 말했다.
“내가 요즘 애들을 너무 얕봤구나. 정말… 대단한 아이들이야.”
두 사람은 같이 미소를 지으며 생도 무리로 들어갔다.
***
철컥….
현관문이 열리면서 자동으로 환하게 불이 들어오며 주인을 맞이해줬다.
하지만 집주인은 오히려 심통 맞은 표정을 지으며 집 안으로 발을 바닥에 쿵쿵 찍으며 들어왔다.
그리고 식탁 위에 새게 놓이는….
탁!
케이크.
초서현은 조금 전에 산 케이크를 식탁 위에 놓고 그대로 의자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나쁜 녀석… 들….’
단수를 지칭하는 ‘녀석’이 아닌 복수를 지칭하는 ‘녀석들’이었다.
초서현은 케이크는 안중에 두지 않고 식탁에 고개를 파묻고는 스마트 워치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생일이었지만, 아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친한 사람도 별로 없었고, 괜히 어설프게 친한 사람들은 문자로 대신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작은 화면에서 눈을 못 떼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남자의 연락, 그리고 또 하나도 남자의 연락.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첫 번째 남자였다.
“이씨…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초서현은 화면에 떠 있는 연락처를 보면서 갈등했다.
<성수호>
탑에 갔던 성수호는 그 후로 따로 연락해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통화버튼을 눌러서 최소한 생일날 대화라도 나눌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자기 생일날 자기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말을 걸기에는 혈관에 흐르는 여자의 자존심이 응어리지면서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아… 그냥 내일 만나자.”
생일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자존심 상했고, 만약 자존심을 굽혀서 전화를 걸어도 그녀와 직접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 이건 이해돼. 그런데….”
한편으로 더 화가 나는 건 남동생, 초강현의 연락이었다.
“하아… 내가 얘한테 뭐 잘못했나?”
분명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실상 오늘 만나기로 약속도 이미 했었다.
그런데 정작 당일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심지어 연락을 해봤지만, 전화는 아예 꺼져 있는 상태이기까지 했다.
아까 성수호에 대해 생각을 할 때는 그래도 자책성이 들어있는 울분이었다면 지금 초강현에 관한 생각은 그저 짜증이었다.
“이제는 그냥 말도 없이 연락 두절이구나….”
성수호처럼 바쁘다면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토요일…. 교관의 일이 바쁜 편에 속한다고 해도 토요일도 바쁜 경우는 드물었다.
“…교단에서 바쁜 일이 있겠지.”
초서현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살며시 감는 순간이었다.
삐리리! 띵동!
“흐핳! 까, 깜짝이야!”
스마트 워치와 인터폰이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영사관에서 지급한 스마트 워치는 기숙사 인터폰과 연동이 되어 있었고, 기숙사 방에 누가 오거나 기숙사 출입문을 지키는 경비에게서 연락이 오면 같이 울리게끔 시스템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혹시 몰라서 스마트 워치를 확인해봤다.
<출입문 경비실>
“응?”
기숙사 방에 누군가가 들른 적도 없지만, 출입문 경비실에서 연락이 오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녀는 허리를 펴는 스마트 워치로 오는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초서현 교관님. 남자 교관님 한 분이 방문하셨습니다. 성함이….)
“아아! 들어오라고 해요.”
초서현은 누군지 묻지 않고 경비원에게 대답한 뒤 연락을 끊고 벌떡 일어났다.
“아씨… 올 거면 연락이나 좀 하고 오지.”
초서현은 확신했다.
“역시 날 챙겨주는 건 가족뿐이구나.”
허탈하게 웃으며 초서현은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교관들의 기숙사는 남녀가 완벽하게 구별이 되어 있었지만, 출입 기록을 잘 작성하고 기숙사 방 주인이 허락한다면 다른 성별의 교관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애초에 교관 기숙사 자체가 초서현의 방처럼 완벽한 개인실을 만들어놔서 기숙사 복도는 어떤 의미에서 그냥 학교의 시설과 다름없었다.
초서현은 흥얼거리며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리 정리해놔서 다행이네.”
화가 났던 것과 별개로 초서현은 자신의 생일을 기억해준 초강현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모든 정리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한가지가 떠올랐다.
“…옷은 그냥 대충 입자.”
아무리 생일이라고 해도 남동생이 온다는데 굳이 옷을 잘 갖춰 입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다리는 순간.
띵동.
스마트 워치와 인터폰이 동시에 울렸다.
초서현은 기대되는 마음에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크게 열면서 환하게 웃었다.
“야! 연락도 없이 이제… 오면… 으쨔…냐….”
“…죄송합니다.”
문 앞에는 성수호가 멀뚱한 표정으로 선물 상자를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버버 거리는 초서현에게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제가 괜히 찾아온 거면 죄송합니다.”
“아, 아뇨! 드, 들어와요!”
초서현은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들어오게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통신으로 꿍얼거렸다.
‘…대우 봐라. 평수만 차이 나는 게 아니라, 아예 모텔이랑 호텔 차이 수준인데?’
처음 방문한 초서현의 방은 내 기준에서 호텔 펜트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달랑 창문 하나 달린 내 방과 다르게 초서현의 방은 외벽이 전부 유리로 되어있었다.
거기다 방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주방이나 거실도 있고, 살짝 작은 펜트하우스 느낌이었다.
초서현의 방을 보니까, 내 방은 무슨 아우슈비츠 독방 같은 느낌이었다.
독가스가 안 나오는 독방?
방에 들어와서 방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게 하나 보였다.
케이크.
나는 조심스럽게 식탁에 있는 케이크 옆에 선물 상자를 놓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선물은 드려야 할 거 같아서….”
“…제 생일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초서현은 꼼지락거리면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정말 궁금한 모양이었다.
예전에 성수아에게 받은 프로필에서 봤다는 이야기를 해봤자 좋을 게 없어서 에둘러 이야기했다.
“입학 당시에 초서현 교관님의 프로필을 본 적이 있어서요.”
“….”
초서현은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슬며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제가 운이 좋긴 좋네요. 당신 같은 보조 교관이랑 만난 걸 보면….”
“하하….”
“아니면… ‘교관님’을 만났다고 하는 게 정확할까요?”
초서현은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올려다보더니 식탁 쪽을 힐끗 바라보며 웅얼 거리듯 입을 열었다.
“케이크… 같이 먹을래요?”
..
..
초서현은 살짝 혀가 꼬인 목소리로 나를 올려다보며 흥얼거렸다.
“언제나 궁금했는데…. 밖에서는 뭐 했어요?”
“하하… 별로 좋은 일은 못 했어요. 먹고 살기 바빴죠.”
“피… 그런 실력이 있으면서 먹고 살기 바빴다고요?”
초서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와인잔을 들어 올려서 와인을 살살 들이켜기 시작했다.
케이크를 먹자고 했던 초서현은 방에 있던 와인과 잔을 꺼내와서 내게 같이 마실 것을 부탁했다.
딱 봐도 한두 푼 할 것 같지 않은 술이었지만, 초서현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대충 코르크 마개를 열어서 내게 따라주고 자신도 따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초서현이 와인을 들이켜는 것을 보고 애주가인가 싶었지만, 바로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초서현은 와인잔에 다섯 번 보라색 음료를 채웠을 뿐인데, 벌써 눈이 풀리고 혀가 꼬인 상태로 내 옆에 달라붙어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이렇게 대접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대접은 무슨….”
초서현은 성수호의 말을 듣고,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헤실헤실 웃었다.
초서현은 다시 앞에 있던 와인을 전부 마시고 나서 잔을 식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나… 생일날 이렇게 다른 사람이랑 즐겁게 이야기하는 거 진짜 오랜만이에요.”
“….”
“알잖아요. 나 성격 거지 같은 거….”
“아뇨. 그렇게 생각은….”
“씁! 조용!”
초서현은 취기가 올랐는지 자기 말을 막는 내 입술에 검지로 붙이며 합죽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합죽이가 되어서 조용해지자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내 성격 알아요…. 그런데… 나도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에요.”
초서현은 침묵하더니 갈등이 담긴 표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자신의 과거를 말해야 하나 하는 갈등이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예전에는 송아라 녀석처럼 긍정적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흐윽….”
“….”
초서현은 고개를 숙이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초서현을 품에 안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굳이 지금 바로 이야기하실 필요는 없어요. 나중에 괜찮아지면 말씀해주세요.”
“히윽….”
“저는 계속 초서현 교관님 편이니까요.”
“아아… 아아….”
취기가 그녀의 응어리졌던 마음을 바늘로 물풍선을 터트리듯 콕 찔러서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 품에 안긴 초서현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초서현은 껴안은 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품에 안겨 있던 초서현이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누가 이 여자를 강단 있고, 성숙한 서른 살의 여자라고 생각할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초서현은 상처받고, 길에 버려진 가냘픈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직 초서현과의 관계는 헷갈리는 부분이 많았다.
분명 평범한 동료를 넘어선 관계였지만, 아직 양발이 전부 넘어간 건 아니었다.
이때가 제일 힘든 순간이다.
그걸 넘어가는 건 두 사람의 암묵적인 합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하니까.
그리고 그 암묵적인 동의는….
“….”
초서현의 감긴 눈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입술에 다가가면서 그 동의를 받아들였다.
쪽….
지금까지 만나왔던 여자들과 다르게 나는 초서현의 입술에 살며시 갖다 대고는 입술 바깥으로 열기를 받아들였다.
침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키스는 초서현의 촉촉한 입술의 감촉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흐읏! 흐응….”
나는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그녀의 다리를 벌려서 내 허벅지 위에 앉혔다.
초서현은 청바지를 입고 있는 다리를 벌린 상태로 내 허벅지 위에 앉자마자 잠시 움찔했지만, 다시 눈을 감고 내 목덜미를 끌어안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도 나는 멈추지 않고 그녀의 빨간 입술을 맛봤다.
혀를 이용하지 않고 그녀의 촉촉한 입술만을 음미하며 최대한 그녀의 흥분을 끌어올렸다.
다리를 벌리고 내 무릎에 앉아있던 초서현은 더욱더 강하게 끌어안았고, 나는 그 상태로 그녀의 머릿결을 역으로 쓰다듬으며 점차 고조시켰다.
“흐응… 흐으읏… 헤읏….”
점점 흥분이 올라온 초서현은 본능적으로 혀를 점차 내밀기 시작했다.
내 입술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는 초서현의 혀를 나는 점차 받아들였다.
입술과 입술이 열리고, 서로의 중요한 신체 부위를 넘겨주며 체액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는 그녀의 몸에 전혀 손대지 않았다.
뭐랄까… 초서현은 나이와 다르게 성적인 부분은 소녀 감성이 많이 남은 느낌이라 천천히 가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초서현은 키스하면 할수록 내 목덜미를 세게 끌어안으며 더욱더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츄읍, 츄르릅, 츄으읍….”
그렇게 한창 키스를 하고 있을 때, 초서현이 갑자기 흠칫 놀라기 시작했다.
“흐읏…. 밑에….”
초서현은 열정적으로 퍼붓던 키스를 멈추고 홍조를 띤 상태로 고개를 숙여서 내 하복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