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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걸어가면서 새로 받은 스마트 워치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역시 새삥이 좋네.’
나는 실실 웃으며 아르모니아에게 마저 설명을 들었다.
[예리엘. 만약 제가 받은 정보와 일치하는 인물이라면 그녀가 탑의 수장입니다.]
‘생긴 건 영락없이 한국인이었는데. 이름이 웬 예리엘….’
교장이 바로 반응하면서 존대를 붙인 것을 보면 아르모니아가 말해준 인물과 동일 인물일 것이다.
기질을 봤으면 좋았을 거 같지만, 어차피 탑의 수장이면 다시는 나랑 마주할 일도 없을 테니 신경 끄기로 했다.
나는 그대로 바로 기숙사로 직행해서 침대로 다이빙했다.
‘크허… 살 거 같다. 해외 여행 갔다가 집에 돌아온 기분이야.’
[…? 여행을 다니셨습니까? 집 안에 있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 일본에 한정판 NTL 게임….’
[알겠습니다.]
‘….’
나쁜 가스나… 어떤 게임인지 말해주려고 했는데.
나는 베개에 누워서 천장을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흐… 힘들다.’
어제 하루 동안 박희연과 오진호를 엿 먹이고, 그 후에 윤지아와 잠자리를 가지고, 그리고 오늘 아침에 또 격렬히 살을 섞었고….
하급 던전을 순회한 것보다 어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 훨씬 지치고 고된 나머지 몸에 에너지가 다 빠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냥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점심은 먹어야겠지?’
딱히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내일부터 또 견학을 가게 된다면 성수아와 초서현을 만날 기회가 없어질 거 같았다.
‘일단 다른 건 몰라도 두 사람이랑 대화는 주고받아야겠지.’
아무리 호감이 있는 상대라고 해도 종속이 걸린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을 만나는 것에 절대 귀찮음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야 두 사람에게 종속을 걸어도 홀대하는 일은 없겠지만….
무엇보다 이번 주가 지나면 대망의 슈트라로 향하게 된다.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고 일어나서 평소처럼 나를 보겠지만, 나는 몇 주 동안 못 볼 가능성이 있는 만큼 당장 최대한 많이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식당으로 향했고, 바로 식당 문 앞에서 서 있는 성수아를 볼 수 있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에 단정한 캐쥬얼 정장, 그리고 다소곳하게 서서 미소를 짓는 모습에 그녀를 지나치는 사람은 남녀노소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려고 하자 먼저 선수를 쳐서 성수아 쪽에서 인사를 건네왔다.
“잘 갔다 오셨어요?”
“네. 혹시 누구 기다리시나요?”
내가 오는 동안에도 성수아는 식당 문 앞에서 서서 누구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애써 기다렸는데.”
“아… 죄송합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는 바쁜 일정이라 기본적으로 못 만난다는 느낌이 있어서 당연히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성수아와 같이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성수호 교관님. 혹시 오늘 시간 되세요?”
“어… 이따 저녁에 불려갈지도 모른다고 대기하라고는 들었고, 그전까지는 시간 돼요.”
뭐… 동물의 마을을 하자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성수아의 이야기는 전혀 내 예상과 다른 이야기였다.
“혹시 저번에 말씀드린 서지은 생도에 대해서 기억하세요?”
“아… 그 한번 찾아가자고 했던 거요?”
몸이 문제인지 정신이 문제인지 모르지만, 마법을 제대로 사용 못 하는 생도.
그 생도의 집에 한 번 방문하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견학 때문에 내가 시간을 낼 상황이 아니었었다.
“네. 미정이지만 내일 견학을 갈지도 모르고, 아까 탑에서 오신 분께서 오늘 가서 설득을 부탁한다고 요청하셔서요.”
“아… 저도 가고는 싶은데. 교장님께서 대기하라고 하셔서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성수아는 눈매를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직접 말씀드려볼게요.”
..
..
나는 성수아의 차를 타고는 서지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수아는 식사를 마치고 바로 교장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나와 함께 영사관을 나왔다.
처음에는 성수아가 교관의 직책을 내세워서 무작정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식으로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오해를 풀 수 있었다.
“탑이 정말 서지은 생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나 보네요.”
“네. 마과 생도들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아이는 입학할 당시부터 탑뿐만 아니라 교단에서도 눈독을 들였을 정도였으니까요.”
“허….”
지금 우등생이라고 불리는 송아라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교단에 견학한 시점에서 송아라도 나름대로 대우를 받는 것이지만, 견학 내내 교단에서 그녀에게 대하는 태도는 일반 생도와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전에 서지은에 대해서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우등생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들어보니, 평가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챙겨온 서지은의 프로필을 꺼내서 사진을 유심히 바라봤다.
‘일단 프로필 좀 더 읽어봐야겠다.’
[어차피 저희 쪽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보는 척은 해야지.’
여자 차에 얻어 타는 것도 심란한데, 아무것도 안 하고 뻘쭘하게 있는 건 더욱 싫었다.
그렇게 첫 장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
..
끼이이익!
갑자기 귓속으로 들어오는 철창 소리에 놀라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흐어?”
“후후, 일어나셨어요?”
“어… 여긴…?”
나는 퀴퀴한 눈을 최대한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안락한 자동차, 싱그럽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수아, 정면 유리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철문, 그리고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서지은의 프로필.
‘…잤구만.’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잔 거야?’
[프로필의 이름을 보는 것과 동시에 주무셨습니다. 대략 한 시간가량 주무셨습니다.]
‘….’
어쩐지 개운하더라.
나는 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눈을 비비며 성수아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럴 때 잠이나 자고….”
“오히려 제가 죄송해요. 이번 주 내내 고생하셨는데, 저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설마요. 성수아 교관님이랑 있는 게 쉬는 거죠.”
“어머….”
나는 잠결에 말한 것처럼 횡설수설했다.
“죄송합니다. 이상한 소리나 하고….”
“에이… 괜찮아요.”
성수아가 평소와 다르게 실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역시 잠결에 헛소리하는 게 이럴 때는 효과가 좋다니까.’
[….]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커다란 문이 열렸고, 나는 처음으로 부잣집 따님께서 살고 계신 대저택에 입성하게 되었다.
‘으리으리하다.’
규모만 따지면 영사관이나 교단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거긴 어디까지나 단체 시설이라면 여기는 개인을 위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철문이 열리고 차를 타고 십 분가량을 더 이동하고 나서야 저택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엄청나네요.”
“저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똑같은 반응이었어요.”
영웅이 아무리 돈을 잘 벌고, 사회적인 위상이 높다고 하지만 이건 수준이 달랐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차이 수준.
나는 성수아와 차에서 내린 뒤 정문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면 그냥 먹고살 만해서 꾀병 부리는 거 아닐까?’
[그래도 그 정도로 잘 나갔으면 굳이 그런 식으로 꾀병을 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사관 졸업을 내가 살던 곳으로 치자면 초일류 대학을 졸업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졸업증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다.
이런 집안에 사는 아이라면 부와 권력보다 명예에 목을 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거기다 서지은의 실력만 놓고 보면 영사관 수석 졸업도 문제가 없어 보였으니까.
일단 전에 학교에 나오려는 의지를 보인 것을 보면 꾀병은 아닌 듯싶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저택이 점점 가까워졌고, 급기야 한눈에 전부 들어올 수 없는 수준까지 가까워지자 정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으리으리한 저택 정문에는 키가 180 정도 되어 보이는 훤칠한 외모의 남자가 집사 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서 있었다.
나이는 대략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중년이었다.
나는 그놈을 보자마자 바로 속으로 외쳤다.
‘온 우주에 있는 잘생긴 놈들을 빨리 다 죽이는 날이 오길….’
[….]
내가 그렇게 속으로 분노를 표출하자,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목소리가 통신으로 들려왔다.
[주인님. 그건 너무 부당한 처사입니다.]
‘레나?’
[네, 저입니다. 미형을 지닌 존재는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젠장… 레나가 얼굴 파였다니.
레나의 말에 나는 상처를 입고 그 상처 사이로 공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잘생긴 놈들 죽여라.-
하지만 통신으로 들려온 레나의 목소리에 내 상처를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저는 주인님만큼 미형의 외모를 지닌 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주인님의 목숨을 소중히 했으면 합니다.]
‘…레나가 그렇게 말한다면 참아야지.’
내가 나를 죽일 수는 없는 법.
나는 유명한 성인들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살과 살인을 동시에 저지르는 만행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성자의 가르침을 몸소 받들고 있을 때, 아르모니아가 신경에 거슬린다는 듯이 이야기의 맥을 끊었다.
[두 분의 말씀이 저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일단 지금 상황에 집중해주시길 바랍니다.]
‘흥!’
그래, 잘생긴 사람이 이해해줘야지.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끼며 성수아와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우리가 바로 앞에 다가오고 나서야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성수아 교관님.”
“안녕하세요, 세형 씨.”
두 사람이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통신으로 말했다.
‘기쥘~’
[알겠습니다.]
내 버터 발음에 전혀 불만을 비추지 않고 아르모니아는 내 눈앞에 기질을 띄워줬다.
‘흠… 흠… 흠….’
나는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기질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통신으로 한마디 했다.
‘뭐 하는 새끼지?’
선하다. 얼굴은 그야말로 선한 자의 표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중후한 멋이 담겨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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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기철호
-기질-
[이기심], [사기꾼], [교활함], [완벽주의자], [냉정함],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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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 있는 기질을 보면 악마조차 튀겨서 뜯어 먹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괴랄한 녀석이었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인식하고 남자가 성수아에게 질문을 했다.
“여기 이분은?”
“아! 저와 같이 서지은 생도를 담당하고 있는 성수호 교관님이세요.”
“아하….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세형이라고 합니다.”
이야… 이름도 다르네?
고충신 같은 녀석을 바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다만 주의해야 하는 건 이 인간이 고충신 같은 분류인 건지, 아니면 이 집안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 보니 저렇게 이름을 숨기는 건지는 지켜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서지은 생도의 보조 교관을 맡고 있는 성수호입니다.”
..
..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아가씨를 모셔오겠습니다.”
이세형… 아니, 기철호는 기품있게 고개를 숙인 다음 응접실을 떠났다.
그가 나가고 나서 응접실을 둘러봤다.
집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응접실만 해도 내 방보다 10배는 더 넓었다.
거기다 내부에 장식이나 가구들이 전부 생채기 하나 내는 순간 내 월급을 갖다 바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그런 응접실에 나와 성수아만이 앉아서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성수아는 나를 보며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교단에서 잘 지내셨나요? 그쪽 시설은 좋은 걸로 정평이 나 있는데.”
“네, 확실히 힘들긴 했지만, 교단이 좋긴 좋더라고요.”
“…그래요. 그렇게 좋아서 연락 한번 없으셨군요.”
“아… 그게….”
성수아가 미끼를 던지고, 나는 그걸 물어버렸다.
하지만 성수아는 잠깐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리더니 바로 표정을 풀면서 바늘을 빼내 줬다.
“장난이에요. 그래도 연락 한 번은 올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었네요.”
“…정말 경황이 없던 거 맞죠?”
“…?”
뭐지? 좀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바늘을 풀어주더니 다시 미끼를 던지는 건가 싶었는데, 성수아는 냉기가 서린 표정으로 변하면서 입을 열었다.
“박희연 선배랑 꽤 친해 보이던데….”
“아! 마지막 날에 좀 힘든 일이 있어서 친해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같이 차를 타나요?”
성수아는 의심의 꼬리를 놓지 않고 계속 떡밥이 뭉쳐져 있는 바늘을 하염없이 던져댔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해줬다.
“그날 있었던 일이 외부에 알려질까 봐 걱정돼서 같이 타고 가자고 했습니다.”
“….”
다행히 이 이상은 뭔가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와 성수아는 독특하지만, 동료 사이일 뿐이다.
어설프게 가까워지는 바람에 오히려 장벽이 생겨버린 그런 관계.
그렇게 적막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할 때, 마침 응접실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지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메이드 복장을 한 여자들과 아까 봤던 집사 복장의 남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지은이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검은색의 화려한 원피스, 검은 눈, 무표정.
다루는 능력이 그림자라고, 본인도 그 컨셉에 맞게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를 흉흉히 풍겨댔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하얀 피부를 과시하듯 화려한 외모를 주위에 발산하고 있었다.
메이드들은 일사불란하게 우리가 앉아 있는 식탁 위에 다과를 놓고, 바로 거리를 두고 우두커니 서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사.
“안녕하세요. 교관님.”
“잘 지냈니?”
성수아는 아까 지었던 표정을 숨기로 바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서 서지은을 반겼다.
그리고 서지은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만 까딱해왔다.
‘…전에 몰래 뒤에서 봤던 거 아직도 꿍해 있는 건가?’
[좋은 기억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보다 수호 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없으니 더욱 낯을 가리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요새 애들은… 어른 공경을….’
속으로 꼰대의 기질을 발산하고 있는 동안 서지은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교관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이번 견학에 관해서 할 말이 있어서 왔단다.”
“….”
성수아의 말은 간단했다.
영사관 수업에 못 오는 건 이해하지만, 견학에는 참여해 달라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