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일단 성수아와 초서현을 내 방에 안내한 뒤에 식탁에 앉아서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며칠 동안 같이 다니다 보니 친분이 생겨서….”
“….”
“….”
초서현과 성수아는 내 말을 들으면서도 가늘게 뜬 눈을 도통 원상 복귀시키지 않았다.
거참… 남자가 여자랑 하하 호호 웃고 떠들 수도 있지….
[만약 민하연과 한봄이 다른 남자와….]
‘악귀야, 물러가라!’
[….]
악귀모니아, 감히 내 정신에 이상한 것을 주입하려고 하다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상황만 악화할 것 같아서 일단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두 사람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두 분은 어쩐 일로 이곳에?”
일단 내 질문에 성수아는 표정을 풀고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아까 수업 끝나고 문제 생겼다는 이야기 듣고 온 거예요. 몸은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생도들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저희가 상태 확인하고 방으로 보냈어요.”
“다행이네요.”
일단 교단에서도 입장이 있으니, 영사관에 사건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교단 입장에서도 생도들의 입을 막으려면 무작정 숨기는 것보다 영사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 바람에 두 사람은 걱정된 나머지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왜 연락을 안 받았어요?”
“스마트 워치가 망가졌습니다.”
“아….”
일단 박희연과 던전을 빠져나가는 동안 최대한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에 일부러 스마트 워치를 박살 냈었다.
그 방법은 괴수에게 던진 다음에 알아서 씹어먹게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살짝 걱정이 들긴 했다.
제품 내구성이 굉장해서 괴수가 몇 번을 씹어 먹고 나서야 간신히 제품이 박살이 났을 정도였으니까.
‘그거 생각보다 딴딴하더라. 나중에 기물 파손 같은 걸로 징계 먹는 거 아냐?’
[부주의가 아닌 사고였기에 그렇게 큰 문제로 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두 사람이 온 이유는 하나였다.
“두 분 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뭐….”
“정말 다행이에요.”
초서현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딴 곳을 바라봤고, 성수아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벌써 밤이네.”
초서현도 창밖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나는 두 사람을 주차장까지 배웅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힘들게 여기까지 오셨는데….”
“힘들긴요. 바람도 쐴 겸 온 거죠.”
성수아는 웃으면서 운전석에 탔고, 초서현은 성수아가 차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내게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이렇게 외부에 나올 때는….”
“…?”
“…심심하면 연락해요. 말 상대 해줄 테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나는 초서현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초서현도 여자의 자존심은 있어서 전화해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초서현이 조수석에 타고 나서 성수아가 창을 열고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내일 마무리니까, 조심히 오세요.”
“내일 봐요.”
“네, 알겠습니다. 두 분,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나는 웃으면서 두 사람이 탄 차량이 주차장을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와… 씨… 식겁했네.’
[다행입니다. 박희연이 사전에 대처하지 않았다면 정말 곤란할 뻔했습니다.]
박희연은 펠라를 하던 도중에 멈추기 싫다는 핑계로 운전기사에게 삼십 분간 더 시간을 끌어달라고 요청했었다.
시간을 늘린 이유는 순전히 펠라 때문만이 아니었다.
펠라 자체는 금방 끝났다.
그녀는 펠라를 마치자마자 차량 내부에 향수를 뿌리고 몸 상태를 깔끔하게 추스르기 시작했다.
만약 박희연이 운전기사에게 부탁하지 않고 그대로 주차장에 왔다면?
초서현과 성수아는 엉망진창이 된 나와 박희연을 마주했을 것이고, 차 안에서 풍겨 나오는 남녀의 체취가 여과 없이 두 여자의 오감을 자극했을 것이다.
분명 제대로 된 지옥도를 맛봤을 것이다.
‘박희연 분명 몇 번 해본 경험이 있어 보이더라.’
만나본 남자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런 남자들과 이런 행동은 많이 해온 게 티가 났었다.
하지만 그녀의 경험 덕분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순탄하게 넘길 수 있었다.
‘일단… 두 사람은 문제가 없어진 거 같고… 자야 하나?’
교단 측에서는 내일 영사관에 돌아가기 전에 이런저런 사정을 묻겠다고 했다.
아마 박희연과 윤지아가 먼저 가서 모든 사정을 설명하고 거기에 맞춰서 대응하려는 수작인 듯싶었다.
‘내가 한 거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무엇보다 레나 씨와 베아트리체 씨는 워프로 이동했으니 들킬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교단 측에서는 내일부터, 우리가 들어갔던 던전 내부를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신들에게 피해를 준 존재를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 줄 녀석들이 아닌 거 같으니까….
하지만 백날 뒤져봐도 그 녀석들이 괴한을 찾아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상황이 빈틈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면서도 불만도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초저녁인데, 자야 하나? VR 헤드기어라도 있으면 접속이라도 해보겠는데…. 응?’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방으로 향하고 있을 때, 마침 윤지아가 어깨를 축 늘이고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바로 윤지아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성수호 교관님. 그게….”
***
윤지아는 교단에 복귀하자마자 바로 조사팀과 법무팀에 연이어 불려갔다.
그녀는 당시에 습격한 괴한과 마주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다행히 긴 조사 없이 금방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불려간 진짜 이유는 혹시라도 외부에 정보가 새어 나갔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외부에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아라, 혹시라도 물어보면 관계없다고 이야기해라 등등….
그리고 그런 압박은 짧은 시간만으로 윤지아의 기를 쭉 빼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아… 영사관이 편하긴 편했구나.”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더 귀찮은 존재가 연락을 걸어왔다.
윤지아는 스마트 워치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지금 피곤한데….”
윤지아는 고민했다.
스마트 워치로 오는 연락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을 여러 차례 하다가 결국 수신 버튼을 눌러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지아야! 괜찮아? 문제 있었다며?)
“응… 괜찮아.”
윤지아는 고충신에게 던전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결하게 설명해줬다.
그렇게 모든 설명을 들은 고충신은 아쉬워하는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아오… 관리자 그 새끼 거기서 죽었으면 딱인데.)
“….”
윤지아도 그동안 고충신에게 성수호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대부분 이야기의 핵심은 성수호라는 인물이 인간쓰레기와 같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성수호와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성수호를 평가한 고충신의 신뢰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윤지아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오빠가 불성실하니까, 혼난 거겠지. 그리고 오빠가 화나서 성수호 교관님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거고….’
윤지아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었다.
그중에는 본인이 실수해서 손해를 끼쳐놓고, 그 실수를 질책받으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상대를 깔보는 사람도 수두룩하다는 사실이었다.
‘오빠가 게임하는 거 보면 일할 때도 비슷한 거 같고….’
윤지아는 고충신이 보여주는 게임 스타일을 보고 언제나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보고 있자니 그렇게 좋은 기분이 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게임 생각을 하니, 다시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아… 빨리 끊고 싶어.’
윤지아는 고충신의 말을 흘려들으며 통신으로 말했다.
“오빠… 나 지금 피곤한데, 좀 쉬면 안 될까?”
(…너 요새 이상하다?)
“뭐가?”
(너 설마 아직도 그때 일로 삐져서 그러는 거 아니지? 고작 그런 걸로….)
“끊을게.”
윤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바로 스마트 워치의 통신을 종료했다.
그리고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거!? 몸 대 달라고 말하는 게 고작 그런 거라고?’
윤지아는 고충신의 말에 이성을 상실하고 꿈에서 있었던 일을 현실과 잠시 혼동하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온 나머지 진짜 고충신과 매칭이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방으로 향하는 내내 고충신에게 걸려 오는 통화를 거절을 눌렀다.
“하아… 그만 좀… 어? 서, 성수호 교관님이….”
윤지아는 저 멀리 성수호가 보이자 당황해서 고충신에게 걸려 온 통화를 수신 차단을 눌러버렸다.
“아! 하아… 어차피 지금 통화할 상황도 아니니까. 나중에 차단 풀고 사과하자….”
윤지아는 서서히 다가오는 성수호를 보면서 최대한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윤지아의 미소와 무색하게 성수호는 그녀에게 다가와서 바로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성수호 교관님. 그게….”
윤지아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입을 열지 못하는 그녀는 성수호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오빠는 맨날 자기 기분만 생각하는데, 성수호 교관님은 매번 다른 사람 챙겨주기 바쁘네….’
성수호는 던전 안에서 위험한 상황임에도 생도와 자신, 더 나아가서 위험에 처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박희연이 끌고 가고, 영사관에 있던 동료들이 찾으러 오기까지 했었다.
‘…아까 박희연 씨랑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윤지아는 본능적으로 성수호가 자신에게도 개인적인 시간을 내줬으면 하는 욕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윤지아가 그렇게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때, 성수호는 쓰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걸 물어봤나 보네요. 그럼….”
“자, 잠시만요!”
“네?”
윤지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분이랑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런데 견학이 끝나면 못 만날 수도 있잖아?’
윤지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면에 피어오르는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오, 오늘 마지막이니까. 가볍게 차나 마시면서 마무리하면 어떨까요?”
“들어오세요.”
“네, 그럼….”
성수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윤지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윤지아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성수호를 보면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오묘한 감정들을 만끽할 수 있었다.
‘후우… 오빠 이외에 남자랑 이렇게 이야기한 적도 없었는데….’
윤지아는 수동적인 인물로, 누군가가 다가와서 이야기를 걸어야지 대화를 받아주는 스타일이었다.
나름 빼어난 외모로 남자들의 시선을 곧잘 받았던 그녀였지만, 결국 남자친구가 있다는 의식을 하면서 다른 남자들과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자기 의지로 남자를 방 안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하물며 고충신조차도 윤지아의 집에 처음 들어가게 된 건 사귀고 나서 꽤 지난 후에 일이었었다.
그런 윤지아가 일단 속에 있는 마음을 성수호에게 찌르고 본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까, 어디를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었다.
‘지금 교단 소속으로 온 것도 아니고, 성수호 교관님 방에 들어가는 건 더 이상하고….’
외부 정원 같은 곳에서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해도 됐지만, 그건 윤지아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었다.
윤지아는 다른 사람들이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기에 정해진 장소가 자신의 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저기 테이블에 앉으세요.”
“네.”
윤지아는 성수호를 테이블에 앉히고, 주방 쪽에 있는 식기들을 둘러보면서 물어봤다.
“성수호 교관님은 어떤 거 좋아하시나요?”
“아… 저는 시원한 거면 어는 거든 좋아합니다.”
“아하….”
윤지아는 무난한 선택지인 커피를 타기 위해서 커피 가루 보관함을 열어봤다.
“…어?”
하지만 보관함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반짝반짝 빛을 반사할 뿐이었다.
당황한 윤지아의 뒤에서 성수호가 물어왔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아니에요. 잠시만요….”
그 후 윤지아는 커피, 티가 들어 있는 보관함을 전부 열어서 확인했다.
‘하, 하나도 없네.’
이곳에 와서 대부분 식사는 교단에서 제공하는 식당에서 하고 있었다.
주방이 있는 건 어디까지나 교단에 오는 손님을 위한 객실인 만큼 내부에서 모임을 편하게 갖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내부에 있는 비품들은 대부분 장기간 쓰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 모두 채워놓지 않은 것이었다.
‘아! 냉장고에 음료수가 있었지.’
윤지아는 이곳에 와서 몇 번 마셨던 음료를 떠올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다 마셨네.’
냉장고에 남아 있는 건 윤지아가 전혀 손대지 않았던 알코올음료뿐이었다.
지금 당장 요청한다면 교단 측에서는 바로 원하는 비품을 제공해 줄 것이었다.
그게 윤지아라면 바로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회과 졸업에 정식 영웅으로 교단에 있는 인물이 달라고 하는데, 안 줄 리가 없었다.
문제는 이렇게 성수호를 초대해놓고 그를 뻘쭘하게 기다리게 만들어야 하는 사실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윤지아는 냉장고 안에 있는 캔에 들어 있는 술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까, 이런 걸 드리는 건 실례 같은데….’
술에도 급이 있었다.
사람을 초대해놓고 캔 음료를 대접하는 게 마냥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었다.
‘하아… 연락해서 부탁을 해야 하나…. 응?’
그렇게 고민하는 찰나에 장식장에 있는 술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술에 관심이 없던 윤지아도 급한 상황이다 보니 장식장에 있는 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고급스러운 유리병에 들어 있는 주황색 액체.
분명 분위기상 대접하기에는 무게감이 있는 존재였지만, 윤지아는 무한히 흐를 것 같은 침묵을 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윤지아는 장식장으로 다가가서 위스키와 잔을 테이블로 가지고 가서 조심스럽게 놓으며 성수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호, 혹시… 술은 괜찮으세요?”
“아… 그럼요.”
“휴우….”
윤지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평생 마셔보지 않은 위스키의 뚜껑을 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