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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녁을 먹고 경비과 관리실에 와서 혼자 중얼거렸다.
‘당근으로 뭐가 좋을까?’
[…?]
갑자기 생뚱맞은 말에 아르모니아는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문을 표하면서 물어왔다.
[갑자기 당근은 왜 찾으십니까?]
‘아, 그게 아니라 고충신 말이야. 채찍은 대충 느낌이 왔는데, 당근은 뭐로 해야 할지 고민이라서….’
당근과 채찍.
이 두 개는 꼭 필요하다.
아까 말했던 요리를 하려면 일단 요리 재료가 얌전해야 한다.
닭고기가 먹고 싶으면 일단 닭을 키워야 한다.
잡아서 먹고, 다시 키우고, 잡아서 먹고, 다시 키우고….
거기다 꾸준히 양식을 하려면 평범한 당근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칭찬 한두 마디로 기분이 풀어질 녀석이 아니다.
그런데 또 억지로 칭찬을 만들면 역효과를 남길 우려도 있었다.
자기 혼자 우월감에 젖어서 착각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고, 확인하기 위해 고충신의 기질을 확인했다.
-[게임중독], [우월의식], [승부 집착]-
딱 봐도 게임과 연관된 기질들이었다.
‘게임 좋아하긴 하는 거 같은데….’
무슨 게임을 하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지만,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이틀 연속 귀찮게 굴었고, 오늘은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뭐, 언젠가 알아내는 날이 오겠지.’
제 입으로 술술 불어주면 고맙겠지만, 몰래 잠입한 녀석이 그렇게 쉽게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친분이 바닥을 치는 상태에서 알려줄 리가 없지.
‘뭐, 몰래 뒤에서 훔쳐보다 보면 정보를 캐내는 날이 오겠지. 일단….’
일단 오늘은 무슨 날이다?
‘칼퇴날이다!’
[….]
***
“오늘도 안 오시네….”
세인트블루, 윤지아는 워오레에 접속한 상태로 한없이 친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창에는 단 두 개의 아이디만 존재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아이디 전부 회색 글씨를 보여주며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에 비치는 건 다름 아닌, 강탈자.
남자친구인 고충신은 애초에 현재 접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설마 지루해진 건가? 어떡하지….”
윤지아는 아까 퇴근하고 나서 고충신에게 받은 전화를 떠올렸다.
(지아야. 강탈자, 그 새끼 아직 잘 붙잡고 있지?)
(어… 응. 계속 같이하고 있어.)
(휴… 미안, 좀 만 더 붙잡고 있어 줘. 귀찮은 건 알지만, 니가 여자라는 거 어필만 계속하면 그 자식 분명 계속 너한테 붙어 다닐 거야.)
(응 알았어.)
윤지아는 얼떨결에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고충신은 최근 영사관에 오고 나서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능력을 알고, 그의 사정을 알고 있는 윤지아는 그를 배려해주고 싶었다.
고충신이 언제나 같이하자고 졸랐고, 그녀는 최대한 남자친구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게임을 플레이했었다.
고충신은 윤지아와 할 때면 언제나 부캐를 가지고 와서 못하는 사람들을 학살했고, 그걸 뽐내면서 그녀의 앞에서 으스대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윤지아도 거기에 장단을 맞춰줬고….
문제는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요새 재미있었는데….”
윤지아는 처음에 고충신의 부추김으로 강탈자와 친구를 맺고 게임을 했었다.
분명 고충신보다 잘하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는 무작정 약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게 아닌,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열심히 게임을 플레이했었다.
그리고 윤지아도 그 옆에서 덩달아 의사소통을 하면서 집중할 수 있었다.
그와 게임을 하면서 좋았던 게 바로 소통이었다.
고충신은 혼자 여러 명을 죽이고 나서 으스대는 걸 뽐내는 느낌이었지만, 강탈자는 같이 게임을 하면서 즐기는 모습을 상기시키며 교감을 형성해왔었다.
분명 둘 다 게임을 잘했지만(비록 두 사람의 격차는 컸지만), 게임을 즐겁다고 느낀 건 강탈자와 같이했을 때가 처음이었다.
비싸다는 VR 헤드기어를 사고 나서 처음으로 보람을 느끼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하아… 역시 나랑 하는 건 재미 없었나? 그냥 잘까….”
윤지아는 풀이 죽은 상태로 친구창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어!?”
강탈자의 아이디가 칙칙한 회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하면서 빛나기 시작했다.
..
..
윤지아는 강탈자의 설명을 듣고 바로 안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바쁘셨군요.”
“네, 기다리신 줄 알았으면 잠깐이라도 들어와서 말씀이라도 드릴 걸 그랬네요.”
“에이, 오히려 매일 기다린 제가 이상한 거죠.”
강탈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라도 제가 9시 이후에도 접속하지 않으면 못 들어온다고 아시면 될 거 같아요.”
“아하… 네~”
윤지아는 속으로 안심하면서 웃었다.
‘휴… 나랑 하는 게 재미없는 건 아니구나.’
그 후 강탈자와 즐겁게 게임하고 나서 편하게 자러 갈 수 있었다.
***
“하아… 하응….”
“….”
내 자지를 만지며 자위하는 성수아를 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쳤다.
‘넣어! 내 바지에 손을 넣으라고!!’
[….]
‘꼿꼿하게 세워져 있잖아! 왜 손으로 만지지 않는 거냐고!’
…그러나 그녀가 내 바지에 손을 넣는 일은 없었다.
자위와의 사투에 모든 힘을 쏟아낸 성수아는 이어지는 절정에 모든 체력을 소진하고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젠장.’
나도 싸고 싶다고….
그렇게 성수아가 19금을 잠그고 다시 잠들었을 때, 아르모니아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수호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어떤 거?’
아르모니아가 자기 전에 말을 거는 경우는 드문데….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 그녀의 말을 듣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조디악 측에서 임무 방식의 변화에 관한 부탁을 해왔습니다.]
나는 자고 있는 성수아에게 안긴 채 아르모니아의 설명을 들었다.
조디악은 내가 이 임무를 시작할 때부터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늘내일하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을 때, 내가 용사에게서 비올라를 낚아채면서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숨통만 트였을 뿐, 아직 산소호흡기를 뗀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나로 인해서 조디악이 가진 에넬의 생산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엥? 내가 뭘 했다고?’
[수호 님께서 직접 뭔가 하셨다는 건 아닙니다. 현재 배속 시스템이 운용 중이라는 것 기억하십니까?]
‘응, 지금도 다른 세계는 느리게 흐르고 있잖아.’
내가 있는 세계는 정상적으로 시간이 흐르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세계는 0.1배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사용하지 않으면 좋지만, 내 몸은 하나다.
조디악 측에게서는 내가 장기 임무를 원활하게 진행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배속 시스템을 걸어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 배속 시스템….
‘배속 시스템 쓰면 에넬 소모하는 거였어?’
[아닙니다. 소비하고 있지 않습니다. 생산에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아! 설마 슈트라?’
[그렇습니다. 조디악이 소유하고 있는 최고의 에넬 생산처가 0.1배속… 이게 너무 장기간 이어지고 있어서 항의를 해왔습니다.]
조디악도 이왕 시작한 거 투자라고 생각하며 배속 시스템을 원하는 대로 이용하게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 지금 0.1배속 중의 한 곳이 슈트라였고, 슈트라는 조디악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에넬 생산처였다.
그나마 일루니아 대륙이 마왕 가르디아의 손에 완전히 들어와서 숨통이 트였지만, 일루니아의 모든 지성체가 아직 마왕을 섬기는 상황이 아니었다.
생명체들이 뿜어내는 에넬을 모으는 방법은 종교의 성인을 추대하게 하는 방법과 흡사하다.
슈트라에 있는 학장이 대표적인 예다.
슈트라가 있는 세계의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루트비히 리펜슈타인을 존경한다.
내가 살던 세계의 유명한 성인(聖人)들을 합쳐놓은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심과 비슷한 감정들이 지성체들에게서 생성하는 에넬을 모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0.1배….
조디악에서도 다급해질 만했다.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지금 슈트라로 갈 수도 없는데….’
지금 내 일정은 빡빡하다 못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영사관에서 어느 정도 지내다가 위그드라실로 가야 하는데, 다시 영사관으로 올 시간을 만들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디악이 그 벅찬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을 제시해줬다.
[그건 조디악 측에서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쪽에서 다른 방식을 부탁해왔습니다.]
‘어떤 방식?’
[저속만 이용하는 게 아닌, 고속도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배속 시스템은 10배의 속도로 높이거나, 0.1배 속도로 낮출 수도 있다.
이제는 아예 내가 자리하고 있는 세계를 10배속으로 하고, 나머지 자리를 비운 곳을 0.1 배속으로 하자는 제안이었다.
즉 시간 차이가 100배가 나는 것이다.
[사실 저는 저속만 이용해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조디악 측에서 사정이 바뀐 듯합니다.]
‘의뢰인이 해달라고 하면 해줘야지 뭐….’
아르모니아도 고속을 이용한 배속은 사용을 지양하고 있었다.
배속은 많이 사용하면 언젠가 상대방 측에 주도권이 넘어갈 가능성이 있는 시스템이다.
지금 조디악이 마음대로 배속을 이용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 악으로, 깡으로, 자존심으로 버티면서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는 마당에 자연치유를 바라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좀 더 조율을 해봐야겠지만, 조만간 슈트라 쪽을 가는 것도 고려해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알았어. 중요하면 해야지.’
그러고 보니까, 루나 안 본 지 너무 오래됐네….
루나 입장에서 아직 1주일 정도 지난 상태겠지만, 나는 이미 2달가량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렇게 되면 시간 고민은 크게 안 해도 되겠네.’
[네, 만약 확실해지면 차후에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응, 그럼 나는 잘게.’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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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이 되어서야 조디악에서 정확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3주 뒤부터는 슈트라로 갈 수 있습니다.]
‘응, 이게 그쪽도 생각해놓을게.’
조디악에서 보내온 내용은 일단 슈트라와 내가 있는 영사관 쪽의 시간을 10배로 흐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제부터 자리를 비우는 곳은 0.1배속으로 고정해서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주겠다고 말해왔다.
이래저래 편하지만 결국 미래의 자원을 앞당기는 것이니 임무에 최선을 다해달라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일단 슈트라에 가기 전에는 평상시처럼 지내면 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배속에 관한 게 정리된 것과 동시에 견학에 관한 내용도 확정됐다.
“다음 주 월요일에 교단으로 견학을 가게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나는 생도의 명단을 받았고, 다행히 내가 아는 녀석이 한 명 있었다.
송아라.
그래도 말 잘 듣는 녀석 한 명은 확정이라 다행이었다.
“오늘 수업 마치면 회과 인솔자도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거예요.”
“회과 인솔자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인솔자는 보조 교관 한 명이 생도 6명을 책임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가는 곳이 교단이라 그쪽에서 회과에서 한 명 붙이라고 지시를 내렸어요.”
“회과라….”
“그러고 보니까, 회과 사람들 본 적 없죠?”
일단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을지 몰라도 내 기억에서 회과 사람을 본 기억은 없었다.
“그러네요. 생각해보니까, 회과는 회의 때도 참석하지 않아서 본 적이 없네요.”
“회과가 원래 그래요. 뭐랄까… 따로 논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교단에서 관리하고 있어서 영사관에서도 교단으로 취급하고 있어요.”
회과는 교관, 보조 교관뿐만 아니라 경비부터 내부 직원들 전부를 교단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회과의 경비과는 영사관 경비과와 아예 다른 부서라고 봐도 무방했다.
매뉴얼에도 굳이 신경 쓰지 말라고 적혀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긴 그쪽 구역은 아예 경비 인원 배치도 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지?’
[그렇습니다.]
초강현 얼굴 보기 드럽게 힘드네….
“일단… 2주일 정도 고생해요. 그래도 기과 애들은 기강이 잘 잡혀 있어서 빠릿빠릿 움직일 거예요. 마과는 애들이 촐싹대서 좀 힘들겠지만….”
초서현은 은근슬쩍 기과에 대한 자부심을 보이며 으스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초서현의 모습을 보며 웃으며 물었다.
“그럼 회과 인솔자분이랑은 월요일에 만나나요?”
“아뇨. 이따 오후 수업 마치고 교장실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설명을 듣고 기과 수업을 마무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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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제일 난감한 시간이었다.
“….”
“….”
근래에 초서현이 끼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세 명이 같이 밥을 먹는 자리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성수아는 초서현이 불편할 만한데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나와 삼식 세끼를 전부 같이 먹고 있었다.
사실 내 입장에서 두 사람이랑 밥 먹는 것 자체는 싫지 않았다.
그냥 대충 넘기면서 먹으면 그만이거든.
문제는 두 사람의 관계….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는데….’
[분명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냥 혼자 먹겠다고 선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밥을 한 숟갈 뜨는 와중에 내 눈에 한 사람이 식판을 들고 음식을 담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그래! 저 녀석이다!’
[…?]
나는 초서현과 성수아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