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는 나를 올려다보며 계속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다시는… 다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미안.”
나는 사과를 하면서도 확답을 하지 않았다.
똑같은 일이 생기면, 또 똑같은 짓을 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무시할 수 없는 머저리가 된 것이다.
나는 레나를 보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머저리라고 생각했던 자들의 삶을 나는 가슴 한가운데로 전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마음을 품은 채 내 머릿속에는 한사람이 떠올랐다.
“레나, 아르모니아는?”
“그… 아르모니아 님께서는 잠시 쉬신다고 다음 날 뵙겠다고 전해왔습니다.”
“….”
레나의 표정이 마냥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전에 루나를 구할 때, 아르모니아의 말을 듣지 않았던 전례가 있어서 그녀가 나를 어떻게 대해올지 조금 걱정이 들었다.
…나 진짜 짤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걱정하고 있을 때, 아직 감정을 완전히 추스르지 못한 레나가 속삭여왔다.
“아르모니아 님께서 일단 주인님을 최대한 보살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젠장… 섰다.
평소에 보기 힘든 레나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섰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 짤리더라도 서버린 녀석은 해결하자.’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레나를 침대로 끌어당겼다.
***
저벅… 저벅… 저벅….
“….”
완전히 박살이 난 옥상은 시멘트 먼짓가루와 돌덩이들… 그리고 시신과 혈흔들이 즐비하였다.
그리고 그 옥상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
180 초반의 큰 키, 수려한 외모와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무표정.
아무런 감정도 없는 남자의 표정은 아르모니아가 보여주는 무표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표정 안에 담겨 있는 그의 눈은 어떠한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남자는 무감의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는 귓가에 속삭이듯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계산 미스를 했군.”
남자는 선혈과 시체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조용히 난간 쪽으로 차분히 걸어갔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아까까지만 해도 성수호가 서 있던 난간이었다.
남자는 조용히 성수호가 바라봤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사관 입구에서는 여러 교관이 한창 괴생명체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단 두 사람만 들어왔다.
“두 사람….”
목소리에 어떠한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단어를 내뱉으며 자신이 말을 했다는 그 사실을 인지하려고 한 것뿐이었다.
그의 시야에는 초서현이 스마트 워치로 통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포착했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초서현과 성수아.
그를 보는 게 아니었다. 남자가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하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두 여자의 시선은 관심 없다는 듯 몸을 천천히 돌려서 옥상의 한복판에 섰다.
난장판이 된 옥상.
“이대로는 나중에 문제가 생기겠군.”
그는 가벼운 사안을 이야기하듯 혼자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숙여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 속삭였다.
“시체는 자연으로… 내가 부탁한 것은 원래대로… 다시 부탁한다.”
남자의 말과 동시에 옥상에 있는 모든 먼지와 시멘트 들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재결합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파편으로 떨어져 있던 시멘트 들은 자신의 자리를 완벽히 찾아가서 깔끔하게 복구가 되었다.
그리고 남아 있던 시체는….
파스스스….
아직 열기가 있던 시체는 갑자기 미이라처럼 말라비틀어지고 곧이어 뼈만 남았다.
스르르….
그 뼈조차 몇 초 지나지 않아서 가루가 되어서 바람에 흩날려 갔다.
단 10초.
이곳은 혈흔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원상 복귀가 되었다.
남자는 혈흔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오늘은 너무 많이 부탁했구나.”
그는 혈흔을 무시하고 회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몸이 저절로 공중에 뜨더니, 그는 회과 쪽 건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옥상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을 때….
쾅!
“하아… 하아… 하아… 뭐야….”
“….”
“어딨어!? 어, 어디 갔어! 나와 봐!”
남자는 초서현을 보면서 전혀 보이지 않았던 미소를 슬며시 지었다.
“누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원래대로 돌아갈 때가….”
남자는 그 말을 마치고 다시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서 옥상에서 완벽히 자취를 감추었다.
***
밤새 나와 성교하느라 지친 레나는 내 옆에서 알몸의 상태로 숙면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조용한 상태로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생활실을 나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나의 숙면만큼은 절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옆에서 가슴도 콕콕 찔러보고 장난을 칠 법했지만, 레나에게는 절대 그렇게 대하지 못했다.
‘레나한테 그러는 건 진짜 미안하니까….’
그 지고지순한 레나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데 한몫한 것이 바로 수면 장애였기 때문이니까.
사실 레나 옆에서 아침이 될 때까지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레나의 생활실에서 나온 건 바로 아르모니아 때문이었다.
나는 아르모니아의 집무실 앞에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진짜 그랜절을 박아서라도 용서를 구해야 하나….’
왠지 지금까지 아르모니아와 지내본 것을 생각하면 쉽게 내치지는 않을 거 같긴 한데….
오히려 지금까지 참아왔던 인내심이 터지게 되면 나는 다시 방구석 딸쟁이로 전락하는 것이다.
시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랜절을 온종일 박을 자신도 생겼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여자들을 놓고, 거지 같은 방구석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리다 마비가 올 거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단 벽에 대고 연습을 해볼 생각이었다.
‘미친… 내가 이딴 연습을 하는 날이 오네.’
나 이외의 존재를 머저리로 생각하며 윤리와 서열을 개처럼 무시하면서 살던 내가 그랜절이라니….
일단 허공에는 무리다. 나는 벽을 대로 일단 낑낑대며 물구나무를 서봤다.
“아오, 이거 존나 힘든데…. 이거 하루 만에 벽 없이 하는 건 무리다.”
그렇게 낑낑거리며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솨아악!
기압 소리와 함께 아르모니아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함장복을 입고 있는 아르모니아가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뭘 하시는 겁니까?”
“…운동.”
차마 그랜절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르모니아는 한동안 나를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마침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
“….”
올 것이 온 건가….
나는 일단 아르모니아의 뒤를 따라 그녀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모니아의 집무실은 볼 때마다 의아한 게 있었다.
고풍스럽지만 낡은 책상, 크기를 무시하고 중구난방 책이 꽂혀 있는 책장, 그리고 많이 헤진 침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집무실과 비교해서 너무 형편없는 시설이었다.
아무리 나를 배려한다고 해도 왜 이런 집무실에서 지내는 건지….
‘나중에 바꿔줘야 하나…. 아니, 바꿀 수 있으면….’
다시 불안감이 샘솟기 시작할 때, 침묵하던 아르모니아가 함장모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나는 그 모습에 문뜩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 돌아오고 꽤 오래됐는데, 아직도 자지 않고 저 복장을 하고 있던 건가?’
그렇게 아르모니아를 향해 의아한 눈빛을 보내고 있을 때, 그녀는 모자만 벗은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아르모니아, 할 말이 뭐야?”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행동했다.
갑자기 함장복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뭐, 뭐해?”
다른 여자였으면 얼싸 좋다고 하면서 흥미롭게 바라봤겠지만, 아르모니아가 이러니까 공포가 따로 없었다.
다른 여자면 몰라도 아르모니아가 이런 행동을 할 여자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아르모니아는 눈을 감은 채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상의 단추를 모두 풀었다.
그녀의 벌어진 상의 사이에 있는 검은 브래지어 끈과 새하얀 복부가 여과 없이 비치고 있었다.
그렇게 상의 단추를 다 풀고 나서야 아르모니아는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중대한 실수를 했습니다.”
무슨 실수? 나를 뽑은 실수?
도저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상태에서 아르모니아는 자신의 상의를 우아하게 열어젖히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레나 씨가 없었다면 수호 님을 위기에서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제 어리숙한 판단으로 목숨까지 잃게 할 뻔했습니다.”
“아니, 뭐 그렇게 까지는….”
솔직히 레나를 데리고 온 건 신의 한 수였다.
하지만 아르모니아가 말하는 어리숙한 판단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인물이 우리에게 시선을 두고 있다면 워프를 못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니까.
하지만 아르모니아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고결한 자태를 풍기며 나에게 말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는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 수호 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
“오늘만큼은….”
아르모니아는 그 말과 동시에 브래지어 가운데에 달린 후크를 튕기면서 입을 열었다.
“저를 마음대로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
나는 아르모니아의 가슴을 보면서 잠시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아까 장난으로 가슴 만지고 싶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막상 이렇게 전부 준다고 하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존나 잡고 싶다!’
내 가슴 속에 검은 파도가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내 오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가슴을 눈으로 보고, 체취를 맡고, 목소리를 귀로 들으며…. 만지고, 맛보고 싶어졌다.
조금 전에 레나와 교접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자지는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직 발기되지 않았지만, 조만한 크게 솟아올라서 추잡한 생각으로 내 뇌를 조종할 것이다.
내가 잠시 정신줄을 놓은 사이에 내 양손은 이미 그녀의 가슴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탄탄한 가슴, 딸기 맛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붉은 색의 유두.
드디어 그녀의 가슴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가지고 싶다.
나머지 부족한 촉각과 미각을 느껴보고 싶은 충동만이 내 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가슴에 손가락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수호님?”
“….”
나는 아르모니아가 풀은 브래지어 후크를 당겨서 잠가줬다.
브래지어 후크를 잘 잠그고 나서 아르모니아에게 말했다.
“내 꺼 잘 간수해 놔.”
“….”
아르모니아는 눈을 감고 뭔가 떠올리는 듯 조용히 있었다.
그렇게 조용하던 그녀는 아까와 다르게 동공에 담긴 생기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때까지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잘 간수하겠습니다.”
“이제야 너 답네.”
나는 무표정의 아르모니아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
나는 다음 날 비올라와 베아트리체를 만나서 간단하게 식사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사실 중간에 워프 에너지가 채워지면서 1회가 충전됐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2회가 채워지면 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도착한 영사관은 이미 한밤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내가 도착한 옥상에는 누가 울먹이며 난간에 고개를 파묻고 울먹이고 있었다.
“약속해 놓고… 오늘 같이 만나자고 약속해 놓고….”
“….”
초서현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 하루 동안 실종된 상태이다.
그런 상황에서 초서현이 말한 약속의 대상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진짜 괜찮은 여자네.’
아직 그녀에 대해서 모르는 게 훨씬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느 정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초서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약속 안 지켜도 되니까… 그냥 돌아와….”
“다행이네요. 약속 어겨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
초서현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
눈물을 흘리며 나를 토끼 눈으로 바라보는 초서현에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아직 밤 11시니까… 용서해주면 안 될까요?”
<215화는 214화에서 스킵된 레나의 성교 씬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가의 욕심이 담긴 씬으로 스토리에 몰입하시려면 다음 화로 넘기셔도 무방한 회차입니다.>
<214화와 215화의 내용이 재구성되었습니다. 읽는 데 불편함을 드려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