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계속 말로 지시를 받던 초서현은 내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 성수호 교관님.”
“응?”
“자, 자세가 불안해서 그런데… 직접 교정…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나는 초서현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조심스럽게 각도를 조정해줬다.
팔뚝, 팔꿈치… 심지어 겨드랑이 쪽에도 스킨쉽을 감행했다.
그렇게 접촉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와씨… 역시 헤드기어랑은 차원이 다르네.’
어제 게임에서 초서현의 자세를 교정할 때 느껴졌던 촉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록 초서현은 생도복을 입고 있어서 상체를 면으로 모두 가린 상태였지만, 그녀의 온기가 면을 통과해서 내 손에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온기만큼 초서현에게도 내 온기가 넘어가는 듯이 흠칫거리기 시작했다.
“흐으….”
“어떻게? 불편하니?”
“아, 아니요…. 계속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초서현은 최대한 생도의 분위기를 풍기며 내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분명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궁술에 필요한 곳을 제외하고 쓸데없이 초서현의 몸을 만지작거리지 않았다.
대신 이미 만지고 있는 곳은 무언의 허락이 내려진 것으로 판단하고 서슴없이 만졌다.
초서현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고 내려가며 자세를 교정하는 척 허리를 만졌고, 허리를 양 손바닥으로 감싼 상태로 서서히 위로 올렸다.
“흐흥….”
불안함과 흥분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초서현은 순수하게 내가 교관이라는 직책으로 다가와 주길 바란 건지, 아니면 이런 상황을 원하고 있는지….
그 모든 건 결국 초서현의 본심이 아닌 훗날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 그녀가 내 손길을 부담스러워하더라도 훗날 오히려 손길을 원할 수도 있고, 지금 손길을 원하지만, 훗날 거부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내가 해야 하는 건 그녀가 가진 쾌락과 불쾌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치면서 경계의 한도를 계속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손기술은 당분간 자제하기로 했다.
초서현처럼 남자를 모르고 살아왔다면 갑작스러운 흥분에 오히려 불쾌감이 치솟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하루하루 천천히 올려야지.’
나는 초서현의 눈을 피해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조그마한 신음을 내는 초서현의 몸을 여 한없이 만졌다.
..
..
초서현은 VR 캡슐에서 나온 뒤에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감사의 말을 해왔다.
“그…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상황극은 상황극이다. 연인끼리라면 모를까 호감도 조금 쌓인 남녀가 그런 상황극을 하고 나면 어색한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초서현은 눈을 강하게 뜨며 손을 바싹 쥐더니 내게 부탁했다.
“혹시… 좀 더 부탁해도 돼요?”
“그럼요. 내일도 해드리겠습니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은 계속해드릴게요.”
“흐흫… 고, 고마워요. 그럼 이만!”
초서현은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후다닥 VR 훈련실 밖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뛰어가던 초서현이 다시 후다닥 달려왔다.
“…?”
“그… 오, 오늘도 같이 게임해요.”
“하하… 네, 알겠습니다.”
초서현은 내 대답을 들은 뒤에 입가를 실룩이더니 다시 훈련실 밖으로 뛰어갔다.
***
초서현은 엄청난 속도로 기숙사로 들어오면서 침대 위로 점프를 했다.
팡!
초서현을 받아준 침대는 금새 흔들림을 잡으며 그녀를 침대 안에 스며들듯 잡아두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포근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마음은 그야말로 심란했다.
“…미쳤어.”
초서현은 성수호에게 인사를 건넨 뒤에 달려오면서 오늘 했던 행동이 얼마나 당돌한 행동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달릴수록, 숨이 차오를수록 그녀의 볼은 터질 듯이 빨개지며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하고 침대로 다이빙을 하고 나서야 완벽히 인지할 수 있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이제 그런 애들이나 하는 짓을 부탁할 나이도 아닌데….”
언제나 애 같다고 듣는 것에 격한 분노를 표출하던 초서현이 정작 본인이 애 같은 행동으로 성수호와 교감을 쌓고 싶었던 것이었다.
분명 성공이었다.
잠시나마 영사관 시절에 좋은 교관을 만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즐거웠다.
그런 교관, 하물며 보조 교관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홍미선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버틸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흥분됐다.
“진짜… 미쳤어… 하아… 미안해서 어떻게 얼굴을 봐….”
초서현은 중간중간 입 밖으로 흘렸던 신음을 떠올렸다.
평생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초서현 본인도 그 감정을 헷갈리며 가만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완전히 깨달은 것이었다.
신음의 정체를….
“또라이 같은 년… 도와주는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리를….”
비록 머릿속에 이상한 상상을 한 건 아니었지만,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초서현은 계속 자책하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도 모른다.
초서현은 이 사실을 성수호도 모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평생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자신만 알고 있는 심층부에 있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 비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내일 어떤 얼굴로 봐야 해….”
초서현은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며 침대에 누운 채 점점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
“…왜 안 오지?”
초서현과 헤어지고 VR에 접속한 지 대략 2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친구창에 초서현의 회색 이름이 초록색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숨김 모드 같은 걸로 들어왔을 리는 없는데…. 설마 아까 내가 실수했나?”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불안감이 피어오를 때, 아르모니아가 나를 안심시켰다.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초서현의 반응을 봐서는 긍정적인 부분만 비치고 있었습니다. 아마 실수로 잠이 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내게는 다행이 아니다.
“이제 뭐 하냐…. 오늘은 그냥 자야 하나?”
[연습 겸 혼자 게임을 플레이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혼자는 재미없는데.”
[….]
솔직히 초서현이 옆에서 와! 대박! 짱! 이런 추임새를 넣어주며 흥분하니까 재미있는 거지….
혼자 하면 그런 재미가 반으로 떨어지는 것을 넘어서서 재미 자체가 있을가 의문이었다.
이런 게임은 남정네들이 주요 고객층이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칭찬받아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 같았다.
‘초서현이 랭크전인가 뭐시기인가 하자고 할 거 같은데. 수준을 알아둬야 할 거 같긴 한데….’
[만약 생각보다 수준이 높다면 레나 씨의 계산이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레나 씨의 통찰력을 확인할 겸 플레이를 미리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 하자! 그럼 접속하고….’
훗날의 즐거움을 위해서 미리 연습해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강탈자로 접속해서 대기실에 들어간 뒤, 시작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 초서현이 해줬을 때는 되게 쉽게 하던데, 뭐가 뭔지….”
뭔가 이런저런 설정들이 마구잡이 들어가 있는데, 나로서는 공학용 계산기를 처음 보는 공대 수석 입학생과 같았다.
게임을 백날 잘한다고 해도 시작을 못 하면 게임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의미다.
“우짜지….”
내가 그렇게 설정창을 한창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응?”
여자의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초서현이 왔나? 싶었는데, 분명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초서현처럼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아닌, 나긋나긋하게 귓가를 사르르 울리는 피리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누구세요?”
(에이… 너무 하신데요? 저 어제같이 게임했던 세인트블루예요.)
“아! 안녕하세요.”
세인트블루는 내 다급한 인사를 듣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일이 늦게 끝나셨나 봐요?)
“하하… 오늘 직장 상사께서 잔업 좀 도와달라고 하셔서요.”
초서현 직장 상사님께서 친히 부르시는데, 내가 가지 않을 수 없죠.
세인트블루는 낮게 깔린 음성으로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 미안해요. 나는 장난이었는데.)
“괜찮아요. 큰일을 한 것도 아니고, 제가 좋아서 도운 거라서요.”
(혹시… 워커홀릭?)
세인트블루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내 귀를 간지럽히며 즐겁게 해줬다.
‘와, 목소리 좋네. 성우 같은 거 해도 될 듯?’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르르 간지럽혔지만, 목소리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각이 진 상태로 파도를 치며 귓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이래서 중요한가 싶었다.
(혹시 지금 게임 하시려는 건가요?)
“네, 그런데 마침 일행이 바쁜지 오늘은 들어오지 않네요.”
(아! 그럼 저랑 같이하실래요?)
“…남자 친구분 계시지 않나요?”
(한동안 바쁘다고 못 온다네요.)
…럭키!
비록 게임 내내 옆에서 해골이 둥실둥실 떠다니며 말을 걸겠지만, 그래도 말 상대가 있는 쪽이 백배 낫다.
특히 서포터는 친한 사람과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나는 괜히 빼지 않고 바로 그녀의 제안을 단번에 수락했다.
“저야 좋죠! 그런데… 저 게임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하! 저번에 처음 하셨다고 했죠? 제가 알려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 갑자기 앞에 주위에 공기들이 홀로그램 화 되어서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 사람이 만들어진 뒤에 내게 말을 건네왔다.
“오늘 잘 부탁드릴게요.”
“….”
키 170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검은 망토를 쓰고 순한 눈빛으로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카페에 한 커플이 앉아있었다.
여자는 분홍색 니트에 허벅지 중간까지 걸쳐져 있는 회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웨이브를 한 갈색 머리카락은 뒤쪽으로 길게 뻗어나갔고, 머리카락의 한 줄기는 어깨를 타고 아름답게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 사람의 이목을 잡는 왼쪽 눈 밑의 점은 그녀의 매력 포인트였다.
여자의 이름은 윤지아.
어제 성수호와 워치 오브 레전드를 같이 플레이했던 세인트블루였다.
그리고 테이블 바로 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그녀의 남자친구, 버그킬러였다.
그는 음료를 한 모금 빨고 나서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쾅!
“씨발! 하아… 도저히 잊히지 않네.”
“오빠… 제발 좀 그만해. 어제 일 가지고 계속 끙끙거려봤자 오빠만 피곤해져….”
윤지아는 버그킬러가 내려찍은 주먹 위에 손바닥으로 감싸면서 진정시켰다.
“오빠, 오늘부터 중요한 임무라며…. 화내는 건 나중에 해도 돼. 괜히 어제 일 신경 쓰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래?”
“하아… 미안.”
“괜찮아. 요새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느라 힘들다는 거 나도 아니까.”
“지아야… 후우… 고마워.”
“고맙긴….”
윤지아의 위로가 먹혔는지 버그킬러는 분을 누그러뜨리고 음료를 들어서 한 모금 들이켰다.
버그킬러. ‘고충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세계에서 알아준다는 교단 소속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아… 그 새끼 친구추가만으로는 불안한데…. 지아가 친구 초대했어도 같이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으면 그냥 지울 수도 있고….’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전날 만났던 강탈자만 떠오를 뿐이었다.
간신히 윤지아와 친구등록을 했던 강탈자가 혹시라도 친구 목록 삭제할까 두려웠다.
지는 것보다 그 녀석을 더는 못 만나는 상황이 더 끔찍하게 여겨질 정도로 두려웠다.
본인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임무에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맞아! 그러면 되잖아!’
그러던 중에 그는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지아야!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뭔데?”
윤지아는 그의 부탁이라는 단어에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
..
윤지아는 성수호와 연결해서 그의 대기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 잘 부탁드릴게요.”
“….”
윤지아는 고충신에게 한 가지 부탁을 받았다.
그건 바로 강탈자와 일주일 동안 게임을 하면 비위를 맞춰달라는 것이었다.
(오빠! 왜 그렇게까지….)
(제발 부탁이야! 그 새끼 분명 너한테 호감 있어 보였어. 니가 좀 꼬드겨서 데리고 있다가 내가 나중에….)
윤지아는 결국 한숨을 쉬면서 고충신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번 그렇게 밀어붙이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윤지아는 결국 포기하고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하셨나 봐요? 하긴 갑자기 같이하자고 해서 당황했죠?”
“네. 정말 감사합니다.”
“뭐가요?”
윤지아는 성수호의 감사하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수호는 미소 지으며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같이 해주신다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찮으실 텐데….”
“아… 괜찮아요.”
윤지아는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흠… 괜찮은 사람 같은데… 사실 오빠한테 따로 직접적인 시비도 없었고….’
윤지아가 천성적으로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 여자였다.
남자친구를 그렇게 철저히 짓밟는 사람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또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해보니 정작 시비를 걸었던 건 고충신이었고, 성수호는 그저 집중해서 게임을 했을 뿐이다.
거기다….
‘뭐… 오빠 말대로 나를 공격하지는 않았으니까…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겠지?’
어차피 게임 속이기 때문에 해코지를 당한다고 해도 욕설이 전부인 곳이었다.
거기다 성수호를 보니 전혀 그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냥 게임만 같이 하는 거니까. 얼굴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도 아니니까.’
윤지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성수호에게 물었다.
“게임은 저번처럼 노멀전 하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