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서히 뒤로 빼고 있는데도 녀석은 돌하르방처럼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저기요. 갱 온다니까?”
“….”
그런데 갑자기 내 말을 씹던 녀석이 미니언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니언을 치는 것을 넘어서서 그냥 죽여서 자기가 골드를 처먹기도 하고….
“저기요. 갱 온다….”
“씨발 답답해서 못 보겠네.”
“…네?”
돌하르방처럼 무겁게 침묵하던 서포트는 갑자기 입을 열고 욕설을 내뱉었다.
“빨리빨리 타워 밀 생각을 해야지 앞에서 깨작깨작 뭐 하는 거야?”
“저기 그러니까, 갱이….”
“니가 무슨 그랜드 마스터야! 뭐가 올지… 어! 어어!!”
수풀에서 갑자기 망토를 두른 녀석이 튀어나와서 서포터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합세하는 상대팀의 원딜과 세인트블루….
‘씨발, 저건 살리고 싶어도 못 살린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 결과는 당연히 서포터는 죽었다.
그리고 전장에 울려 퍼지는 욕설.
“미친 새끼이냐!? 서포터 버리고 도망을 가?”
바로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 모든 사람에게 들리게 말하는 대화였다.
어처구니없는 나는 전체말로 대응해줬다.
“허허… 그래서 내가 갱 올 거 같다고….”
“씨발 안 해!”
“…?”
…나갔다.
그 모습에 초서현뿐만 아니라 다른 아군도 당황하며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수 초간의 침묵 후에 초서현이 나에게 귓속말을 걸어왔다.
“하필 걸려도 저런 녀석이 걸려서….”
“괜찮아요. 일단 제가 있는 쪽은 오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
어차피 2:1이라면 굳이 와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네? 애초에 지금 4:5라서 솔직히 게임 자체가 안 될 거 같아요. 그냥 얌전히 있다가 서렌을….”
“일단 좀 더 해볼게요. 스킬도 익힐 겸.”
“…그래요.”
다행히 서포터 한 명만 문제가 있었던 건지 다른 아군 두 명은 성실하게 게임을 진행했다.
일단 지금 내가 손에 익혀야 하는 건 스킬이다.
망한 판이니까, 오히려 부담 없이 스킬을 사용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기본 스킬은 세 개에, 궁극기가 하나 있었다.
첫 번째 스킬은 세 번 튕긴 다음 마지막 타겟에게 큰 데미지와 스턴을 주는 스킬이었다.
두 번째 스킬은 일직선으로 번개 레이저를 발사해서 범위 데미지를 입히는 스킬이었다.
세 번째는 백스탭이었다.
마지막으로 궁극기….
‘투사체가 멀리 날아갈수록 강화가 된다?’
[가까운 곳에 있는 적을 맞추는 용도가 아닌, 먼 거리의 적을 맞추라고 만든 스킬 같습니다.]
일단 스킬 설명만 봐서도 좀 헷갈리는 게 많았다.
일단 궁극기를 사용하면 화살을 쏘게 되고, 날아가는 거리에 비례해서 속력와 파괴력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일정 거리 이상 날아가면 광역스턴 효과도 추가된다고 한다.
‘이건 일단 쏴보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일단 몇 발 쏴서 손기술이 익숙해지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나는 저 멀리서 나를 경계하는 원딜과 세인트블루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일단 해봐야겠다.”
..
..
내가 한창 게임에 집중하고 있을 때, 우리 편 중 한 명이 아군 채팅으로 말을 걸어왔다.
“강탈자님, 부캐세요?”
“아뇨? 오늘 처음 하는데요.”
“와…. 그 캐릭 정상적으로 플레이하는 사람 처음 봐요.”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대답해주고 활시위를 가볍게 튕겼다.
그리고 게임 내에 여성의 나레이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전설의 출현!>
상대편에 있는 원딜은 내 화살을 받고 바닥에 꼬라박은 채 먼지가 되어 사라져갔다.
8/0/0
솔직히 이렇게 보니까, 불쌍해 보이긴 했다.
일단 저 양반도 초보자로 왔을 텐데, 설마 이렇게 학살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무엇보다 황당한 점은 갱이었다.
아무리 버그킬러라는 녀석이 잘 숨어서 온다고 해도 레나의 입장에서는 너무 티가 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군의 시야가 모두 확보되는 이 게임은 레나의 입장에서 적의 행동도 쉽게 예측 가능할 정도로 단순해 보인다고 말했다.
갱도 안 돼… 실력도 안 돼….
상대편 원딜은 8번째 죽음으로 인해서 멘탈이 나갔는지 강제 종료를 해버렸다.
거기다 저 버그킬러라는 녀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가 있는 봇으로 계속 갱을 시도했다.
그 덕분에 미드와 탑은 이미 우리 편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버그킬러는 갱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도대체 왜 저렇게 기를 쓰고 달려드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레나의 생각은 달랐다.
[전쟁에서도 저런 지휘관이 존재합니다. 자기가 졌다는 그 상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계속 똑같은 작전을 밀어붙이는 지휘관이 있습니다.]
‘무능력한 놈일세….’
그러나 내 말과 다르게 레나의 대답은 달랐다.
[그런 지휘관은 생각보다 유능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 돼?’
[그동안 너무 유능했기 때문에 한 번의 실수가 우연히 발생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
자기에게 묻어 있는 실수라는 얼룩을 지우기 위해 똑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역사책에 적히게 될 자신의 실책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거기다 버그킬러라는 자가 계속 이 습격을 감행하는 것은 연인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여자친구 옆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는 건가….’
그 결과 상황은 최악으로 번져가는 것이고….
설마 저 녀석도 갱을 단 한 번도 성공 못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즉 도박적인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결과….
-승리-
상대 팀의 두 명이 서렌을 치면서 게임이 종료되었다.
..
..
“아니, 그동안 VR 기기 있으면서 왜 이 게임 안 했어요?”
“선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그 정도 실력이면 좀 더 연습하다가 랭겜 돌려도 되겠는데요?”
초서현은 흥분한 상태로 내 활약을 칭찬해줬다.
지금까지 온라인 게임에 크게 눈독 들이지 않았던 나도 초서현의 칭찬 세례를 듣고 나니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온라인 게임, 왜 하는지 이해가 가는데? 치켜세워주는 거 생각보다 기분 좋네.’
[어떤 분야든 잘하게 되면 우상화가 이루어집니다. 거기다 게임은 단시간에 그런 현상을 맛볼 수 있으므로 더욱더 빠져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대로다.
어떤 분야든 잘하면 다들 올려다보기 마련이고, 그 사람에 대한 동경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올려다보고 동경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자신의 안에 자존감이 터져 나오게 된다.
무엇보다 게임은 재능만 있다면 한 두 판만으로도 표면적인 성과가 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게임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초서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아까 버그킬러에 관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아까 그 녀석 빡치는 표정 봤어요? 나는 그거 절대 못 잊어!”
“저도 그건 못 잊겠네요.”
게임이 끝나고 모이는 장소에 당연히 그 버그킬러도 같이 있었다.
서로 대화가 가능한 곳에서 그 녀석은 길길이 날뛰며 욕을 퍼부었다.
특히 아군에게….
누가 봐도 잘못한 건 본인이었다.
아무리 본인 실력이 좋다고 해도 초서현 같은 실력자를 방치하면 다른 초심자들이 대처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생각이 있는지 나나 초서현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욕을 하는 순간 정말 찌질함의 끝을 보여주는 꼴이 되는 거니까….
초서현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한 판 더 할래요?”
“저야, 좋죠.”
“크으… 이번에는 같은 라인으로 해요.”
초서현은 아까 만났던 서포터의 일도 있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서포터를 자처하며 나와 같은 라인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서포터면… 좀 지루하지 않나요?”
“음? 전혀요. 게임은 같이 하면 좋잖아요.”
초서현은 웃으면서 내 등을 툭툭 쳐줬다.
“이왕 같이하는 거 붙어 있으면 더 좋고.”
..
..
초서현은 상대편 픽을 보면서 조용하게 읊조렸다.
“…망할.”
버그킬러, 세인트블루.
이번에도 적으로 만났다.
문제는 저 버그킬러의 포지션이었다.
“포지션을 다양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인가 보네요.”
버그킬러는 원딜을 골라서 세인트블루와 같이 우리가 있는 라인에 도착한 상태였다.
“흥… 저런 녀석은 대부분 깔짝대면서 캐릭터 좋은 거 나오면 일단 고르고 보는 녀석들이에요.”
초서현의 말대로 저 녀석의 성향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아까 초서현에게 쓴소리를 한 뒤에 다음 판에 정글을 골랐다.
그리고 바로 전 판에 원딜인 내게 갱을 수없이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하자 원딜을 골랐다.
뭐랄까… 남에게 굉장히 휩쓸리는 타입 같았다.
조금이라도 좋아 보이면 일단 손대는 스타일.
“그래도 실력은 좋으니까… 아까보다는 조심해야 해요. 저 녀석 분명 부캐인게 확실하니까.”
“알겠습니다.”
궁금하다.
지금까지 했던 두 판은 진짜 초보자들과 했다면 저 녀석은 최소한 기본 이상은 할 것처럼 보였다.
아까 상대했던 녀석들과 얼마나 다를지 정말 궁금했다.
..
..
‘뭐랄까… 아까 녀석들이랑 다를 게 없는데?’
[….]
8/0/2
위기 상황이냐, 마냐를 떠나서 그냥 개 바르고 있었다.
특히 내 표적이 된 버그킬러는 내게 6번 킬을 당했다. 나머지 킬과 어시스트는 정글이 왔다가 죽은 수치였다.
세인트블루는 몇번 킬 각이 나오긴 했지만, 아까의 친분이 생각나서 선뜻 죽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한데? 분명 잘하는 거 같긴 하거든? 움직임도 독특하고…. 그런데 전혀 어렵지 않네.’
버그킬러와 아까 상대했던 원딜과 다른 점을 꼽으라고 하면 움직임이 독특하고 명중률이 높다는 점뿐이었다.
그게 끝이다….
이상한 발놀림으로 와리가리 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
좋은 표적의 광대….
어떤 식으로 와리가리를 해도 화살은 녀석의 머리를 정확히 맞췄다.
[조준력이 수호님의 인지능력을 거치지 않고 사용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칭찬이지?’
[…칭찬입니다.]
뇌를 거치지 않고 화살을 쏜다는 의미 같은데? 그걸 칭찬으로 봐야 하는가….
여하튼….
그 뇌를 거치지 않고 쏘는 화살 덕분에 버그킬러는 학살당했고, 급기야 상대편 쪽에서 전체 말로 버그킬러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캬… 킬 자판기 납셨네.”
“그냥 대놓고 꼬라박아도 저렇게 킬은 못 주겠다.”
“여러분! 날이면 날마다 오는 자판기가 아니에요! 다른 라인에 있는 분들 빨리 봇으로 가서 킬 드세요~!”
그리고 저런 조롱을 참으면 내가 봐왔던 버그킬러가 아니다.
“이 씨발 새끼들이….”
“캬… 욕은 찰지게 잘하시네요.”
“게임도 그렇게 잘해주세요.”
“씨발….”
결국 게임은 버그킬러에 대한 조롱과 비난으로 20분을 꽉 채우고 칼같이 서렌으로 종료됐다.
버그킬러는 게임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대기실로 나와버렸다.
그리고 대기실에 오자마자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 개새끼 죽여버리겠어!!”
“오빠… 참아. 게임이잖아.”
그의 옆에 세인트블루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 토닥거리며 위로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인트블루의 외모는 아까 그 해골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나긋한 눈매에 점잖은 미소, 그리고 왼쪽 눈 밑에 깔끔하게 박혀있는 점이 누가 봐도 미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캐릭터의 복장으로 음산한 분위기의 망토를 두른 여자는 오히려 밝은 미모를 한층 더 발산하고 있었다.
세인트블루는 한참을 토닥거리며 버그킬러를 위로해주고 있을 때, 그가 이빨을 갈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그 새끼 몇십 번 밟아 놓지 않으면 도저히 풀리지 않겠어.”
“오빠… 오늘은 늦었잖아. 그리고 내일부터 중요한 임무 있다고 했잖아. 오늘은 그만해야지.”
“씨발….”
버그킬러는 욕설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일단 이번 주는 안 되겠고… 임무 끝나고 족쳐야겠어.”
“….”
세인트블루는 버그킬러의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까 3번 연속으로 만난 것도 순전히 우연이였고….’
게임 특성상 누군가를 지목해서 같이 플레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같이 플레이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친구 등록이 되어 있어야 했다.
‘요새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은 거니까. 흥분 좀 가라앉히면….’
세인트블루는 그렇게 상황을 침묵으로 넘기려는 했다.
하지만 버그킬러가 예상치 못한 부탁을 해왔다.
“지아야… 너 아까 그 녀석이랑도 친하게 얘기했지?”
“어… 그냥 어떻게 싸울지에 관한 얘기 정도?”
세인트블루의 실명은 윤지아였다.
윤지아는 평소에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근사근 대하는 성격이었다.
비록 상대방에게 그녀의 얼굴은 해골로 보이지만, 그녀는 그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애초에 워치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에 큰 흥미를 느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요새 임무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같이 하긴 하는데…. 별로 재미도 없고….’
하지만 남자친구인 버그킬러는 언제나 그녀와 같이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녀와 할 때는 언제나 전적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계정으로 들어와서 학살하며 잘난척하는 것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강탈자라는 아이디를 가진 녀석이 모든 것을 망쳐놓은 것이었다.
“지아야. 너 아까 그놈한테 친구 초대 좀 해봐.”
“뭐? 왜?”
“일단 친구 추가만 되면 그 새끼 언제 게임하는 지 파악해서 저격할 수 있잖아.”
“….”
“아까 보니까 너한테는 공격 안 하더라. 딱 봐도 동정 새끼가 여자인 거 눈치채고 좀 잘 보이려고 하는 거 같았어.”
윤지아는 이 얼토당토않은 부탁을 들어줘야 하나 싶으면서도 바로 승낙했다.
“알았어….”
윤지아는 창피한 마음을 가지며 강탈자에게 친구 추가 메시지를 보냈다.
‘분명 여기서 싫다고 하면 또 화나서 임무에 지장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냥 해주자…. 그리고 무조건 수락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탈자의 승낙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