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설명을 다 듣고 레나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 귀찮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잠시 쉬고 계시면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레나는 살며시 웃으며 뒷정리를 시작했고, 고작 10분 만에 모든 정리를 마쳤다.
그녀는 내게 허리를 푹 숙이고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고마워~”
내 대답과 함께 레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르모니아의 목소리가 담긴 통신이 들려왔다.
[에넬 자체는 많이 쓰지 않으니 문제는 없지만, 24시간 동안 회귀에 대처할 수 없느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케이~”
아르모니아는 아마 바로 회귀할 상황만 만들어지지 않으면 문제가 없겠다 싶어서 워프를 허가한 것이었다.
어차피 워프 에너지가 차는 동안 한여름만 주의하면 되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나는 한창 기절한 양지현을 흔들어서 간신히 깨웠다.
양지현은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다행히 일어났다.
“야, 이제 일어나.”
“흐… 으응? 흐흣!”
일어나자마자 놀란 양지현이 양팔로 팔짱을 끼고 뒷걸음질 치더니 상황을 주시했다.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너 기절해서 기분 다 잡쳤다.”
“죄… 죄송합니다.”
양지현은 아까 벗겨져 있던 바지까지 깔끔하게 입혀진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야, 너 나한테 빚진 거다. 알았지?”
“명심하겠습니다….”
양지현은 경계심을 가지면서도 계속 나에게 존대를 하며 경칭을 썼다.
간부로서의 본능적인 건지 종속으로 인한 인위적인 건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괜찮은 반응이었다.
나는 양지현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내일 하려던 계획 변경하자.”
“말씀해주십시오.”
“던전은 좀 더 늦게 들어가는 게 좋겠어.”
내일 양지현에게 해야 할 일을 이런저런 이야기 해줬다.
“마을에 남은 녀석들은 뭐 너희들이 알아서 해도 돼. 한봄은 내가 어떻게든 회유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 너 지금 가지고 있는 아이템 뭐 뭐 있어?”
자칫 깡패처럼 보일 수 있는 말투였지만, 혹시라도 내게 필요한 아이템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대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건 상태 이상을 주는 아이템, 능력치 포션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비는 혹시 모를 예비 무기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이미 들었던 촬영기와 통신장비도 몽땅 다 말해줬다.
그중에서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아이템이 있었다.
“그리고 사면권과 마나 계약서가 있습니다.”
양지현의 말에 저 두 개가 뭔가 하고 있을 때, 게꼬수가 놀라 하면서 감탄했다.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오오… 사면권이 있다고?
“그게 뭔데요?”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주황색 소환사 상태를 지워주는 거야.
듣기만 하면 딱히 쓸모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주황색 소환사는 어떠한 제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며칠 후에는 사라지는 별거 없는 상태 이상 같은 거였다.
하지만 저것을 이용하고 약한 범죄를 저지른 다음에 교란하는 용도로 쓰면 굉장히 유용하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저거 있으면 엄한 녀석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가능해. 거기다 비싸기도 더럽게 비쌀걸?
“오호….”
하지만 비싸다는 소리를 들으니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있으면 편하고, 종속이 있으니까 달라고 하면 받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크게 필요하지 않고, 처음부터 등골 빼먹는 이미지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나 계약서 몇 장만 줘.”
“알겠습니다.”
양지현은 마나 계약서 내게 3장을 건네줬다.
저번에 한여름과 계약할 때 쓴 아이템이라고 한다.
값어치가 나가는 아이템이었지만, 사면권처럼 무지막지하게 비싼 녀석은 아니라고 게꼬수가 설명해줬다.
난 그렇게 마나 계약서를 받고 나서 내가 생각해낸 계획을 말했다.
“내일 너는….”
..
..
다음 날, 나와 민하연은 사냥터로 나가서 사냥을 개시했다.
전 회차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봄과 한여름이 같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여름은 사냥하는 내내 욕설을 입에 담고 있었다.
“씨발, 내가 왜 이 새끼랑….”
“제발 닥치고 좀 해….”
그리고 그 욕설을 맞받아치는 건 한봄의 몫이었다.
사실 한여름은 쓸모없음을 넘어서 방해꾼 역할로 딱 맞았다.
나와 민하연이 화살을 겨누면 괜히 앞에서 알짱거리는 바람에 사냥에 방해할 뿐이었다.
한봄은 내게 와서 허리 굽혀서 사과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저희 오빠가 방해를….”
“아니, 씨발! 네가 왜 사과를 하는데!”
“넌… 좀… 닥쳐….”
여기서 확실한 건 한봄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전 회차에서 깐깐하게 굴고, 콧대 높게 으스대던 한봄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 한여름 입장에서도 얘가 왜 이러나 싶을 것이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다투고 있을 때, 여자 삼인방이 나타났다.
“어머? 여기서 사냥하고 계셨어요?”
“우리도 같이해요!”
“혹시 자리가 있으면….”
사실 인연이 인연이라고 이렇게 만나놓고 그냥 ‘싫어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죠.”
나는 흔쾌히 허락하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이렇게 알고 지내는 것도 인연인데, 같이 성장하는 게 좋아 보여요. 그런데 문제는 밸런스네요.”
“밸런스요?”
“솔직히 지금 하연이랑 저는 둘이서만 해도 충분하거든요.”
아니, 오히려 둘이서 사냥하면 최고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
민하연과 내가 한방씩, 두 방을 제대로 맞추면 여기 있는 몬스터를 확실하게 즉사시킬 수 있었다.
애초에 여기 있는 인원들 레벨이 4~5 정도에 머물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민하연은 이미 궁술 레벨이 10이다.
거기다 나는 15이고.
하물며 내가 포션을 만드니 힐러도 필요 없다.
그런데도 그녀들을 받아들인 건 종속 때문이었다.
*(박선희 종속 1단계)*, *(손혜은 종속 1단계)*, *(박진희 종속 1단계)*
세 명 다 종속이 잘 걸려있는 상태였다.
‘신기하네…. 저게 영향이 있어서 일부러 찾아온 건가?’
[가능성이 큽니다.]
종속의 특이점을 하나 더 깨닫고 나서 말을 시작했다.
“일단 하연이랑 한봄씨… 그리고 너, 세 명이 파티하고 저랑 여기 세 분이 파티하죠.”
“…뭐?”
“네? 왜요?”
일단 반발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건 민하연과 한봄이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일단 같이 성장하는 게 중요해. 내가 저분들을 도와주고, 하연이가… 저 녀석 좀 맡아줘.”
“하아… 싫은데….”
대놓고 싫다는 표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하연의 모습에 굴욕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한여름은 덤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녀를 데리고 파티원과 떨어진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하연아, 나랑 바꿀래? 내가 저 녀석을 맡을게.”
“…그냥 우리 둘이 하면 안 돼?”
민하연이 말한 의미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있을 것이다.
이기심, 애정…. 하지만 그렇다고 저 여자들을 버릴 필요도 없다.
저 여자들에게 종속이 걸려있는 한 내가 명령하면 민하연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
나는 민하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도출된 결론은 내가 한여름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너 그 여자들이랑 무슨 짓 할 거 같아.”
“….”
민하연의 촉이 바싹 오른 상태에서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조만간 성벽 빨리 작성하든가 해야겠다. 무서워서 원….
그렇게 나와 한봄… 그리고 역대급 병신 회귀자와의 가슴 벅찬 모험이 시작되었다.
***
한봄은 성수호와 한여름의 사냥을 한동안 보더니, 한여름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
“뭐가?”
한봄은 한여름의 의문에 답하지 않고 성수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저… 아저씨, 잠시 얘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
“그래요.”
“야, 잠깐 와봐.”
“…? 뭐야? 갑자기?”
한봄은 한여름을 데리고 성수호와 떨어진 곳까지 끌고 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 너 진짜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돼.”
“아니, 아까부터 뭔 소리인지 제대로….”
“너 지금 실력으로 어떻게 여기 헤쳐나가려고?”
“….”
한여름에게는 회귀가 있었다.
비록 포인트와 아이템은 계승되지 않지만, 능력치는 계속 계승된다.
그가 현재 찌질하게 굴더라도 능력치만큼은 계속 쌓이게 된다.
즉 언젠가는 강해진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문제는 그 언젠가가 너무 허황하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문제다.
누구는 하루 만 포인트를 벌기 위해서 피땀 흘려서 노력하는데, 누구는 결투 한방에 몇백만 포인트를 손쉽게 챙기고 있었다.
정말 손쉽게.
‘씨발 그게 나여야 한다고! 저런 병신이 아니라!’
한여름은 이번에 회귀하고 나서 성수호처럼 한방의 이득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워낙 노력해본 적이 없던 한여름인지라 머리를 굴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그에게 운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필드에서 돌아다니는 몬스터에게는 변변찮은 아이템들만 나올 뿐이었다.
‘저 새끼… 도대체 뭐하던 놈이야….’
한여름은 그 순간 한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여름에게 한봄의 얼굴은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얼굴이었다.
반항심이 깃들고, 말도 안 듣고, 언제나 잔소리를 하면서 발길질을 하기 일쑤였다.
괴팍하고, 남자라고는 전혀 모르던 여동생은….
(아저씨가… 제 첫 경험 상대가 돼주세요.)
“씨발!!!”
“욕 좀 하지 말라고!”
“으드득!”
한여름의 내면은 자기도 모르게 여동생을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민하연이 변한 이유는 한여름에게 남아있던 쥐똥만 한 양심으로 인지는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바람을 피웠던 죗값이라고 양심이 조금씩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봄은 아니었다.
한봄이 성수호와 조를 짜더라도 한여름이 불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절대 성수호에게 티끌의 호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봄… 네가 도대체 왜!’
한여름은 사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몰랐다.
한봄이 하는 행위를 멈춰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고, 마을 밖으로 뛰쳐나가서 몬스터를 만나 자살했다.
한여름의 침묵에 한봄은 한숨을 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이대로는 진짜 위험해.”
“….”
“솔직히 지금 너 여기서 혼자 사냥하는 것도 벅차. 거기다 지금 이 정도인데 나중에 가면? 더 심각해질 거야.”
한봄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니, 차고 넘쳤다.
그나마 회귀가 있어서 이 정도였다.
전 회차에서 필드 몬스터 한 마리를 잡는데 몇십 분이 소요되기도 했다.
그런데 성수호는 단 두 방.
대부분 화살 두 방만 쏘면 몬스터들이 죽어 나갔다, 심지어 잘 맞으면 일격사를 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몇십 분과 몇 초.
너무 격차가 심했다.
‘이대로는 회귀해도 문제야. 씨발 저런 새끼한테 계속 굴욕을….’
아무리 회귀로 극복하려고 해도 정도가 있었다.
눈앞에 결승점이 보이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 회귀할 때마다 성수호에게 굴욕을 당해야 한다?
아직은 버틸 수 있었지만, 언제나 이렇게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한여름도 장담하지 못했다.
한봄은 그를 보면서 설득을 시작했다.
“…일단 굽히자. 여기서 살아 남아야 하잖아….”
“씨발… 웃기지 마!”
“그럼 내가 굽힐게.”
“뭔 소리야?”
한여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봄은 그렇게 넋 놓는 한여름을 놓고 성수호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면서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 저희 오빠 좀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싸우는 방식을 가르쳐달라고요?”
“네… 염치없는 거 알지만 부탁해요.”
한봄은 내게 다가가서 부탁했다.
그녀의 부탁은 한여름의 싸움 방식을 좀 지도해달라는 것이었다.
레벨로 궁술을 올린 자와 그동안 경험으로 쌓아온 자의 실력은 크게 차이가 없다.
만약 솔플만 한다면 크게 다른 양상을 띄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팀플….
가령 두 명이 있고 궁술 레벨이 10으로 같다고 해도 싸움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레벨로 올린 궁술이 사고방식까지 올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야 레벨이 높으면 그만큼 여유가 생기고, 팀플레이도 수월해지기는 할 것이다.
다만 한여름은 그런 것과 별개로 레벨도 낮고 팀플도 못한다.
한봄의 부탁은 레벨을 어떻게 못 해도 쓸만한 놈처럼 보이게는 해달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