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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불침번이 끝나고 다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일어나서 모였다.
모임의 주최자는 양지현이었다. 그녀는 던전 진행에 대한 인원 분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지현이 인원 배정을 완료하자, 한여름이 대뜸 소리를 치며 이의를 제기했다.
“안돼!”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 하여튼 안돼! 한봄이랑 민하연은 무조건 나랑 가고, 나머지가 알아서 정해.”
“….”
이유도 뭣도 없는 떼를 쓰는 것뿐이었다.
양지현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한여름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평소에 눈치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던 한여름도 한꺼번에 시선을 받자, 당황해서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처… 처음 인원대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누가 물어봤어?”
한여름의 변명에 비아냥거린 건 다름 아닌 한봄이었다.
다들 잠을 적게 자서 예민한 상태인 데 반해서 한봄은 다른 사람들보다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한봄의 말에 되려 적반하장으로 한여름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뭐!? 너 나한테 말을 그딴 식으로….”
“넌 지금 무릎 꿇고 죄송하다고 해도 모자랄 판이야. 장난해?”
한여름은 불침번 때에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그 대신 성수호가 그 자리를 도맡아서 채웠다.
비록 불침번을 잠으로 보내긴 했지만….
“씨발, 잠 좀 잘 수 있지. 그거 가지고 계속….”
“봄아, 그만해….”
한여름의 말을 끊고 말을 이은 건 민하연이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민하연의 표정을 읽지 못한 한여름은 그녀를 향해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봐, 하연이는 이해하잖아. 잠 좀 깨지 못한 걸로….”
“한여름 이 새끼는 그거 평생 못 고쳐. 그냥 봄이 네가 포기하는 게 좋아.”
“…뭐?”
한여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민하연을 뚫어지게 봤고, 민하연은 차디찬 표정으로 한여름을 보면서 말했다.
“…뭘 봐?”
“…허… 허…. 너 무슨 말을!”
한여름이 얼굴을 붉히며 민하연에게 화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좀 해요!”
“아… 진짜 짜증나….”
“그냥 이분 놓고 가든가 하죠….”
지금 한여름을 애물단지처럼 말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미녀 삼인방이었다.
박선희, 손혜은, 박진희는 예민한 표정을 지으며 한여름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 나,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해!?”
“그럼 뭐 어쩔 건데요? 결투라도 해볼래요?”
“이… 이익!!”
한여름은 박선희의 입에서 나온 결투라는 말을 듣자, 눈보라 속에 파묻힌 것처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뇌가 아닌, 몸에 각인된 공포로 인해서 본능적으로 떨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야… 무서워요?”
“아… 찌질해….”
“이, 이! 씨발! 해! 하자고!!”
얼떨결에 박선희와 한여름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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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와… 이건 좀 심한데요?”
여유롭게 칼집에 칼을 집어넣고 있는 박선희가 한심한 눈으로 한여름을 쳐다봤다.
한여름은 바닥에 나뒹굴면서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었다.
“이런 씨발!”
“하아… 좀 얌전히 좀 있어라….”
그나마 이 자리에서 그를 안쓰럽게 보고 있던 한봄이 다가가서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결투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끝났다.
박선희가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게 아니었다.
한여름의 실력이 너무 형편없던 것뿐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자세부터 상대편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 대한 두려움.
전투에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런 씨발… 감히… 감히 네가 나를 이런 식으로 공격해?”
“와… 0층에서 좀 친해졌다고 이제 막말도 하네요?”
박선희는 한여름이 처음 콜로세움에 왔을 때, 누구보다 먼저 와서 말을 걸었던 여자였다.
적극적이며 당돌한 기세를 풍기는 여성이었다.
한여름이 0층에서 마지막 회차를 제외하고 언제나 처음 껴안은 여자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에 있었던 회차의 일일 뿐이었다.
지금 한여름은 여기 있는 여자들과 몸을 섞기는커녕 방해꾼 취급을 받으며 귀찮게 하는 멍청이 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한여름의 머릿속에는 분노와 고통, 창피함이 물감처럼 뒤섞이기 시작했다.
‘가만 안 두겠어! 개 같은 년!’
한여름은 속으로 울분을 삭이면서 한봄이 사용하는 회복 스킬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한여름이 회복을 받는 모습을 본 양지현이 다시 이야기를 진행했다.
“어쨌든 인원은 그대로 가겠습니다. 인원을 자유롭게 조정하고 싶으시면 그만한 실력과 책임감을 갖춰주세요. 실력도 없으면서 무책임하게 다른 파티원 고생시키지 마시고요.”
“으윽… 시발….”
팔짱을 끼고 냉철하게 말하는 양지현의 말에 기가 죽은 한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실력도 없고, 거기다 잠자느라 불침번도 서지 않았다.
한여름이 한 행위는 민폐라는 단어로도 부족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와서 치료해주는 한봄을 힐끔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성수호 새끼만 죽으면 돼. 그 녀석들 분명 성수호를 제외하고는 다른 녀석은 안 건드린다고 했으니까….’
한여름이 혼자서 속으로 계산하는 동안 한봄이 치유를 마치고 어깨를 '탁' 치면서 입을 열었다.
“치료 다 됐어. 제발 쓸데없는 자존심 좀 세우지 말고….”
“….”
“일단 일어나.”
한봄은 그나마 가족애로 한여름의 상태를 봐주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밥 먹고 출발해야지. 니가 도대체 내 오빠냐? 동생이냐?”
“….”
한봄은 한여름을 놓고 투덜거리며 아침 준비를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무리로 들어갔다.
한여름은 그런 한봄을 보면서 생각했다.
‘한봄… 미안하다. 이번 회차만… 널 좀 이용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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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가 끝난 뒤에 한여름은 한봄을 몰래 불러서 물건을 건네줬다.
“…? 이게 뭐야?”
“하나는 실명탄이라는 아이템이랑 나머지 하나는 특수 단도야.”
한여름은 두 가지 아이템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실명탄은 상대를 맞추면 긴 지속 시간 실명시키는 연막 같은 것이고, 단도는 찌르면 상처가 낫지 않게 저주를 거는 특수 무기라고 설명했다.
“단도는 설명을 보니, 일회용이더라.”
“뭐야, 그걸 어디서 났냐?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주는데?”
“몬스터한테서 나왔어. 혹시 위험한 상황 오면 쓰라고.”
“…너, 약 먹었냐?”
한여름은 인상을 찡그리며 쳐다보는 한봄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보면서 나무랐다.
“내가 걱정하면 안 되냐?”
“…네가 웬일이냐.”
한봄은 평생 한여름에게 선물은커녕 축하한다는 말조차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가족이 위험해도 자기 자신부터 지키는 철저히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이제와서 이렇게 주는 선물을 기쁘게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징그러울 뿐.
‘이 새끼 징그럽게 왜 이래?’
되려 도움을 받는 것이 꺼려질 정도로 사이가 벌어진 상태였다.
비록 민하연이 떠나는 것을 막고 싶어서 한여름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봄의 이기심이었다.
‘…정말 바뀌려는 건가? 지금 와서?’
안타까우면서도 한심해 보였다.
‘병신…. 좀만 빨리 깨달았어야지.’
한봄은 어느 순간 민하연만큼 성수호라는 인물도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자기가 원해서 그런 마음이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그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질 줄 알았겠냐…. 어쩌냐 한여름…. 하아… 그래도 가족인데….’
빈정대는 것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계속 피어올랐다.
한봄은 건네받은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보지 않고 바로 인벤토리에 넣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날렸다.
“고맙다. 위험하면 바로 사용할게. 후우….”
한봄은 그렇게 감사를 표하면서 손부채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한여름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덥냐?”
“아… 뭐 알잖아. 나 습한 곳에서 더위 많이 타는 거.”
비록 일어나자마자 아침밥을 먹고 정리한 게 전부였지만, 어느새 한봄의 목덜미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저씨한테 마법 좀 써달라고 해야겠다.’
한봄은 손부채질하면서 성수호 쪽으로 향하려는 찰나였다.
“야, 마셔라.”
“응?”
한여름은 작은 생수통을 한봄 쪽으로 들어 올려서 보여줬다.
“뭐야?”
“뭐긴 물이지.”
“됐어. 나 우유 있어.”
한봄이 인벤토리에서 우유를 꺼내서 마시려는 순간 한여름이 한심한 듯이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너 이제 끝났다니까. 우유 마셔도 소용이….”
“…씨발 뒤지고 싶냐?”
순식간에 발현한 한봄의 살기에 한여름은 주춤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한여름도 사실 한봄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녀의 심기가 아니었다.
“너 계속 땀 흘리잖아. 우유 같은 거 마시면 그거 땀 냄새도 역해지잖아.”
“…냄새나?”
“애초에 너한테 좋은 냄새가 나냐? 그나마 물을 마시면 낫다는 거지.”
“씨발 새끼가….”
사실 한봄도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여자들이 한여름을 체취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타인의 기준이다.
한봄도 한여름에게 나오는 체취가 역하다는 것 말고는 도저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게 불가능했다.
남매 사이에 좋은 냄새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봄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인가 성수호가 담겨 있었다.
‘아씨…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살아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혹시 지금까지 냄새 때문에 기분 나쁘거나 한 거 아냐!?’
한봄도 한여름과 피가 섞여 있다 보니 딱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들을 자극하는 체취를 풍기는 한봄이었지만, 남자에게 관심도 없었고 발레를 제외하면 현대에 살면서 딱히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단 우유는 넣어놓자.’
한봄은 가슴에 대해 창피함보다 체취에 대해 창피함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후… 덥다. 일단 줘봐.”
“….”
한여름은 한봄에게 생수를 건네주면서 속으로 간청하듯 외쳤다.
“제발 보지 마…. 물병 정보 보지 마라….
그녀는 순간 한여름이 가지고 있던 물을 받아서는 벌컥벌컥 마셔댔다.
한봄은 생수를 전부 들이켜고 나서 한마디 했다.
“푸하… 살 거 같네…. 물… 더 있냐?”
“자….”
한여름은 한봄에게 물이 담긴 생수를 몇 개 건네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한봄…. 그 새끼만 죽으면…. 그 뒤에는 내가 너한테 진짜 잘해줄게. 그러니까, 부탁한다.’
나는 저 멀리 한봄에게 음료를 건네주는 한여름을 보면서 속으로 한탄했다.
‘…미친 새끼네.’
솔직히 설마 했다.
상대가 양지현이나 다른 여자들에게 환각제를 먹인다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동생이다.
한여름이 자기 여동생에게 환각제를 먹이고 있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계획대로 됐습니다.]
‘그러게…. 그런데 막상 저런 모습 보니까 불안하긴 하네.’
한여름이 여동생한테 환각제를 먹일 정도면 딱히 한봄이 어떤 일을 당해도 관심을 안 가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모니아는 내 의구심에 의한 걱정을 바로 씻어주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여름은 상대가 수호님이기에 걱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100명을 넘게 죽인 날, 한여름은 내가 한봄과 팔을 잡았을 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낌새가 사라져버렸다.
아르모니아는 그 낌새가 사라진 이유가 바로 한봄이 내게 접근한 다음 유혹하고 그걸 빌미로 민하연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할 계획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했다.
‘하긴… 저번에 생뚱맞게 자기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서 당황하긴 했지.’
그냥 대화 좀 나눴을 뿐인데, 갑자기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했던 한봄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한여름은 한봄을 믿고 있습니다.]
‘…? 무슨 소리야? 믿고 있다니?’
[한봄이 수호 님에게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느껴졌습니다.]
아르모니아의 생각은 한여름이 평생 한봄을 봐왔고,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애정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평생 남자 혐오를 보여준 한봄을 믿는 것이다.
민하연은 넘어가더라도 한봄이 넘어갈 일은 아예 상정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호 님에게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걸 잘 이용하면 한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뭐,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네. 그런데 만약 계획대로 되면 실명탄이랑 저 단도가 문제네.’
일단 둘 다 일회용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다만 두 아이템이 이런 저단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물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양지현한테 상태 이상 해제랑 저주 해제 아이템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급하면 에넬로 치료를 해보겠습니다.]
‘아 혹시라도 저주는 가능해도 놔둬 줘.’
실명은 어떤 경우든 일단 치료해야 한다. 심봉사 상태로, 밖에 있는 놈들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에 비해서 상처 치유 불가 저주는 상황에 따라서 치료할지 말지 결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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