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저래?’
나는 갑작스럽게 태도가 변한 한봄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 일어나고 나서 수로가 나뉘어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가끔 눈을 마주치고 웃던 한봄이 갑자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확실한 건 화가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나라는 것이다.
‘한여름, 그 새끼 또 이상한 말 했나?’
내 기준에서 그것 말고는 한봄이 갑자기 나에 대한 태도가 돌변할 이유가 없었다.
과연 한여름이 무슨 말을 했길래 저럴까….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만약 강간범이라고 말했으면 아웃이지 뭐 ㅋㅋㅋㅋㅋㅋ
“망할….”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그런데 막 진짜로 싫어하고 그런 느낌은 아닌데?
“오….”
저 양반 촉은 왠지 믿을만했다.
이런 쪽으로 눈치는 기가 막힌 양반이니까.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남자 혐오 있는 녀석치고는 너를 괜찮게 생각하는 듯
“그런데 남자 혐오가 있으면 남자인 저를 괜찮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저 남자 혐오를 없애려고 거리를 가깝게 좁히기는 하고 있지만,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ㄴㄴ 남자 혐오도 종류가 있음
본인 말로는 선천적으로 기질을 타고나는 여자도 있고, 후천적으로 기질을 타고나는 여자도 있다고 한다.
또 하위분류로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아니면 복합적이거나 여러 가지가 있다고….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내가 볼 때, 저 애가 가진 남자 혐오는 그냥 꺼리는 수준이야. 거기다 본인도 그런 감정이 있는 게 싫어하는 느낌인데.
“모호한데요….”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원래 그런 게 다 애매모호해 ㅋㅋㅋㅋ 어디까지나 단편화한 것뿐이지, 어떤 사람은 코털 하나 뽑아도 죽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팔다리 잘려도 살아남기도 하잖아. 그런 거야.
비유가 대단하군….
나는 나란히 걷고 있는 한봄을 힐끗 봤다.
또 슬슬 열이 오르는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안타까워서 나는 바람 한번 날려줬다.
“히읏! 깜짝이야!”
“괜찮아요?”
“…흥.”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
..
양지현의 말에 의하면 이 던전은 이제 마지막까지 따로 다시 만나지 않고 끝까지 가게 되는 구조라고 했다.
즉 한봄과 나는 다음 날 저녁까지 단둘이서만 있을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ㅋㅋㅋㅋㅋㅋ나한테 묻지 마 나도 이제 갈피를 못 잡겠다.
아까까지는 츤데레 마냥 흥흥거리던 한봄은 어느 순간 나에 대해서 계속 묻기 시작했다.
‘여기 오기 전에 뭐 했어요?’, ‘직업은요?’, ‘살던 곳은요?’… 등등 이 잡듯이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한테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애가 갑자기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왔다.
일단 내가 성심성의껏 대답해줬지만, 딱히 원하는 대답을 들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가 물어봤다.
“한봄 씨는 밖에서 뭐 하셨어요?”
“…뭐 했을 거 같아요?”
내 이야기는 열심히 들어놓고 자기 이야기는 알아맞히란다.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ㅋㅋㅋㅋㅋㅋ 자기 이야기는 수수께끼냐 ㅋㅋㅋㅋ
나는 바로 한봄의 기질을 확인했다.
눈에 띄는 건 제일 앞에 있는 -[무용]-이었다.
무용 기질을 확대해서 나온 건….
-[발레 LV 32]-
‘오… 체형을 보니까, 확실히 발레랑 어울리네.’
마른 체형에 예쁜 외모, 적당한 머리 길이.
거기다 발레 레벨이 저 정도라는 건 그쪽에서는 나름 재능있는 인물 취급받는다는 것이다.
비록 이쪽 세계에서 발레는 무용지물이지만….
나는 골똘히 생각하는 척하며 그녀를 뚫어지게 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몸이나 구경해보자.
막상 한봄도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니, 당황하면서 몸을 살짝 비틀면서 경계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발레 했을 거 같네요.”
“어!? 어, 어떻게….”
당황하는 한봄을 향해서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찍은 건데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왠지 한봄씨랑 잘 어울려서요.”
나는 뒤에 예뻐서라는 이유를 대려고 했다.
일단 발레리나라는 게 미모가 출중해야지 할 수 있는 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반격이 들어왔다.
“와… 지금 나 가슴 작다고 약 올리는 거예요?”
“????????”
저건 또 뭔 소리야….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ㅋㅋㅋㅋ존나 웃긴 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하나도 안 웃긴데요?
나는 열불을 내는 한봄을 보면서 아르모니아에게 물었다.
‘아르모니아… 쟤 왜 저러는 거야?’
[정확한 건 아니지만, 발레리나라는 직업이 작은 가슴을 선호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 게임에서는 거유 많던데.’
[…그건 게임입니다.]
중독자 취급하지 말라고….
나는 아르모니아의 말을 듣고 대강 상황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완전히 이해하는 건 힘들었다.
왜 하고 많은 것중에 발레랑 가슴이랑 갑자기 연관을 짓는 건지….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됐어요! 빨리 가죠. 짜증나….”
“….”
시방….
..
..
결국 한봄과 나는 다음 안전지대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여기서 텐트 치고 자야 할 거 같아요. 지금 시간이 이미 밤 10시에요. 더 이동하다가 쉴 공간을 못 찾으면 난감할 거 같아요.”
“….”
한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나를 한참 노려보고 나서 텐트를 만들고 쏙 들어가 버렸다.
돌겠군….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내가 볼 때 쟤가 알아서 남자 혐오 잘 막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남자 혐오 돌파 감염 걸린 듯
“…채널 닫을게요.”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아아아앙!!! 닫지마!!!!
나는 위그드라실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채널을 닫은 뒤에 한봄의 텐트를 유심히 봤다.
‘큰일인데…. 이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감을 못 잡겠네.’
[제가 봤을 때는 침몽을 잘 활용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이 제일 설득력있었다.
성격이 사방팔방 튀는 한봄을 그나마 조심히 관찰하고 빈틈을 찾아낼 수 있는 건 침몽뿐이었다.
‘…잠깐.’
[…?]
‘한번 자기 전에 강제로 침몽을 걸어보자.’
예전에 레나에게 침몽을 걸 때, 자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걸었다가 독특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잠자리에 들지 않은 상대에게 침몽을 강제로 걸면 상대방이 자각몽을 꾸는 그런 것이었다.
‘일단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해보자.’
분명 자각몽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를 보면 자신이 가진 마음을 거침없이 나한테 털어놓을 것이다.
꿈이니까 전혀 거리낌이 없어질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아까 일 보복한다고 존나 패거나 하지는 않겠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
때리는 건 괜찮다… 잔인하게 죽이지만 말아줘라….
나는 텐트를 만들어서 들어간 뒤에 한봄에게 침몽을 걸었다.
***
한봄은 순간 놀라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응? 뭐야? 여기 어디야?”
한봄은 조금 전까지 텐트에 누워서 성수호의 실루엣을 보면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가슴 콤플렉스가 끓어올랐고, 쓸데없는 곳에서 터지는 바람에 자기 자신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녀는 텐트 안에 누운 상태로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갑자기 시야가 암전됐고, 자신이 있는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인가 익숙한 장소였다.
“…어? 연습실이네.”
과거에 한창 발레를 하던 한봄이 국립발레단의 연습실이었다.
한봄은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오…. 꿈인가? 신기하네?”
평생 자각몽을 꿔본 적 없던 한봄에게 지금 이 현상은 신기함 그 이상이었다.
거기다 다시는 입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발레복을 입고 있었다.
“…존나 힘들긴 했지만, 진짜 즐거웠는데.”
한봄은 발레 연습을 최선을 다해서 연습했고, 어린 나이에 국립발레단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외모, 체형, 기량, 노력… 모든 게 완벽했다.
단 하나만 빼고….
“씨발, 내가 땀이 나고 싶어서 나냐고….”
성인이 되면서 체질의 변화로 갑자기 더위를 타는 체질로 변한 것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단 하나의 오점이 그녀의 발레 생활에 막을 내리게 했다.
“뭐… 그렇다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봄은 발레복을 입은 채 서서히 움직이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발레라고 하면 밝은 분위기에 하하 호호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달랐다.
엄격한 훈련, 어느새인가 염증이 올라와 있는 다리, 하반신 경련, 실수 한 번으로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공연.
분명 힘든 기억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기에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더 높은 곳을 올라가 보고 싶었고, 더 멀리 뻗어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발레 생활은 22살에 막을 내렸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마치 단독 공연을 하듯 현란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간 춤을 추고 나서 마무리 후에 한봄은 마무리 인사까지 마치고 허리를 폈다.
그녀는 손을 펴고 쥐는 것을 반복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와, 진짜 쩐다.”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 웬 한 사람이 연습실 밖에 지나가는 것을 봤다.
“어…? 분명….”
그녀는 발레복은 입은 채 문밖으로 나갔고, 방금 지나간 자의 뒷모습을 보고 바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저씨?”
한봄은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성수호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도 내 꿈에 등장하지 않았나? 거참….’
생각해보면 한봄이 성수호를 의식하게 된 건 그를 꿈에서 보고 나서였다.
울고 있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일으켜 세워주던 아저씨.
그렇게 꿈속에서 친절했던 그를 보니, 강간범이라는 것을 알아도 도통 나쁜 사람으로 비치지 않는 것이었다.
‘아까는 내가 너무 오버했는데. 어떡하지….’
민하연에게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시험해보고 싶다고 말한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일이 틀어졌다.
그것도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쯧, 어차피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이따 일어나면 사과를 하든가 해야지.’
한봄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성수호를 따라갔다.
그렇게 그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곳은 단체 연습실이었다.
“자, 한봄 늦었다! 빨리 자리에 서도록!”
“네!”
40대 정도 되는 여성의 외침에 한봄은 순간 기합을 내며 몸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섰다.
‘와씨… 단장님은 꿈에서 봐도 존나 무섭네….’
한봄은 자각몽인데도 불구하고 단장의 명령을 자동으로 따르고 있었다.
단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 모인 것을 확인하고 무게를 잡으며 이야기를 진행했다.
“여기 오신 남자분은 오늘부터 마사지 전담 트레이너를 담당해주실 분이시다.”
다들 박수와 함께 맞이해줬고, 그건 한봄도 마찬가지였다.
‘오호… 이렇게 된 거 한번 마사지 좀 받아볼까?’
어차피 꿈속에서 고된 훈련을 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마사지를 받는 건 별개였다.
‘어차피 꿈속이고 저 아저씨는 괜찮을 거 같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전부 사라지고 성수호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한봄은 감탄한 채 주위를 보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나중에 이런 거 꾸면 한여름 줴패는 꿈 한번 꾸고 싶다.’
그녀가 가진 평생의 소원이었다. 한여름을 죽이지 않고 평생 패는 것.
한봄은 그렇게 다짐하면서 성수호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아까 그 아저씨랑은 다른 사람이니까, 괜히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겠지.’
한봄은 성수호의 앞까지 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저, 상체 쪽이 너무 뻐근해서 그런데 한번 봐주실 수 있나요?”
“아… 괜찮긴 한데, 제가 발레리노(남자)분들 전담으로 온 거라서요.”
“괜찮아요. 그냥 해주세요.”
한봄은 성수호가 한 말의 의미를 대충 파악했다.
하지만 딱히 꿈속에서 거부감을 느낄 일도 없었고, 한봄도 그냥 꿈속에서 마사지 받으면 어떨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성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매트 위에 누워 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