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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 더워….”
한봄은 두 사람이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는 간간이 티셔츠를 펄럭이며 더위를 식히면서 아까 성수호가 써준 마법이 떠올렸다.
‘그 아저씨 진짜 괜찮은 사람 같은데…. 솔직히 저 새끼보다 훨씬 나은데.’
인간적으로 나름 끌림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한여름과는 정반대였다.
한봄은 선두에 있는 민하연에게 달라붙어서 주절주절 떠드는 한여름을 바라봤다.
“하연아! 너 나랑 사귀면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나한테 대할 수 있어?”
“아니… 내가 말했잖아. 사귀는 건 그대로 하고 다른 사람이랑 만나자고.”
“그게 말이 돼!?”
“너는? 너도 다른 여자 만났잖아.”
한여름의 호통에 민하연은 어이가 상실한 표정으로 그를 보면서 비아냥거렸다.
한여름은 순간 말문이 막혀서 계속해왔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시전했다.
“나, 남자랑 여자랑은 다르지!”
“와…. 미치겠네.”
민하연은 어이가 없는 듯 허탈하게 웃으면서 한여름을 무시하고 걷기 시작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기, 기다려!”
한봄은 한여름의 한심한 모습을 보면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병신인가. 무릎 꿇고 싹싹 빌라고 했더니 또 머저리 짓을 하고 자빠졌네.’
한봄은 일부러 두 사람과 거리를 두고 이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만의 시간이 증가할수록 두 사람의 관계를 점점 더 악화하는 게 눈에 보였다.
입장상 한여름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한봄도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그는 애초에 여자에게 매달리거나 사과를 해본 적이 없던 인간이었다.
‘기대했던 내가 병신이지.’
한봄은 슬슬 지쳐가는 중에 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냥 내가 그 아저씨랑 친해지면 하연이 언니도 계속 같이 있게 되지 않을까?’
나쁜 사람이냐라는 범주를 넘어서서 괜찮은 사람 같았다.
도저히 강간범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아냐, 씨발… 그래도 그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아무리 좋은 사람이다,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속으로 되뇌다가도 강간범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서는 순간 도저히 그를 좋게 생각할 수 없었다.
한봄은 티셔츠를 펄럭이면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나한테는 별 관심 없어 보이던데.’
그녀는 얇은 티셔츠에 속이 다비치는 상태였다.
거기다 핫팬츠.
사실 그녀는 순전히 더위를 많이 타다 보니 이런 복장을 자주 입는 편이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런 복장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 성수호는 딱히 한봄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피하면서 바람을 만들어 줄 정도였으니까.
‘…씨발, 좀 짜증 나는데?’
평생 강간범을 옆에 두는 일이 없었다.
그런 강간범이 민하연은 짐승처럼(한여름에게 들은 이야기) 덮쳤으면서 자신에게는 눈 하나 돌리지 않았다.
‘설마 가슴 없으면 여자 취급 안 하나? 아, 존나 빡치네….’
한봄은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며 슬며시 주물렀다.
당연히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런데 그 감흥 없는 행동이 계속 이어질 때마다 한봄의 머리는 점점 더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
..
한봄 일행은 수로를 진행하다가 수로의 교차지점에서 다른 멤버들과 합류했다.
“아!”
“다행이네요. 통로가 중간중간 마주치게 설계가 되어 있나 보네요.”
다들 모여서 반가운 눈치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봄만 조용히 성수호를 바라봤다.
“….”
한봄은 자기가 생각해도 화의 근원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상대는 강간범이고, 남자에게 호감이 없는 한봄에게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봄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가 자꾸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진짜 가슴 작다고 아예 여자라고 생각도 안 한 거야? 와, 개 짜증 나네….’
차라리 평범한 남자가 저렇게 행동했으면 별 감흥이 없을 법했는데, 강간범이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을 때, 양지현이 모두를 모아 두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지금 시간이 너무 어중간하네요. 좀 더 진행해야 할 거 같아요.”
“하긴… 아직 점심시간 정도밖에 안 됐으니, 말씀대로 더 진행해봐요.”
“대신 이번에는 조를 바꿔보죠.”
“네?”
양지현이 제안한 편성은 아까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한봄과 양지현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었다.
분명 일리 있는 제안이었다.
힐러인 한봄과 연금술사인 성수호가 같은 라인으로 가면 일단 포션을 다른 라인으로 가는 조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수호는 애초에 포션이 필요 없었다.
성수호는 다치는 경우조차 없었으니, 사실상 혼자 가도 되긴 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한봄을 성수호에게 붙이자는 게 양지현의 의견이었다.
“이대로라면 아마 또 만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번 팀을 분배하면서 조율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음….”
긍정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민하연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민하연의 모습에 한봄은 결심하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언니.”
“응?”
“잠깐… 얘기 좀 해도 돼?”
“그래.”
한봄은 다른 파티원에게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수로 구석으로 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니… 저 성수호라는 남자 정말 좋아하는 거야?”
“으엥? 아… 그, 글쌔… 하하….”
민하연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쑥스럽게 대답했다.
이틀간 술자리에서도 성수호가 없을 때마다 한봄은 민하연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민하연은 지금처럼 대충 어물쩡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한봄이 다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언니… 나 들었어.”
“응? 뭘?”
“…저 남자가 언니 강간했다고.”
“….”
민하연은 눈을 지그시 감고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한여름, 이 미친놈이….’
민하연은 한여름이 설마하니 성수호의 강간 플레이까지 한봄에게 말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적당히 바람을 피웠다는 식으로 넘겨서 말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긴… 한여름… 내가 너한테 그런 걸 기대하는 게 멍청하겠지.’
남의 눈치는 쥐꼬리만큼 보지 않고, 자기 기분이 풀리는 게 최우선인 남자였다.
말을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민하연은 그 말을 들으니 한봄을 똑바로 보기 힘들어졌다.
이해시키려고 해도 과연 그녀가 이해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 아냐… 회귀를 어떻게 설명해…. 만약 봄이가 실수로라도 한여름한테 회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순간 수호가 정말 위험해질 수 있어.’
다른 건 몰라도 회귀 사실만큼은 숨겨야 했다.
그리고 그 회귀를 설명하지 않는 한 성수호와 민하연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고작 3일밖에 알고 지내지 않은 남녀가 친분도 쌓지 않고 뻥카를 위해 강간 플레이를 했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싶었다.
그렇게 민하연이 고민하고 있을 때, 한봄이 민하연의 손을 잡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나 언니가 누구를 좋아하든 괜찮아.”
“봄아….”
“분명 언니가 좋아하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그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
한봄은 그 후에 민하연을 슬며시 올려다보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확인하게 해줘. 진짜 괜찮은 남자인지….”
한봄의 말은 간단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성수호와 같이 있으면서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시험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민하연은 한봄의 말을 듣고 한참을 고민했다.
민하연이 한봄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성수호… 왠지 불안한데.’
민하연은 성수호를 사랑한다.
그건 절대 불변의 사실이었다.
그냥 친분이 생겨서 가까워진 사이가 아니었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위그드라실에 소환돼서 회귀를 거듭하며 서로를 도왔던 사이였다.
그리고 민하연이 계속 회귀에 휩쓸릴 때마다 그녀의 옆에서 위기 상황마다 도와줬던 성수호는 그녀에게 이미 마음 한가운데에 제일 중요한 인물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처음에 봄이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어.’
민하연은 한봄과 만났을 때, 단 1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성수호의 눈빛을 보고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성수호가 한봄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는 갔다.
한봄의 외모는 민하연이 생각해도 연예인들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예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적당히 넘어가 준 것이었다.
그냥 호감이 있구나 싶은 수준이겠지 한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루나라는 여자가 있으면서도 나한테 넘어왔잖아. 성수호… 봄이가 꼬시면 바로 넘어갈 거 같은데….’
민하연은 한여름과 지내면서 한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절대적인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민하연은 한봄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후… 아마 한여름한테 어떻게든 기회를 주고 싶은 거겠지?’
사실 민하연은 첫날부터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한봄이 자신과 한여름을 어떻게든 다시 엮어보겠다는 식의 의지를….
한편 민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 만약 한봄한테 넘어가면… 성수호…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으어어… 갑자기 오한이….
나는 몸을 한번 세차게 털면서 오한을 씻어냈다.
한봄과 민하연은 저 멀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양지현은 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할 정도로 곁눈질 한 번을 하지 않고 열심히 주위를 경계했다.
‘확실히 그런 집단에 있어서 그런가 저런 건 훈련이 잘 돼 있네.’
사람이라는 게 궁금해서라도 한번 흘깃 볼 수 있겠지만, 양지현은 전혀 나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한여름뿐이었다.
‘진짜 나를 어떻게든 죽이고 싶었나 보네.’
[어차피 회귀가 있으니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양지현의 말에 따르면 이 수로는 3갈래로 나뉘면서 진행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세 갈래가 나오는데, 그게 이 던전의 핵심이라고 설명해줬다.
‘두 곳은 마을로 가는 길… 한 곳은 완전히 동떨어진 외딴곳….’
두 마을이 가운데 마을에서 4시와 8시 방향에 있다면 나머지 한 곳인 외딴곳은 12시 방향이라고 설명해줬다.
마지막 수로를 통과할 때, 길을 잘못 들면 그쪽으로 텔레포트 되는 형식이라고 한다.
[수호님의 선택지는 없어 보입니다.]
‘…일단 양지현이 한봄이랑 엮게 해준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과연 한여름… 한봄한테 약을 먹일까?’
양지현이 부하들을 한여름에게 접선시켜서 내린 명령은 간단했다.
이 수로의 마지막 지점을 통과할 때, 나와 같이 가는 멤버에게 약을 먹이는 것이었다.
약의 효능은 환각 증세를 일으켜서 아군을 적으로 보게 만드는 약이었다.
음용하고 나면 대략 한 시간 후에 효과가 나타난다고 설명해줬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하물며 하급 포션도 손에 들고 정보를 확인하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환각제를 그냥 마시라고 하면 과연 누가 마실까?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남자는 한여름와 나, 단둘이다.
여자들이라면 자신이 내민 음료를 의심 없이 마셔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양지현의 계획은 마지막에 나와 한봄을 팀으로 만들어서 외딴곳에 떨어뜨려 놓으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외딴곳에서 마을로 향하는 3일 안에 한봄을 레드 소환사로 만들면서 나를 죽일 계획이었다고 한다.
한여름은 과연 나와 한봄이 팀이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과연 한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을까?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수호님.]
‘응?’
[어째서 계획을 막지 않으셨습니까?]
‘….’
양지현은 지금 내 수중에 들어왔다.
그녀는 웬만하면 내 말을 잘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딱히 그녀의 암살 계획을 막지 않았다.
(당장 통신해서 암살 계획을 중지시키겠습니다.)
(아니, 그냥 놔둬.)
(하, 하지만… 이대로는 부하들이 계획대로….)
(그러니까, 놔둬.)
(…?)
(실력 좀 한번 보자.)
(…!)
양지현은 내 말에 수긍하면서 걱정하는 눈치였다.
당연히 진짜 이유는 그딴 게 아니었다.
한여름이 어떤 뻘짓을 할지 보고 싶었고, 두 번째는 양지현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의심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었다.
‘뭐… 일단 인원수와 계획도 전부 알아냈고, 결국 우리한테 중요한 건 한봄이잖아. 좀 귀찮더라도 양지현의 계획이 나한테 도움이 되니까.’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죽였던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것을 상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알았어, 조심할게.’
외딴곳에 가면 일단 마을로 다시 돌아가는데 3일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그동안 한봄과 단둘이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떤 식이든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한여름이 만약 한봄에게 환각제를 먹이면….
‘저 쓰레기… 정말 쓰레기 짓을 할까.’
나를 노려보는 한여름을 같이 노려보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민하연과 한봄이 대화를 마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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