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녀가 제안한 술자리는 간단한 식사 자리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원래 한여름만 끼는 것을 예상한 듯했다.
한봄, 민하연, 한여름.
셋이 오랜만에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내가 끼기 전에는….
“….”
”….”
“….”
“….”
직사각형의 테이블에 나와 민하연, 한여름과 한봄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은 침묵계의 싱크로나이즈 국가 대표로 뽑혀도 될 정도로 완벽하고, 고요한 침묵의 흐름을 연기하고 있었다.
각기 침묵의 이유를 따져보자면….
민하연은 아까 내가 한봄을 뚫어지게 본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나를 곁눈 짓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토시오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민하연의 표정을 보고 공포에 질려서 즉시 저승행 티켓을 끊고 이승을 탈출했을 것이다.
한여름은… 저 녀석은 나랑 민하연이 같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에 빡친 거겠지.
아니면 그냥 내가 싫어서든가.
한봄은 예기치 않게 이 자리에 내가 껴서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원래 혼자 마을을 둘러보며 정보 좀 알아낼까 했는데, 민하연에게 잡혀서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이렇게 침묵이 유지가 되고 있었다.
나는 어색한 나머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있으니까, 오히려 불편해 보이네. 내가 자리를 빠지는 게….”
“앉아.”
“네….”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보면 내가 한봄을 음흉한 눈으로 본 줄 알겠네.
‘아니, 그냥 좀 본 거 가지고….’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않으셔서 문제였습니다.]
‘하아… 그래봤자 좀 흥미롭게 본 수준 아냐?’
[보여드리겠습니다.]
내 눈앞에 아까 내가 지었던 표정이 영상으로 출력되기 시작했다.
어… 존나 음흉한 표정이네.
‘…망할.’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에 나는 속으로 구시렁구시렁하며 불만을 토했다.
‘아니! 남자가 여자 좀 보는 게 문제 있어!?’
[실수라도 민하연에게 그 말을 하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사실 민하연이 나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는 건 청신호였다.
민하연의 마음에 나에 관한 생각이 크게 자리 잡았다는 증거니까.
다만 그 청(靑)신호가 패턴 청(靑) 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지금 내 마음속에 사도가 쳐들어와서 헤집는 기분이었다.
아르모니아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민하연을 보면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 민하연의 행동은 굉장히 좋은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게 계속 이어져서 훗날 한여름이 민하연을 포기하고 다른 여성과 연인관계를 구축하게 되면 곤란해질 것 같습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네.’
한여름이 다른 여자를 만난다? 그럼 나는 당연히 그 여자를 또 꼬셔야 한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한봄이 손뼉을 크게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짝!
“그러고 보니까 두 사람 일주일간 같이 있었던 거네?”
“그… 그렇지.”
한봄이 말한 두 사람은 민하연과 한여름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민하연은 한봄의 의미를 이해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한봄이라는 여자는 어떻게든 민하연과 한여름이 엮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대화를 주도했지만, 민하연과 한여름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선뜻 말하지 못했다.
민하연의 강간 플레이와 한여름의 전지적 찐따 시점이 두 사람 입에서 나올 리가 없으니까.
계속 대화를 주도하던 한봄은 포기하고 한여름의 옆구리를 툭툭 치고는 민하연에게 말했다.
“언니, 나 잠깐만 이 새… 애랑 얘기 좀 하고 올게.”
“응.”
한봄이 한여름을 끌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민하연은 내 팔뚝을 확 잡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수호야.”
“…응?”
“잠깐 얘기 좀 하자.”
…굳이 안 해도 알 거 같은데, 안 하면 안 될까?
***
한봄과 민하연은 서로를 가족 그 이상의 관계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비록 그 사이에 있는 한여름이 계속 엉망진창으로 꼬이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민하연과 한봄의 사이가 악화하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한여름 덕분에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한봄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이성이 한여름과 민하연을 떼어 놓아야 한다고 아우성치는 동시에 감성적인 부분은 그 두 사람이 헤어지지 못하게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한봄은 인간의 관계가 강가에 있는 물고기와 같다고 생각했다.
물줄기가 잔잔할 때는 같이 흘러가며 보듬어 줄 수 있지만, 갑작스러운 급류에 흩어지고 그 시기가 길어지면 다시 만나더라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생각한 것이다.
‘언니가 저 머저리랑 헤어지면… 나랑도 멀어질 거야.’
민하연도 여자고 만약 한여름과 헤어지게 된다면 다른 남자와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분명 민하연의 마음도 한봄과 멀어지고, 결국 한봄과 민하연의 관계는 다시 원상 복귀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설마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터질 줄은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한봄은 한여름을 끌고 여관 밖으로 나와서 닦달했다.
“야, 너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언니 왜 저래?”
“씨발….”
“미친 새끼야! 계속 욕만 중얼거리지 말고 말 좀 해보라고! 그리고 저 옆에 있는 남자는 뭐야? 왜 언니랑 저렇게 친한 건데?”
“하아….”
한여름은 절망을 띈 표정을 지으며 계속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이야기를 정말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뭐야? 이 새끼 진짜 무슨 일 있었나? 멍청하긴 해도 이렇게 병신처럼 굴던 녀석은 아닌데….’
평생 한여름을 옆에서 봐왔던 한봄 입장에서 한여름의 행동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외모와 운으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듯이 살아온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패배자처럼 머저리 같은 모습을 한채 끙끙대고 있었다.
한봄이 평생 본 적 없었던 모습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한여름은 크게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
한여름은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한봄에게 회귀 사실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다만 회귀를 제외하고 이번 회차에 있었던 일을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첫날 우연히 만난 연금술사, 그리고 그 연금술사에게 다가간 민하연.
그 후 결투, 보스전, 대기 마을에서 있었던 치욕적인 상황.
한여름은 자기가 겪었던 모든 상황을 한봄에게 낱낱이 이야기해 줬다.
다만 그는 자신의 시점에서 말을 이어갔고, 성수호라는 인물이 쓰레기인 것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리고 한여름이 이야기해 준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성수호)에게 민하연이 빠졌다는 사실을 한봄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내가 말하고 있는데도 나도 못 믿겠어!! 왜… 하연이가 저런 병신같은 놈에게….”
“….”
질질 짜고 있는 한여름을 보면서 한봄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언니가 왜 저런 남자랑….’
다른 것들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성수호에게 대하는 민하연의 태도였다.
한봄은 민하연이 평생 남자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건 한여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왔던 한여름에게도 당당한 태도로 대했던 민하연이었다.
그런 그녀가 외간 남자와 나란히 걸으며 꽁냥꽁냥하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다 두 사람이 저렇게 관계가 깊어진 계기가….
‘아니! 그게 말이 돼? 하연이 언니가 강간당했는데 저렇게 남자에게 빠졌다고? 무슨 삼류 영화 속에 이야기도 아니고….’
한여름이 해준 이야기를 들은 한봄은 도저히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회귀를 경험하고 있는 한여름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봄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봄은 한참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야… 너 하연이 언니 어떡할 거야?”
“크으… 성수호 그 개새끼 죽인 다음에….”
“병신아! 딴말하지 말고! 너, 하연이 언니 아직 좋아하는 거 맞지?”
“어… 좋아해.”
한봄은 한여름의 대답과 눈빛으로 그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봄에게 그가 아직 민하연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쓰레기라도… 가족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보다는 이 머저리가 훨 나아 보여….’
한봄은 가족이라는 정과 민하연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내면의 욕심이 피어오르며 입을 열었다.
“야… 여기 지내는 동안 내가 어떻게든 두 사람 떼어내 볼 테니까. 그 사이에 하연이 언니한테 계속 무릎 꿇고 싹싹 빌면서 용서해달라고 해. 알았어?”
“…이미 해봤어.”
“병신아! 한두 번 하는 걸로 되겠냐? 니가 지금까지 한 행동을 생각해!”
“…알았어.”
한봄은 주눅이 들어서 쩔쩔매는 한여름의 모습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나 욕으로 맞받아치면서 주먹다짐을 했던 남매였다.
‘멍청한 새끼… 왜 이렇게 됐냐고….’
한봄은 평생 원수라고 생각하며 지낼 줄 알았던 한여름이 약한 모습으로 나오니 한편으로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일단 들어가자. 오늘은 일단 적당히 대화만 하고 내일부터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어볼 테니까.”
“…고맙다.”
“하아….”
한봄은 입 밖으로 병신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려다가 참았다.
그녀는 평소라면 거리낌 없이 내뱉었을 단어도 축 늘어진 한여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봄은 한여름을 데리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 한여름과 한봄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민하연과 성수호는….
“봄이한테 눈 돌리면 가만 안 둔다?”
“누가 보면 내가 뭔 짓을 한 줄 알겠다….”
부부싸움에서 진 남편이 각서 쓰는 듯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민하연은 겉보기에 살벌한 말투로 성수호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한봄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민하연의 몸짓에서 애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봄은 한여름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여름, 이 새끼 혹시 나한테 말 하지 않은 거 있는 거 아냐? 하연이 언니가 강간당하고 저런 식으로 행동한다고?’
자신의 우상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던 민하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남자에게 몰두하면서 다른 건 다 내팽개친 여자 같아 보일 뿐이었다.
한봄의 시선에는 성수호가 들어왔다.
애초에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한봄의 입장에서 성수호에게 뭔가 매력을 느끼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개성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단… 저 남자를 어떻게 해봐야겠어.’
한여름과 한봄이 테이블에 다가가자 성수호와 민하연이 눈치채고 서로 모르는 척 대화를 단절했다.
한봄은 테이블에 앉으면서 살며시 웃고는 성수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제 이름은 한 봄이에요.”
“저는 성수호입니다.”
“이름 좋네요.”
한봄은 억지로 웃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으으으… 소름 돋아….’
한봄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남자 혐오가 깊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혐오도 사실 한여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없던 남자 혐오가 한여름의 바람기 덕분에 개화해서 지금 그녀를 오히려 괴롭힐 정도였다.
“어떤 분인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제 자주 같이 보게 될 거 같은데.”
“음… 특별할 건 없는데….”
“서로 잘 알아가면 좋잖아요.”
한봄은 그렇게 성수호를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엉켜서 잔 뒤에 다음 날 일어나서 한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포인트를 못 벌고 있다고?”
“응….”
지금 이 프리뭄 마을에 막 도착한 소환사들은 숙박 전쟁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나마 이 한 곳을 사수하면서 열심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그런 숙박 시설을 이용하는 것도 결국 포인트가 있어야지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실수로 빈방이 생겨버리고, 그곳에 외부의 한 녀석이라도 비집고 들어가는 순간 굉장히 위험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지내는 인원들이 모은 포인트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들 계속 사냥하고 있는 거 아냐? 거기다 한 방에서 여러 명이 지내고 있는데, 숙박비가 모자랄 리가….”
이곳의 1박 숙박비는 1,000포인트였다.
한 방에서 5명이 지내면 각자 200포인트만 내도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그게… 사냥터에서 사냥을 못 하고 있어.”
“…?”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자, 한봄은 우리를 데리고 직접 눈으로 구경시켜줬다.
..
..
민하연과 나, 나머지 파티원들은 필드에 나가자마자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무슨….”
주위에는 엄청난 수의 소환사들 우글우글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피룸도 나름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는 장소라고 생각했지만, 여기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필드에 몹은커녕 쥐새끼 하나 돌아다닐까 싶을 정도로 흙먼지와 사람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봄은 우리를 보면서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내가 말했던 단합… 기억해?”
“응, 기억해.”
“여기 있는 놈들 다 한패야. 여기 있는 놈들이 몬스터를 죄다 잡아버려서 우리들이 잡을 몬스터가 남아나질 않고 있어.”
“맙소사….”
한봄과 지내는 사람들이 포인트가 없는 이유는 그들이 나태하거나 겁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한봄이 지내는 여관의 멤버들이 돌아다니면 고의적으로 그들의 사냥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민하연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필드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서서히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 한 무리가 우리 쪽으로 껄렁껄렁 다가오더니 불쾌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야~ 어제 그 여자들이네?”
“캬… 미녀들끼리 잘 돌아다니네. 어때? 오늘은 내 방에 들어올 마음이 들어?”
“….”
어제 처음 들렀던 여관에서 시비를 부쳐왔던 남자들이었다.
게임 속에서 절대 빼먹을 수 없는 클리셰.
스토리 진행 중에 껄렁대는 녀석들이 등장해서 귀찮게 하는 장면은 어느 게임에서든 등장한다.
특히 NTL 게임에서 절대 빼먹을 수 없는 소재였다.
‘사실 NTL 게임에서는 내가 껄렁한 놈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대부분 내가 금태양이 되어서 오붓한 연인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빼앗는 경우지만.
[하지만 지금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걱정 하지 마, 그렇게 안 만들 테니까. 일단 확인이나 해보자. 저놈들 기질 좀 보여줘.’
내 말과 동시에 껄렁이들의 기질이 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