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142화 영웅의 여자를 빼앗는 방법 (2-10)
‘하아… 하필 갑자기 오늘 그런 꿈을….’
초서현은 잠에서 깨자마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성수호를 이끌고 교실로 향했다.
한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떨리는 다리가 그녀의 현재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하아… 요새 나오지 않아서 괜찮아졌나 싶었는데….’
아까 책상 위에서 자면서 꿨던 꿈이 강제로 그녀의 기억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없는 채찍질.
경멸과 증오가 타오르는 목소리.
이미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초서현의 몸은 그녀의 채찍질을 기억하고 있었고, 초서현의 정신은 그녀의 저주가 섞여 있었다.
초서현은 지워졌으리라 생각했던 마음의 상처와 저주가 다시 드리워지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저 사람은 왜 내꿈에 나왔데.’
초서현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성수호의 발걸음 소리에 홍미선에 관한 생각을 잠시 접을 수 있었다.
교단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
그런남자가 자신이 채찍질 당하는 모습을 노려보는 장면.
‘그때 보조 교관님들 매번 바뀌어서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런가….’
어떠한 보조 교관도 2개월을 넘긴 적이 없었다.
초서현은 홍미선의 성격을 맞춰줄 보조 교관을 구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교실 문을 열면서 초서현은 안도했다.
‘다행이야. 오늘은 뒷산 실전 훈련이니까. 애들 안전이랑 채점만 신경 쓰면 돼.’
초서현은 긴장을 풀면서 단상에 선 다음 성수호를 힐끗 봤다.
‘…오늘은 좀 잘 따라가려나?’
..
..
뒷산에 풀어놓은 괴수들을 사냥해보는 실전 훈련.
2개의 조가 정해진 루트로 산행을 하면서 전투를 하는 형식이다.
조마다 초서현과 성수호가 맡아서 안전과 채점을 책임지는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5조와 6조가 마침 중앙지점에서 만나서 쉬는 시간을 보냈다.
초서현은 먼발치에서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는 성수호를 보면서 생각했다.
‘체력 좀 올리면 정말 괜찮은 사람인데….’
초서현도 체력이 하루 이틀 만에 올라가는 게 아닌 것을 알기에 성수호에게 계속 잔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초서현 입장에서 성수호에게 도움받은 게 있다 보니 타박할 입장도 아니었다.
초서현은 숨을 몰아쉬는 성수호에게 장난치면서 위로나 해줄 겸 웃으며 다가갔다.
‘뭐, 궁술 실력이 그만하면 체력 정도는… 응?’
초서현이 다가가려는 찰나에 성수호에게 누군가가 다가갔다.
“쌤…. 괜찮으세요?”
“하아…하아… 괘, 괜찮아. 너도 가서 쉬어라…. 하아….”
“저는 쉬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성수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송아라가 있었다.
초서현은 송아라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쟨 저런 성격으로 나중에 길드 들어가면 손해 볼 타입 같단 말이지….’
초서현은 계속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냥 평범하게 생도와 교관이 이야기하는 모습일 뿐이고 특별한 것 없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오늘 악몽을 꾸었던 초서현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나도 저렇게 평범한 대화나 나눌 수 있는 교관님이 있었으면 달라졌으려나….’
초서현은 생도로 영사관을 다닐 때, 어떠한 교관과도 친해지지 못했다.
보조 교관들은 대부분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생도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정식 교관은 3년 동안 자신을 학대했다.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때, 송아라의 말에 초서현의 귀가 쫑긋하고 움직였다.
“쌤, 오늘도 활 쏘는 거 자세 봐주실 수 있나요?”
송아라의 말에 성수호는 간신히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휴우…. 나야 괜찮긴 한데, 내 실력은 가르칠 수준이 아니야.”
“에이, 개인적으로 연습하는 거라 괜찮아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초서현은 처음 성수호를 만났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무기 지급 때, 송아라한테 당연한 듯이 활을 줬었지?’
무기 지급 당시에 성수호가 유일하게 잘못 건네준 인물이 송아라였다.
주무기가 검인 송아라에게 당연한 듯이 활을 줬던 성수호는 당시에 잘못 건네준 거라고 타박하자,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송아라를 보던 것이 기억났다.
‘흠… 아, 휴식 시간 끝날 때 됐네.’
성수호가 숨을 다 고를 때쯤이 되자, 휴식 시간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성수호는 생도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송아라를 보면서 말했다.
“나 같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 많다. 제대로 배우고 싶으면 나 말고 정식 교관님을 찾아가 봐라.”
“….”
초서현은 성수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그를 실망하고 있었다.
‘남는 시간에 좀 가르쳐주면 덧나나? 저 사람도 그런 건 또 귀찮아하나 보네…. 다른 교관이랑 다를 게 없어.’
초서현은 그동안 그에게 품어왔던 고마움이 한순간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생도를 내치는 모습=에 그녀에게 너무나도 안 좋은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초서현이 그렇게 성수호를 노려보고 있을 때, 성수호가 송아라의 어깨를 툭툭 잡으며 말했다.
“나는 보조 교관이다. 정식으로 활을 배워본 적도 없고, 생존을 위해서 배운 것뿐이야.”
성수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스트레칭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너를 가르쳐서 이상한 습관이 너한테 베이면 초서현 교관님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잖냐. 그럼 너무 죄송한 행동이 되니까.”
“에이, 그건 제 책임이죠~ 자세만 봐주세요. 네? 다른 교관님들은 바쁘다고 잘 봐주시지 않아요….”
성수호는 송아라의 모습을 보면서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저녁 먹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선에서는 도와줄게.”
“와~”
두 사람이 일어나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는 초서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를 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나는 기과 수업을 마치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고… 죽겄다….’
한껏 산행하고 나니까 온몸이 쑤셔왔다.
오전 오후 둘다 기과 수업을 담당했다면 나는 진작 병원에 실려 갔을 것이다.
간신히 식당에 도착한 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려서 오늘의 메뉴를 훑어봤다.
“중식이라… 내가 딱 좋아하는 메뉴네.”
내가 기분 좋은 소리로 흥얼거리자, 뒤쪽에서 불만이쌓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중식이네.”
“응?”
나는 뒤를 돌아보고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라고 하면 아마 나는 지금 당장 살해당할 것이다.
초서현이었다.
초서현은 나를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자, 빨리 들어가요.”
“아, 네.”
나는 짧게 대답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식당 입구 안쪽에서 나를 향해 살며시 손을 흔들며 상큼한 미소를 머금은 성수아가 오고 있었다.
“오셨군요. 오늘은 성수호 교관님이 좋아하는 중식이네요.”
“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는 사이에 내 등 뒤에 있던 초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어… 언니….”
성수아가 초서현을 보면서 당황하고 있었다.
내 옆으로 돌아온 초서현이 인상을 찡그리고 나와 성수아를 보면서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
..
..
‘와… 밥이 코로 들어가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숟가락은 정상적으로 입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
시리어슬리?
나는짜장 볶음밥을 퍼서 한입 먹을 때마다 초서현과 성수아를 계속 힐끗힐끗 봤다.
식사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젓가락, 숟가락을 놓고 팔짱을 낀 초서현.
그런 초서현의 눈치를 보면서 제대로 숟가락을 못 들고 있는 성수아.
무한한 침묵을 주선하던 초서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설마… 두 사람이 같은 반을 담당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
“어… 첫날 마과 7반에 가라고 하신 거 초서현 교관님이셨습니다만….”
“난 쟤가 마과 7반인 줄 몰랐거든요? 쟤가 담당하는 곳을 내가 굳이 알아야 하나?”
애냐?
갑자기 첫날 보여줬던 애 같은 행동을 서슴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초서현은 참 다방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어떨 때는 엄격한 교관, 어떨 때는 애, 어떨 때는 열의가 넘치는 생도.
초서현은 나를 보면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평소에 두 사람 같이 밥 먹어요? 아까 보니까, 자주 먹나 본데?”
“아…네. 같이 일하다 보니까, 웬만하면 식사는 같이하고 있습니다.”
“하…. 나도 같이 일하는데, 나랑은 같이 밥 먹기 싫었나 봐요?”
“네?”
초서현은 작은 얼굴에 심통 맞은 표정을잔뜩 넣고는 나를 노려봤다.
평소에 밥도 안 먹으러 오는 여자랑 어떻게 같이 밥을 먹어?
“설마요. 초서현 교관님은 평소에 식당에서 뵙지 못해서….”
“권유 정도는 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뭐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뎁쇼?
첫날 밥 먹자고 했으면 바로 한 소리했을 거 같은데….
(내가 왜 그쪽이랑 밥을 먹어야하죠?)
분명 저렇게말했을 거다.
내가 초서현과 투덕거리는 사이에도 성수아는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있었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성수아를 보면서 말했다.
“성수아 교관님, 식사하세요. 식겠네요.”
“하하… 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대화를 끼어드는 초서현.
“아니, 나한테는 먹으라고 안 해요? 내 음식은 안 식나?”
“그…. 중식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안 좋아하면 식어도 돼요?”
“…죄송합니다.”
고멘나사이… 같이 식사하게 되어서 고멘나사이.
‘이거 난감하네….’
[초서현이 설마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 몰랐습니다.]
‘아니, 뭐… 둘만 있을 때 저러면 귀엽기라도 하지….’
솔직히 초서현과 가까워진다면 내게는 임무를 위해서나, 내 개인의 사리사욕에서나 좋은 현상이었다.
저렇게 투덜거린다고 예쁜 얼굴이 어디 날아가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문제는 성수아가 같이 있다는 거다. 거기다 딴지를 거는 건 덤.
‘…설마 이거 밥 먹을때마다 계속 끼어드는 거 아니겠지?’
[제 개인적인 예상으로는 이제 초서현은 매 끼니때마다 얼굴을 보게될 것 같습니다.]
‘젠장….’
거참 이상하네… 정작 중요한 도움을 줬던 어제는 아무 말 없다가 전혀 도움이 안 된 오늘 이러네.
그렇게 싸늘하게 식은 점심을 먹고 나서야 나와 성수아는 초서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초서현은 교무실로 들어와 의자에 앉아서 뒤로 누운상태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씨, 이게 아닌데….”
초서현은 성수호와 친분을 쌓고 싶은 마음에 식당까지 그를 뒤 따라갔다.
초서현도 대부분 사람이 직장 상사와 밥을 먹는 게 불편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정식 교관과 보조 교관은 대부분 그런 위치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최대한 좋은 말과 칭찬으로 앞으로 잘해보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성수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니, 왜 하필 성수아랑…. 하아….”
초서현은 딱히 이성으로서 질투하거나 경계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성수호를 좋은 동료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뿐이었다.
하지만 성수아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자, 심사가 뒤틀리면서 두 사람의 식사 자리를 방해하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초서현도 처음부터 성수아를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동생이 연애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딱히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연애 이후의 동생의 태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현이가 걔랑 만나고 나서 이상하게 변한 거 같단말이지.”
초서현의 기억으로 동생인 초강현은 분명 영사관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가족인 자신을 잘 보살펴주고 도와줬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두 사람은 친남매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언제나 올곧고 밝은 동생은 어느 순간 차가운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공교롭게 연애를 할 때였다.
“내가 졸업하고 나서 1년 뒤였나? 그때 연애를 시작했다고 했지….”
초서현이 졸업하고 성수아가 입학했다.
그리고 1년 뒤에두 사람이 연애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본인이 아닌, 타인의 입으로 듣게 된 사실이었다.
동생이 연애한다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밀어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연애 후에 연락이 뜸해졌고, 가끔 만나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 서글펐을 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두 사람에게 서로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런 가족이 가족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초서현은 책상에 놓여있던 종이 한장이 눈에 들어왔다.
-흐히힝. 다음 달에 생일이당! 강현이랑 맛있는 거 먹어야징(>_<)-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면서 초서현이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잊어버리는 거 아니겠지?”
남들이 이 문장을 본다면 초서현을 이상하게 볼 수있었지만, 그녀에게 초강현은 유일한 가족이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래, 존재였다. 10년 전에는….
그런 소통을 해주던 동생이 연애하면서 달라졌기에 초서현은 성수아를 도통 마음에 들어 할 수 없었다.
“그놈의 연애가 뭐라고….”
초서현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종이를 뒤집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무슨 말을 해주면 좋아하려나?”
초서현은 이따 저녁에 성수호와 나눌 대화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