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5화 엑스트라(?)의 여자를 빼앗는 방법 (14)
‘…여긴?’
레나가 눈을 떴을 때, 보이는것들은 길게 나열된 수많은 책장이었다.
자신의 시야가 한없이 낮아져 있었고, 레나는 앙증맞은 두 손을 포갠 채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레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양옆에는 익히 기억하는 얼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돌봐주던 메이드들이었다.
이곳은 자신이 거주하는 성에 있는 서고였고, 먼지 한 톨 허락되지 않는 깔끔하고 정갈한 장소였다.
쓸데없이 화려하지 않고, 고풍을자아내는 서고에 누군가가 격분한 발걸음을 내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페르온 4세.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의 외모와 보이는 시야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페르온 4세는 젊은 시절로 돌아와 있었고, 레나는 그를 올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꺾어서 올려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레나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도 그의 표정에서 책망하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압도하는 위엄으로 자신의 앞에 선 페르온이 고함을 쳤다.
“레나 드페르온!”
“흐윽…. 네, 아버지….”
레나의 입에서는 성년의 목소리가 아닌, 낮게 깔린 조곤조곤한 아이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감히 서고에 몰래 침입해서 기록에 낙서했다는 게 사실이냐!”
“그… 그게… 흐아앙….”
“여기가 어디라고 우느냐!”
“히윽… 히윽….”
“변명도 못 하는 것이냐! 안 되겠다!”
페르온의 분개 어린 외침에 옆에 있던 메이드들은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페르온은 옆에 메이드들을 세워두고 보란 듯이 레나의 엉덩이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하아악! 아, 아파요! 꺄아악!”
“뭘 잘했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냐!”
“흐아아앙! 잘못했어요, 아버지! 히으윽, 용서해주세요! 아아악!”
짝! 짝! 짝!
하지만 레나의 간곡한 비명에도 페르온의 체벌은 멈추지 않았다.
페르온 4세는 레나에게 엄격한 훈육을 지향했다.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나오면 어느 장소라도 회초리를 들곤 했다.
공녀라는 처지에서 수치스럽고 가혹한 처사라고 보일 수 있었지만, 그렇기에 레나는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페르온은 다른 귀족들처럼 자식을 아버지로서 키우지 않고,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엄격하게 키웠다.
그가 분노하면 언제나 매를 들었고, 레나는 그 벌을 달게 받았다.
그녀의 꿈은 매로 시작해서 페르온 4세에게 계속 체벌을 당하는 장면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나는 체벌에 대한분노나 울분의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체벌은 사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레나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그녀는 지금까지 입고 있던 화려한 치장을 한 드레스가 아닌, 은색의 갑주를 입고 있었다.
어느덧 나이가 든 페르온 4세는 왕좌에 앉은 채로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거라! 네가 왜 전쟁터를 나간다는 것이냐!”
“페르온 대공님! 지금 제가 나서지 않으면 병사들을 이끌 자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말을 세상의 이치처럼 받아들였던 레나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대치했다.
그렇게 서로 큰 소리가 오가는 중에 페르온 4세가 왼쪽 흉부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크윽!”
“아, 아버! 페르온 대공님!”
레나는 순간 아버지라고 말할 뻔하다가 말을 바로 잡고 페르온 4세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주위에 있던 가신들도 놀라서 그에게 뛰쳐나갔다.
“아,안 된다…. 내가… 내가 부족하다고 너를 보낼 수는 없다. 차라리 내가… 크윽….”
“큭… 대공님….”
페르온 4세는 현명하고 온화한 지도자로 공국을 다스려왔다.
그의 정치적인 성과와 업적은 세간 사람들도 인정했지만, 전쟁에 나갈 수 없는 허약한 육체를 타고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전쟁에 왕이 나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병력을 통솔하던 장군이 전사했다.
전쟁을 주도한 베텔과 페르온은 병력뿐만이 아닌, 선두에 나설 지도자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 최고로 적합한 인물은 레나 드 페르온이었다.
“페르온 대공님, 걱정하지 말아 주십시오! 전쟁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레나의 말대로 지금 꿈속에서의 상황은 마왕성의 함락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마왕성의 농성은 고되겠지만, 용사가 옆에 있다면 사실상 이긴 것과 다른 없는 상황이었다.
“크윽… 그러니까 내가 가겠다! 커억….”
“페르온 대공님!”
페르온 4세는 입에서 선혈의 핏줄기를 내뱉으며 레나에게 애원했다.
“레나야… 제발 가지 말거라….이 아버지를 봐서….”
“…대공님.”
“나는 대공이 아니다. 너는 내 딸이다…. 사랑스러운 딸을 어찌 전쟁터로 보낸단 말이냐….”
페르온 4세는 남들 앞에서는 레나를 단 한 번도 자식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레나는 눈물을 흘리는 페르온을 보며 이를 악물고 쓰게 웃었다.
“꼭… 꼭… 돌아와서 엄중한 벌을 받겠습니다.”
“레, 레나야! 흐억….”
페르온은 그 뒤로 기절을 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생활로 연명하게 되었다.
레나는 병사들을 이끌고 성을 나오면서 다짐했다.
‘페르온 대공님…. 아니, 아버님. 꼭 돌아와서… 자식으로서 벌을 받겠습니다.’
그 후 레나가 페르온 4세를 보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용사가 사라지고, 전쟁은 패배한다.
마지막 전투에서 진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마왕성의 음습한 감옥 안이었다.
그녀는 이제는 보지 못할 페르온 공국의 국민들과… 아버지의 목숨 위해 마왕성에서 평생을 몸 바쳐 일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
“….”
“깼냐?”
레나가 상체를 들어 올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시야에 잡히는 건 한 사내였다.
한쪽 팔을 책상에, 나머지 한 손으로 책들 들어 올려서 삐딱한 자세로 책을 읽는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맨날 죄송하대.”
“….”
레나는 살짝 감정이 상했지만, 참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녀의기억과 매칭이 안 되는 부분이 보였다.
분명 책을 읽고 있었는데, 책이 사라진 상태였다.
‘요새 뭔가 이상해….’
그동안 머릿속에 안개가 껴서 흐리멍덩했던 레나는 근래에 꿈을 꾸면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상쾌한 기분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이상한 점을 되짚을 수 있었다.
‘이 남자…. 분명 뭔가 하고 있어….’
갑자기 이렇게 졸음이 와서 잠이 드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게 들어간 꿈도 너무 선명한 덕분에 의심의 봉오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제 꿈도…. 하아….’
어제 꿈은 레나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꿈이었다.
꿈이라는 게 정상적인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건 알았지만, 레나조차 그 상황은 납득할 수 없었다.
‘미쳤지…. 내가 때려달라고 조르다니….’
레나는 꿈속의 상황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모두 전해져 들어왔다.
새벽 공기와 함께 맑은 정신으로 깼던레나는 성수호에게 엉덩이를 내밀며 때려달라고 조른 기억과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 들어왔다.
레나는 열쇠를 맡긴 베리우스가 떠올랐다.
‘설마 그 아이가… 아냐, 아무리 그래도 열쇠를 함부로 넘길 아이는 아닌데.’
레나에게 베리우스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일지라도 열쇠를 맡긴 건 최소한의 믿음의 증거였다.
레나는 남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인큐버스? 아냐,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간이야. 일단 주의하자.’
아무리 꿈을 꿔서 정신이 맑아진다고 해도 불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며칠 후면 가는 사내다…. 그래… 며칠 후면….’
레나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조만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공허함이 몰려왔다.
이 남자와 있을 때 드는 안도감은 마지막 희망 같은 느낌이었다.
괴팍한 꿈조차 헛웃음이 나오게 하고, 정원이나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심신이 안정되어가는 자신에게 이 남자는 한 줄기의 희망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자신의 소용돌이치는 파도 같은 마음속에 마개가 되어준 남자.
그 마개를 빼고 다시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다시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듯했다.
그런 요동치는 정신을 바로 잡아 준 것은 앞에 있던 남자였다.
갑자기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가자. 나머지는 밤에 읽어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성수호의 팔에는 두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레나는 책을대신 들어주어야 하나 싶었지만, 남자가 빠르게 사서에게 향했다.
“이거 두 권 잠깐 빌려 가도 돼?”
“그럼요! 그 장소에 있던 책들은 어차피 대부분 쓸모없는 녀석들이라 폐기해야 할 책입니다.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레나는 그 말에 살짝 이마를 꿈틀거렸다.
‘열심히 썼을 텐데. 쓸모없다니….’
레나는 자기가 쓴 책은 아니지만, 인류의 기록과 기억이 담겨있는 책이 쓸모없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남자는 두 권의 책을 들고 도서관을 나왔고, 레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객실로 향할 때쯤 저녁 빛 노을이 복도를 내리쬐고 있었다.
복도에 카펫처럼 깔린 노을빛은 레나의 하루 마무리를 행복하게 해줬다.
객실에 도착할 때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배고프네,오늘은 식사 약속 안 잡혔지?”
“네, 따로 없습니다. 식사하시겠습니까?”
“응, 2인분.”
“…네, 알겠습니다.”
그와의 식사는 거북하면서도 기대되는 그런 자리였다.
레나는 빠르게 돌아서 주방으로 향하려는찰나였다.
남자가 레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
“…?”
“이거 가지고 가.”
“이건….”
남자 팔에 끼워져 있을 때는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보던 책이었다.
“가는 길에 방에 놓고, 나중에 편하게 봐.”
“그….”
“난 들어간다.”
남자는 레나의대답을 듣지 않고, 객실의 커다란 문을 열고 쏙 들어가 버렸다.
***
“공녀에 대해선 대충 알겠네.”
[설마 체벌을 당하고 싶은 이유가 그런 이유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뭐, 사람 감정이라는 게 완벽한 건 아니니까. 그것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평생 대공의 말을 따르던 그녀가 했던 첫 번째 반항이 마지막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용사가 있어서 상황도 좋았는데, 갑자기 사라질 줄은 몰랐겠지.
전쟁에 끝나고 돌아가면 웃으며 자신을 벌해줄 아버지를 생각했지만, 결국 평생 뵙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독특하긴 하지만 내면 안에 자기도 모르게 체벌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듯했다.
나는 공녀에 관한 생각을 잠시 접고, 비올라를 떠올렸다.
“…설마 아직도 놀고 있나?”
객실에 돌아오니, 비올라는 아직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아침에 나가서 밥도 안 먹고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성의 경비는 좋아서 문제는 안 되지만, 비올라 씨는 인간이라 구별을 못 하는 마족들도 존재할 겁니다.]
“일단 찾아보자.”
내가 너무 무신경했다는 것을 느꼈다.
베아트리체와 만났다면 괜찮지만, 만약 만나지 않고 돌아다니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씨, 갑자기 불안하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인간손님이 왔다는 것을알고 있을테니, 그들도 주의는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행인데.”
객실을 나오자마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이 눈에 보였다.
비올라와 베아트리체였다.
나는 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두 사람에게다가가려고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두 사람의 투덕거리는 대화가 들려왔다.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냥!”
“으으… 갑자기 막 뭐를 시켜서….”
…저게 뭔 소리야?
..
..
비올라는 아침이 되자, 베아트리체를 찾기 위해 성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비올라가 길을 헤매다가 식당에 들르게 됐다고 한다.
하필 식당은 여자들이 청소를 도맡고 있었고, 비올라를 새로 온 여자라고 생각한 나머지 청소를 시킨 것이었다.
비올라는 자기도 모르게 일단 시키니까 했지만, 청소를 좋아한 나머지 하루종일 즐겁게 했고, 우연히 베아트리체가 발견해서 끌고 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베아트리체의 말로는 청소만 시켰다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귀족 여자들이 비올라에게 백치라느니, 천하다느니 별 거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아니, 이런 씨!”
“으으, 죄송해요. 수호씨….”
“아, 아냐! 비올라. 너한테 화낸 거 아냐.”
자기한테 화내는 줄 알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비올라를 껴안으며 안심시켰다.
베아트리체가 어깨를 당당하게 펼치며 말했다.
와, 대박 출렁이는 게 보통이 아니네.
“정말이지! 내가 보지 않았으면 종일 청소를 할뻔했다냥!”
“정말 잘했어!”
“쿡쿡. 고마우면 나중에 옷 더 챙겨주라냥.”
“오오, 선물로 팬티도 줄게!”
“그, 그건 됐다냥…”
베아트리체는 혐오감을 분출하는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나 상처받음….
사실 그 귀족년들은 대충넘어갈 심산이었다.
남자 녀석들만 다루는 것도 벅차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공녀의꿈속을 봤을 때도 그렇고 그냥 넘어가기 싫어졌다.
나는 베아트리체에게 물었다.
“베아트리체, 어제 부탁한 거는 어떻게 됐어?”
“아! 일단 관리자한테 물어보니까, 충분하다고 했다냥”
“혹시 20명분 정도 되나?”
“음…. 그 정도는 잘 모르겠다냥. 물어봐야 한다냥.”
“좀 부탁할게.”
“알았다냥.”
“잘하면 팬티 꼭 챙겨줄게.”
“돼, 됐다냥!”
내 말에 감동한 베아트리체는 츤데레 같은 말투와 함께 객실을 뛰쳐나갔다.
‘귀엽네….’
[….]
“아르모니아.’
[네.]
‘그거 여자용도 가능할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비용은 남성용보다 오히려 저렴합니다.]
‘좋아, 좋아…. 흐흐흐…. 상상만 해도 존나 짜릿하네.’
나는 비올라를 껴안으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