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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178화 (178/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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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Abyss, Aquarium

"누구야. 어떻게 된 건지. 아무도 몰라?"

유예린이 소리쳤다.

항상 지니고 다니던 마력석을 잃었다. 옷도 없고 알몸이었기에 잘 때마다 베개 아래 뒀었다. 그리고 잠든 사이 그것은 그들의 적, 강한 친구들 클랜 도수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배신자가 있다.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었다.

"언니. 진정해."

임예정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예린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지친 표정의 유예린을 임예정이 끌어안았다. 그녀가 유예린의 등을 토닥이면서 속삭였다.

"일단 쉬고. 천천히 생각하자 언니."

"그래……."

서로의 따뜻한 맨살이 닿는 포옹은 기분이 좋다. 그 온기가 유예린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안에 분명히 배신자가 있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제 힘의 균형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배신자나 스파이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색출한다고 한들 어쩔 수 있을까. 강한 친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지내야 할까. 자칫하면 아프로겐처럼 될 수도 있다.

박송하를 생각하자 가슴이 무거웠다.

강한 친구들에게 짓밟힌 아프로겐은 명목상으로 강한 친구들의 협력 클랜이 되었다지만 유예린에게는 노예가 되었다는 걸로 들렸다. 최소한의 빵을 제공받고, 하루종일 고기만 만드는 노동력으로 전락할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그런 것을 꾸미는 최화영의 악독함에는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 사태를 반전할 방도는 보이지 않았다. 피곤하다. 그냥 누워야겠다. 일단 자고, 현실에서 잠시 눈을 돌리고.

"……됐어. 쉴게. 다들 쉬어."

유예린이 자신의 자리로 가 털썩 모로 누웠다.

그러자 뒤에서 마주 눕는 기척이 느껴졌다.

"언니."

"예정아?"

"같이 이렇게 있자."

"……응."

유예린은 몸을 돌려 곁에 누운 임예정을 껴안았다. 온기가 사람을 진정시켰다. 임예정이 유예린의 등을 조용히 토닥거렸다. 그 일정한 리듬이 그녀의 마음을 풀어내렸다. 이곳에서 짊어진 짐들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모르겠다. 어떻게 될지. 유예린은 눈을 감았다. 임예정의 온기와 따스한 손길을 느끼면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

음악이 흘렀다. 언제나처럼 악취미적인 엘가 사랑의 인사다.

모든 여인들이 공동으로 모였다. 남자 상대하러 우르르 몰린 접대부들 같네, 유예린은 생각하며 웃었다. 한때 운무시에서 날리던 스물 여섯 여인들이 알몸으로 서서 남자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최화영이 맨 앞에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그를 기다린다.

저 멀리 강한 친구들 쪽에 아프로겐 클랜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얼굴이 엉망이 된 박송하도 보였다. 마정석이 있으니 힐을 줄 수도 있을 텐데, 굳이 본보기로 내버려두는 최화영의 수작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이, 거슬리니까 비키라고."

강한 친구들 클랜원 하나가 아프로겐의 클랜원을 발바닥으로 차서 미는 게 보였다. 아프로겐은 항의도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강한 친구들 무리가 낄낄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유예린의 시선을 느낀 여자가 마주 노려보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어쩌라고, 이런 제스쳐였다. 유예린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돌렸다. 기어코 이 사태를 돌려놓겠다. 유예린은 각오를 씹으면서 그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전까지만 해도 침대에서 서로 핥고 빨던 남자였는데, 벌써 멀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입구에 선 최화영의 매력적인 뒷태가 눈에 거슬렸다. 같이 지하에서 구르며 빵만 먹고 살았는데 그녀의 치켜올라간 엉덩이와 늘씬한 다리는 피트니스 광고에 나올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내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 남자는 자신을 기다리는 최화영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최화영이 다가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오랜만이네?"

"기다렸어?"

"당연하지."

남자는 자연스럽게 최화영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의 손아귀 틈으로 살결이 삐져나왔다. 최화영이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그에게 속삭였다.

"자기는 나 안 그리웠나봐. 삐지고 싶어지네."

"그리웠어."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매일 오면 화영이 헐어버릴까봐."

"아, 변태애."

둘이 속삭이면서 웃었다.

연인처럼 다정한 모습이었다. 유예린이 세 번 안길 때보다도 가까워 보였다. 지하의 여인들에게 다시금 최화영의 위치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이곳의 권력자는 이제 최화영이고, 그녀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저 남자였다. 저 남자가 이곳의 신이었다. 그리고 최화영은 그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다. 저 남자가 있는 이상, 최화영은 이곳을 지배할 것이다.

"그럼 갈까?"

최화영이 남자의 팔짱을 꼈다.

둘이 붉은 방으로 걸어가기 전, 남자는 잠시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여인들은 긴장했다. 본능적으로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몸짓과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을 거느리는 수컷에게 선택되기 위한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여인들은 남자와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침을 삼키면서, 최화영과 같이 그에게 안기기를, 쾌락과 권력을 공상했다.

유예린 또한 그가 쳐다보았을 때, 어쩌면 하는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로 살을 섞을 때 주고 받던 그 눈동자였다. 남자가 자신의 눈을 보고,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가슴을, 아랫배를, 그리고 터럭이 난 비처에 시선을 줄 때, 그녀의 가슴이 요동쳤다. 습기가 스미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녀 옆에 선 여자들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유예린은 알 수 없는 실망감을 느꼈다.

남자는 임예정의 큰 가슴을 쳐다보고, 유솔의 가느다란 허리를 보았다. 모두 그의 것이었다. 남자가 유솔의 새하얀 얼굴을 오래 주시하자 유예린은 질투심마저 느꼈다. 그 남자는 박송하의 엉망이 된 얼굴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면서 최화영과 함께 붉은 방으로 들어섰다. 붉은 방의 문이 닫히기 직전 남자가 최화영을 벽으로 밀어붙이며 그녀의 아랫도리로 손을 밀어붙이는 게 비쳤다. 최화영 또한 스스로 다리를 벌리며 호응했다.

문이 닫혔다.

이제 질척거리는 소리, 희미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인들은 남자의 시선이 붙박인 그 느낌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며 최화영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공터에 서 있었다. 유예린은 유독 남자가 오래 보았던 유솔이나 어린 여자들, 그리고 지금 안기고 있는 최화영에게 질투심을 느끼며 침실로 몸을 돌렸다.

"야, 빨리 가서 일 해."

앳된 목소리에 유예린이 몸을 돌렸다.

아까 아프로겐 클랜원을 발로 찼던 여자였다. 그녀가 앞장 서서 아프로겐의 여섯 명을 녹색 방과 황색 방으로 등 떠밀었다. 아프로겐 클랜원들은 그녀의 거친 대우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뒤에 있던 도수진이 그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쟤 누구야."

"잘 모르겠는데……."

임예정이 고개를 갸웃했고, 유솔이 대신 대답했다.

"백주은이에요."

"너랑 친구야?"

"친하진 않은데…… 저랑 동갑이라서……."

"아, 걔야? 싸가지 없다고 소문났던 애. 칼 쓰고."

"맞아요."

유솔과 동갑이면 한참 어리다. 그런 여자애가 깔깔거리며 아프로겐 클랜원들을 포로 다루듯 하는 모습에 유예린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똑바로 걸어, 멍청아. 엉덩이만 커가지고."

백주은이 아프로겐 클랜원 한 명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세게 밀어차서 그녀가 넘어졌다. 비칠비칠 일어서는 여자를 박송하가 부축하고는 백주은을 노려보았다. 백주은이 마주 인상을 썼다.

"눈 깔아라. 꼬우면 니네가 먼저 덤비질 말던가."

백주은을 노려보던 박송하가 이내 눈을 돌렸다. 하지만 백주은은 여전히 맘에 안든다는 듯 박송하 앞으로 걸어갔다. 백주은도 체구가 큰 편은 아니어서 박송하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백주은이 시비 걸듯이 정면에 서자 박송하도 이제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백주은이 피식 웃었다.

"웃기네. 따지자면 너 때문에 애들 고생하는 거잖아. 괜히 화영 언니한테 덤벼서."

백주은이 손을 뻗어 박송하의 젖꼭지를 쥐고 비틀었다.

"아흑!"

그녀의 행동에 유예린을 포함한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막상 그런 괴롭힘에도 아프로겐은 저항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에는 도수진이 있고, 최화영의 지배구조는 견고하다. 사실관계가 어떻든 결국 먼저 덤빈 것은 아프로겐이었다. 이곳은 여전히 정글이다.

백주은이 젖꼭지를 놓았다. 박송하의 가슴이 벌겋게 물들었다.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거 같으니깐, 이제 박송하 너가 건방 떨 때마다 딴 애들 괴롭힌다."

"……."

"대답해라."

"……알았다."

백주은이 별안간 곁에 서 있던 아프로겐 클랜원 하나의 젖꼭지를 강하게 꼬집었다.

"꺄악!"

"겨우 이것만으로 끝내진 않을 거니까. 알았지?"

박송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주은이 손을 놓았다.

"자, 그럼 가서 일해. 빨리."

아프로겐 클랜원들이 녹색 방과 황색 방으로 나뉘어져 들어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백주은이 이제는 쥬피썬더 클랜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행태를 지켜보며 분을 삭히던 유예린은 정작 백주은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백주은이 걸어오고 있었다.

"유솔아!"

"으, 응, 주은아."

그녀는 활기찬 걸음으로 쥬피 썬더 클랜으로 다가와서는 유예린에게 가볍게 눈인사했다. 유예린은 묘하게 기분 나쁘게 성의 없는 몸짓으로 느껴지는 것이 과민반응인지 스스로 알 수가 없었다. 백주은은 유예린을 지나쳐 유솔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왠지 오래 못 본 것 같다. 그치?"

"으응."

"우리 이야기나 하자. 여긴 다들 언니들이라 맘 편한 사람이 없거든."

유솔이 유예린을 쳐다보았다. 유솔의 시선을 따라 유예린을 함께 쳐다보던 백주은이 유예린에게 물었다.

"괜찮죠, 언니?"

"그래."

"가자, 유솔아."

그때 붉은 방에서부터 최화영의 헐떡이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빠르게 피스톤질하는지 짧고 다발적으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역시 방음이 안 되는 곳이다. 유예린 자신의 신음 소리도 저렇게 이곳에 울려퍼졌으리라.

백주은이 깔깔 웃었다.

"화영 언니 짱이지. 그 남자 완전히 녹였다니깐. 뭐 내가 남자라도 반할 테니까."

"……."

"와서 고기 먹을래?"

백주은이 유솔을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며 유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저 멀리 황색 방과 녹색 방에서 주기적으로 일하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

남자는 이번에도 최화영과 밤을 보냈다. 섹스뿐 아니라 행위 이후의 수면을 공유하고, 식사까지 함께 하는 것 같았다. 연인 같은 행태였다. 밤새도록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낮에는 웃음 소리와 최화영의 재잘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유예린에 비하면 여우 같은 여자였다.

이내 둘만의 밀회가 끝나고 붉은 방의 문이 열렸을 때, 모두 최화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매끄러운 검은 실크 자락이 최화영의 아름다운 몸매를 따라 흘러내렸다.

최화영은 옷을 입고 있었다.

쇄골과 가슴골이 다 보이고 다리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슬립 실크 드레스였다. 남자와 팔짱을 낀 그녀는 이제 이곳 지하에 사로잡힌 노리개라기보다, 남자와 같은 위치에서 다른 여인들을 내려다보는 높은 존재처럼 보였다.

젖가슴과 가랑이를 드러내는 것이 당연한 이곳 지하에, 옷을 입은 최화영이 나타났다.

순간 유예린은 수치심을 느꼈다. 다른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너무 즐거웠어."

최화영이 잠긴 목소리로 남자의 목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남자가 최화영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아당겨 한동안 포옹했다. 밤새도록 얽히고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의 정력은 유예린 또한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얼마나 격렬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은 실크 드레스의 가슴골 틈으로 붉은 얼룩이 비치는 것도 같았다.

둘은 한동안 엘리베이터 앞에서 입술과 혀로 물고 빨다가 헤어졌다. 남자가 떠나고, 최화영은 드레스 자락을 흩날리며 강한 친구들 클랜 쪽으로 걸어갔다.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알몸의 여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문명화된 고귀한 존재 같았다.

유예린은 깨달았다.

이곳은 더이상 미개척된 미궁이 아니었다.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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