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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175화 (17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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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Abyss, Aquarium

최화영이 미궁의 왕에게 안겼고, 만족한 왕은 선물을 주었다.

새로운 문이 열렸다.

푸른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다. 초록색으로 칠해진 문 너머에는 두꺼운 동앗줄로 연결된 거대한 쇳덩이가 천장에서부터 늘어져 있었다. 그것을 일정 높이 이상 들어올리면 곁에 연결된 마도공학구의 화면에서 그래프 같은 수치가 올라가고, 목표치에 이르면 관에서부터 싱싱한 채소가 떨어지는 구조였다.

'이 쇳덩이를 들어올려 무게를 극복하라, 싱싱한 채소를 주겠느니라.' 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또 하나의 문도 열렸다.

노란색 문이었다. 그곳에는 갱도(坑道)가 있었다. 이제 막 건설된 듯 굴의 초입이었다. 두 개의 곡괭이가 자리했고, 옆에는 예의 식량공급용 관과, 무엇인가를 넣기 위한 투입구가 달려 있었다.

'굴을 파다보면 지질 틈에서 노란색 구슬이 나오느니라. 이것을 투입하면 맛있는 고기가 나오게 되느니, 나의 위대한 힘과 자비에 감사하거라.'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두 개의 방을 먼저 시험한 것은 물론 강한 친구들이다. 지하 18층에 갇힌 스물여섯 중 과반에 가까운 인원수와 이를 완벽히 통솔하는 최화영의 지배력, 그리고 그녀가 얻은 괴물의 총애,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힘의 원천 마력석이 있는 최화영은 다시 이곳의 최고 서열로 떠올랐다. 그녀들이 몰린 녹색방과 노란방에 다가서는 이들은 없었다.

"효율이 안 좋아."

도수진이 말했다.

푸른방의 경우, 하루만 열심히 돌리면 이틀, 사흘은 쉬어도 될 충분한 양의 빵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 열린 녹색방과 노란방의 경우 푸른방에 비하면 열악한 효율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종일 일해도 그날의 허기를 채우지 못할 수도 있는 양이었다.

"가끔 특식으로 해먹는 정도겠어요. 언니."

"흐응……."

최화영이 턱을 매만지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붉은방에서 하루를 보낸 후 최화영은 한층 화사해졌고, 고혹적인 장미와 같은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두가 미인들인 이곳 지하 18층에서도 독보적인 미모였다. 그녀가 눈을 곱게 휘면서 도수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수진아, 나 믿지?"

"물론이죠. 언니만 따를게요."

도수진이 생긋 웃으며 최화영의 손을 맞잡았다.

"곧 재미 있어질 거야. 나만 믿고 따라와."

"응. 당연하죠."

최화영이 눈을 찡긋했다.

"그럼 해줄 일이 있는데……."

*

유예린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대로 두면 위험하다는 말이야."

그녀의 곁에는 박송하가 있었다.

유예린이 아프로겐 클랜의 침실로 찾아왔고, 둘은 구석에서 둘만의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박송하가 눈을 감았다.

"이대로 가다가 최화영이 마력석을 하나라도 더 얻는다 생각해봐."

"……."

"장담하는데 고운 꼴 못볼 걸."

박송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한데……."

"응."

"아니다."

박송하가 눈을 떴다. 곁에 앉은 유예린인 신경이 곤두서 보였다. 정말로 최화영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 남자 때문인지,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최화영에 대한 유예린의 말이 일리 있다는 거니까. 다만 그녀가 애잔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밖에서는 언제나 여유 있고 쿨하던 유예린이어서 이런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 남자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까 대비해야 돼."

"우리쪽이 그 괴물을 취해야 맞는 거군."

"어차피 한 명만 안기면 돼. 어떻게 여자를 뽑으란 말은 없었으니까, 어떻게든 마력석이나, 그에 준하는 걸 얻으면 우리쪽에서 그 남자를 독점할 수 있는 거야."

"결국 무력 승부라는 말로 들리는데."

"그렇게 되겠지."

"이길 자신 있어?"

"……."

유예린은 애매한 얼굴을 했다. 마력석의 용량은 비슷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같은 힘을 가지고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소유자의 레벨로 승부가 판가름날 것이다. 유예린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최화영에 대한 정보가 없다.

강한 친구들에서 수위에 드는 실력자라는 소문만 얼핏 들었을 뿐 그녀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 아는 이도 쥬피 썬더와 아프로겐에 없었다. 그러나 강한 친구들은 유예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운무시의 도사에게 사사 받은 태극(太極)의 도(道)를 마법에 융합시켜 화염과 빙결을 자유자재로 쓰는 실력자라는 것 정도는 운무시에서 상식이었다.

"최화영에 대해 모르겠어."

"후…… 너에 대한 건 다 알 텐데."

"그래서 말인데, 최화영은 나를 상정하고 있을 테니까, 막상 싸울 땐 너가 마력석을 쓰는 건 어때?"

"난 무공이라, 몸 밖에 있는 힘을 빌려 쓰면 효율이 떨어져."

"아……."

유예린이 코끝을 매만졌다.

"내가 최화영을 마크한다고 하면 나머지 몸싸움에서는 송하 너가 이길 수 있지?"

"글세……."

"너 박송하잖아."

"도수진도 만만치 않아."

"도수진……."

키가 백팔십이 넘는 도수진은 배구선수처럼 탄력 있는 근육이 온몸에 가득했다. 그녀는 각종 무술을 다양하게 익혔지만 베이스가 되는 스타일은 무에타이, 큰 키와 긴 다리를 이용한 킥은 내공이 없더라도 뼈 정도는 바스라뜨릴 수 있다.

"물론 내가 이기겠지만. 나머지 애들이 잘 싸워주느냐에 달렸지. 문제는 무투계도 이쪽이 적어."

"……."

유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화영과 어떻게 될진 몰라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내가 밀리더라도 최소한 봉쇄할 수는 있을 거야."

"그래."

"그때 나머지가 몸싸움에서 이겨서 합공하면 돼."

"그걸 어떻게 이기냐가 문제지."

"아직 인원이 더 있잖아."

"……운무 신세기?"

"응."

박송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움직일까? 걔네 시작부터 완전 유령처럼 행동하던데. 안 끼려고 할 걸."

"설득해야지. 최화영이 여길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줘야지."

"그래…… 그것만 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박송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던 유예린은 각도상 본의 아니게 그녀의 터럭과 살짝 늘어진 소음순을 보고 말았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키는 크지 않지만 단단한 복근, 탄력 있는 허벅지, 그을린 피부, 호쾌한 성격에 맞지 않게 갸름하고 예쁘장한 얼굴, 여자로서 매력이 충분했다. 혹시 그 남자가 박송하를 안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그런 생각을 하던 유예린이 고개를 홰홰 저었다.

박송하가 손을 내밀어서 유예린을 마주 일으켜주며 말했다.

"운무 신세기에는 지하은이 있으니까."

"지하은……."

지하은, 통칭 유령.

운무시 도사를 만나기 전엔 청부업자였다. 현대의 암살자라고도 했다. 주무기는 일본도, 옛 일본의 검술을 바탕으로 소리 없이 적을 참살했다. 다양한 닌자의 기술과 은신술을 바탕으로 정글넷에서도 악명 높은 살인청부업자였지만 운무시의 도사를 만난 후 암살자에서 은퇴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녀라면 굳이 칼이 없더라도 엄청난 전력이다.

"같이 가볼래?"

"그래."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프로겐 클랜의 침실을 나섰다.

밖에서 임예정이 서성이고 있었다.

"언니."

"어, 예정아."

"애들끼리 빵 만들러 가려는데……."

"그래? 먼저 가 있을래? 난 할 일이 있거든. 이따 갈게."

"아, 응, 알았어 언니. 기다릴게."

"응."

유예린과 박송하는 강한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들키지 않게 운무 신세기의 침실로 들어갔다.

*

유예린은 운무 신세기의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굳은 듯 멈추어야 했다.

"……."

어느새 누군가의 손날이 자신의 목에 닿아 있었다. 단련된 손끝이다. 내공이 없어도 이걸로 목을 찔러들면 자신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뒤에 선 박송하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저기, 좀 치워줄래……?"

"……."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용무시죠."

조용한 목소리였다. 차분한 표정, 다소곳한 몸짓의 여인이었다. 수수한 듯 청초한 매력이 흘렀다. 알몸으로 있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게 느껴질 만큼 묘한 기품이 있었다.

"지하은 만나러 왔는데……."

"보고 계시네요."

유예린이 눈을 굴렸다.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손끝을 겨눈 여자는 표정이라고는 없이 삭막한 얼굴이었다.

"저한테 말씀하세요. 언니는 말을 못하니까."

"아……."

생각났다. 지하은은 암살자로 키워지면서 가혹한 교육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운무 신세기에는 지하은과 항상 함께 다니는, 지하은의 연인이 있다고 했다.

"당신이 박지나?"

"맞아요."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이야기할 게 있어서 온 거야. 그러니까…… 지하은 좀 비켜달라고 해줄래?"

"……."

"정말인데."

박지나는 고민하다가, 지하은을 향해 말했다.

"언니 뜻에 따를게요."

"……."

지하은은 박지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다.

박송하와 유예린은 지하은, 박지나와 마주 앉았다. 운무 신세기의 나머지 한 명은 구석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최화영을 어떻게 생각해?"

유예린이 지하은을 향해 물었다. 그녀는 유예린을 응시하다가, 박지나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수화였다.

박지나가 대신 대답했다.

"똑똑한 여자래요."

"똑똑하지. 똑똑하기만 하면 좋은데, 성격은 어떨까?"

지하은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또라이래요."

"그래. 똑똑한 또라이야. 아주 위험하지."

유예린이 한숨을 쉬었다.

"최화영이 요새 그 괴물…… 한테 가는 거 알지? 지금 마력석도 하나 얻었어. 나와 송하는 그 여자가 마력석이나 그런 걸 하나 더 얻는 사태를 걱정하고 있어."

"……."

"예전이야 인원이 비등했고, 지금은 나한테 마력석이 하나 있어서 어떻게 균형을 맞추고 있어. 그런데 나중에 그 여자가 더 큰 힘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

"예전에도 푸른방을 독점한다고 패악을 부린 여자야. 상상이 가지?"

지하은이 손을 움직였다. 그것을 알아들은 박지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유예린을 한 번, 지하은을 한 번 쳐다보았다.

"뭐라고 했어?"

"혹시 남자 뺏겨서 질투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거든."

유예린이 발끈했다.

지하은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정곡 찔려서 화내는 거 같다고……."

"얘는 표정도 안 바꾸고 사람 성질 돋구네."

"이건 제가 궁금한 거에요. 저희 운무 신세기랑 힘을 합쳐서 견제하자는 말씀 같은데, 결국 그 남자에게 최화영이 더 안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맞아."

"그럼, 최화영을 밀어내면 누가 남자에게 안기게 되나요?"

"……."

박송하가 유예린을 쳐다보았다. 지하은, 박지나의 눈도 그녀를 향했다. 유예린이 떨떠름한 얼굴로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대답했다.

"나……겠지?"

"지원자가 있으면, 다른 여자가 갈 수도 있나요?"

"지나 너 설마……."

유예린의 말에 지하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박지나가 지하은의 어깨를 안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에요. 예린 언니 마음이 궁금해서."

"……."

"이해해요. 어느 정도는 본능이니까. 강한 남자 애인이 되면 모두 우러러 보고, 여자의 서열이 높아지니까. 그리고 그 남자는 여기 왕이기도 하고. 그런 남자한테 안겼으니 끌리는 것도 당연해요."

"그만."

유예린이 말을 잘랐다.

"그런 이야기는 시끄럽고, 예스냐 노냐만 말 해. 최화영이 여길 먹게 둘래, 아니면 우리와 싸울래?"

"사실 강한 친구들에서 여길 왔었어요."

"……."

유예린과 박송하가 경계했다.

"상관 안 하면 저희들은 건드리지 않겠다…… 라고 하던데요."

"너희 설마."

"걱정 말아요. 우리 알아서 잘 지낼 테니 그쪽도 선을 지키면 된다고 대답했어요. 저희는 도사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

지하은이 손을 움직였다.

"알겠어요. 저와 하은 언니는, 여러분이 강한 친구들과 싸우게 되면 도울게요."

"고마워."

"대신 여러분도 힘에 취하지 않고 여길 공정하게 운영하셔야 됩니다."

"물론이지. 최화영과는 다르니까."

"네."

그렇게 강한 친구들 대 쥬피 썬더, 아프로겐, 운무 신세기의 구도가 성립되었다.

*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있어."

"주인님이 왜 즐거워하는지 알 거 같아. 재밌다, 이거."

정하와 수현은 지하 18층, 아쿠아리움을 모니터링하며 팝콘을 먹고 있었다. 정하가 수현의 입에 팝콘을 하나씩 넣어주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팝콘을 하나 물고 키스하며 하나씩 넘겨주었다.

"주인님은 둘 중 누가 왔으면 좋겠어?"

"글세?"

"최화영이랑 할 때 제법 즐거워하던데."

"예쁘니까."

"흐응……."

"누나에 비하면 오징어지만."

"나도 알아."

살짝 삐진 기색의 정하에게 수현이 진하게 키스해주자 그녀의 얼굴이 풀렸다. 그녀의 티셔츠 위로 가슴을 주무르면서 수현이 말했다.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그쪽이 이기겠지?"

"과연 그럴까? 저쪽이 그렇게 움직일까?"

"내기하자."

"좋아. 나는 저쪽."

"난 이쪽."

"내기는 뭘로 할까?"

"내가 이기면 누나 암캐 플레이 하루권."

"요새 하드하네 주인님……? 후후, 좋아, 내가 이기면 주인님 수캐 플레이 하루권."

"으윽…… 알았어."

"후후. 난 어느쪽이든 기대되는데?"

정하가 수현의 목을 안았다.

"지금 젖었지."

"응. 당연하지. 난 주인님과 있으면 언제나 그런 걸……?"

"나도."

지하 18층, 아쿠아리움의 광경을 즐기던 두 남녀가 다시 뜨겁게 얽히기 시작했다.

모니터 너머에서, 여인들은 자신들의 명운을 걸고 각자의 뜻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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