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71화 (17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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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Abyss, Aquarium

"너희 너무 오래 쓰는 것 아냐?"

유예린이 말했다.

강한 친구들 클랜에서 최화영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도수진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배구선수처럼 큰 키와 탄력 있는 허벅지, 강인한 어깨를 가지고 있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숏컷한 짧은 머리카락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몸을 돌려 클랜원들에게 말했다.

"방으로 돌아가자."

"네!"

"네, 언니."

모두가 자신들의 빵을 주섬주섬 챙기며 대답했다. 다들 땀범벅이었다. 푸른방에 들어서면 항상 이런 땀냄새가 났다.

도수진이 유예린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자알 쓰시길."

유예린은 도수진과도 안면이 있어서 박송하처럼 트러블이 있지는 않았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어도 서로 존중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자알 쓰시길, 하는 그 묘한 어감에 유예린이 그녀와 강한 친구들 클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니 말이면 껌벅 죽네. 우리 예린이 언니 잘 나가는데?"

임예정이 깔깔거리며 유예린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앗, 바보야, 뭘 만지는 거야."

"괴물을 사로잡은 언니의 백만불짜리 엉덩이."

"죽을래?"

이 닫힌 공간에서 미묘하게 서열 같은 것이 생겼다. 그리고 아무도 유예린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다. 최화영이 시비를 거는 일도 줄어들었다. 덩달아 쥬피 썬더 클랜의 다른 멤버들도 편하게 생활하게 되었다.

"어제도 언니 이름 파니까 샤워기 바로 비켜주던데."

"그러지 말랬지."

"푸훗, 농담이야. 그냥 가니까 빨리 비켜주더라고. 언니랑 같은 클랜이니까."

유예린이 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자세를 낮추고 체중을 실어 손잡이를 밀었다.

"언니는 바퀴 돌리지 마."

임예정의 말에 유예린이 대답했다.

"같이 일해야지. 자기 건 자기가."

"혹여 그러다가 언니 근육 생기고 종아리 알 생겨서 잘생긴 괴물한테 소박 맞으면 어떡해?"

"……."

"장난이야, 장난!"

임예정이 깔깔 웃으며 도망쳤다.

그녀를 잡으려던 유예린이 에휴, 한숨을 쉬면서 포기했다. 빵 만들기도 힘든데 땀 흘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기척이 느껴져 눈을 돌렸더니 유솔이 화들짝 딴청을 부렸다.

그날 이후 유솔도 왠지 그녀를 어려워했다.

나중에 듣기로, 붉은방에서 일어나는 일이 여과 없이 공동에 울렸다고 했다. 방음이 아주 엉망이라 붉은방에 가까이만 가면 남자와 유예린이 몸을 섞으며 낸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유예린의 신음소리, 절정하며 내지르는 소리, 찔걱찔걱, 철퍽거리던 소리, 키스하며 쭙쭙거리던 소리였다.

그걸 상상하니 왠지 얼굴이 뜨거워진다. 몇 시간이고 뒹굴었으니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푸른방에서 빵을 만들면서도 희미하게 들렸다고 하니, 다음에 만나면 방음 대책을 요구해야겠다.

저도 모르게 다음 만남을 생각하면서 미소짓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유예린이 찰싹, 자신의 뺨을 때렸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자신은 책임을 지는 것뿐이다. 그 남자의 애첩도 아니고, 어떤 특권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냥 모두를 위해 몸을 희생한 것이다. 생각보다 상냥한 남자긴 했지만, 특별한 관계인 것도 아니다. 그저 그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다. 해방을 기다리는.

다음엔 유솔과 긴히 대화해야겠다. 경험도 없던 아이에겐 충격이었을 거다. 특히 자신을 잘 따르던 아이였으니까, 남자한테 앙앙거리는 모습에 실망했을 수도 있다. 머리가 아프다. 그냥 빵이나 만들어두자. 유예린이 다시 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왠지 점점 바퀴의 저항이 강해지는 것 같다. 힘을 짜내며 바퀴를 밀던 유예린이 문득 뒤돌아 자신의 종아리 뒷쪽을 확인했다.

"……."

알 같은 건 없다. 자신의 자랑이었던 다리는 여전히 매끈하다. 먹는 게 줄고 노동이 늘어서 오히려 매끈하고 탄력이 생겼는지도.

그런 생각한 자신이 괜히 한심해서 열심히 바퀴를 돌렸다.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유예린!"

"……넌 좀 살살 말하면 안 되겠니?"

"뭐 어때? 같이 돌리자."

아프로겐 클랜이 푸른방에 들어섰다. 이곳의 세력은 여전히 최화영의 강한 친구들 대 쥬피 썬더와 아프로겐 연합, 그리고 조용히 지내는 운무 신세기의 구도였다. 유예린이 수현에게 안긴 이후 강한 친구들이 전처럼 독점하지 않아 분쟁이 줄었다.

"요새 최화영 잘 안 보이네?"

"들으니까 지네 방에서 논다던데. 우리랑 옆방이잖아. 요새 마피아 게임 한다고 시끄러."

무료한 공동 생활에 익숙해진 여자들은 흥미거리를 찾았고, 최화영과 강한 친구들 클랜은 마피아 게임에 열심이었다.

"어엇, 너 진짜 힘 좋다. 뭘 먹고 그리 무식하게 힘이 쎄니?"

"후후, 유식하게 센 거야. 너가 무식하게 약한 거고."

유예린의 바퀴에 박송하가 합세하자 바퀴가 휙휙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예린은 박송하에게 짐되지 않으려 힘을 주면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점점 매력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작은 체구지만 그을린 피부에 탄탄하고 여성스러운 근육이 들어찬 몸매는 활기차고 경쾌한 인상이었다. 종아리도 알이 생기거나 근육이 갈라지지 않고 매끈하게 뻗어 있었다. 섹시하다.

무슨 생각 한 거지. 유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 공동에는 여자뿐이라 이따금 동성애 하는 이들이 있다는 뜬소문이 얼핏 들렸는데, 아주 헛소리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예린은 그 남자가 조금 그리웠다.

"빵 하나 먹고 계속하자. 목 마른데 물 마시러 갈래?"

"응."

관에서 예의 전투식량, 빵이 튀어나왔고 반으로 쪼개 하나씩 입에 물었다. 박송하와 유예린이 중앙 공동의 구석에 위치한 식수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만나기 거북한 얼굴이 있었다.

"언니는 어떻게 그렇게 촉이 좋아요? 초능력자 아니에요?"

"후후, 너희 표정에서 다 드러나거든? 내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니 포기하렴."

"아우, 그냥 시작부터 언니 인민재판해서 사형해야지 안 되겠어."

강한 친구들 클랜의 무리였다. 최화영과 여인 두 명이 식수대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최화영은 언제 보아도 여유로운 태도와 표정이다.

여인들끼리라고 한들 알몸이라면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최화영은 오히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가슴을 열고 다녔다. 지금도 식수를 한 모금 꼴깍, 마시고는 골반에 손을 얹는데 포즈라도 취한 것처럼 관능적이다. 뒤에서 보니 그녀는 아랫배뿐 아니라 꼬리뼈에도 천사의 날개 모양 타투가, 날개뼈에는 나비 모양 타투가 그려져 있었다.

성격이야 어쨌건 외모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어머, 송하랑 예린이네?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잘 지냈나봐?"

최화영이 둘을 발견하고 샐쭉 웃으며 말했다. 고양이처럼 눈이 가늘게 휜다.

"한동안 누구가 안 보여서 잘 지냈는데 지금은 못 지낼 거 같네."

박송하가 툴툴댔다.

"후후. 예린이는 얼굴이 좋다. 그 남자 덕분인가?"

최화영의 말에 곁에 서 있던 그녀의 클랜원들이 킥킥 웃었다. 유예린의 얼굴이 굳었다. 박송하도 그녀를 찌릿 쳐다보았다.

"말 좀 잘 전해줘. 여기는 너무 열악하잖아. 베갯머리에서 샤워기라도 늘려달라고 해봐."

"……."

유예린은 최화영을 무시하고 식수대로 다가갔다. 버튼을 누르자 미약한 물줄기가 위로 솟아올랐다.

박송하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무시해."

"신경 안 써."

최화영이 웃었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네. 나는 갈 테니까 다음에 또 봐."

그리고는 예의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멀어졌다. 유예린은 이런 얕은 물줄기보다 시원하게 목구멍을 때리는 바깥 세상의 찬 물이 그리워졌다.

"저년 얼굴 보니까 짜증난다. 오늘은 특훈으로 빵 한 열 개는 만들자 예린아."

"특훈이라니. 웃겨."

유예린이 깔깔 웃었다.

*

샤워를 끝냈다. 뽀송뽀송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청결해진 기분이다. 유예린은 자신의 침실에 누웠다.

이층 침대가 열 개는 늘어서 있는 침실이다. 쥬피 썬더는 여섯 명이기에 모두 일층 침대를 사용했다.

그녀는 침실에 누워 말똥말똥 침대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유솔을 찾았다. 보아하니 유솔도 제 자리에 누워서 멍하니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녀린 소녀였다. 원래 말랐는데 지금은 더 마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여전히 커서 억울한 느낌이지만, 어쨌거나 유솔은 가장 어리고 마음 약한 아이였다. 생리 때는 이곳을 더욱 힘들어했다.

"솔아."

그녀가 살며시 불렀다. 유솔이 유예린을 쳐다보았다. 갸웃하면서 말똥거리는 눈이 귀엽다. 유예린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살랑살랑 손짓했다.

"이리 와봐."

유솔은 무슨 일이 있나, 갸웃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 걸어왔다. 알몸이라 어쩔 수 없이 몸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유솔은 체모도 엷어서 더욱 소녀 같았다.

"여기 누워."

옆자리를 팡팡 쳤다. 유솔은 냉큼 누웠다. 그녀는 유예린을 잘 따랐고, 예전에도 종종 이렇게 같이 누워 이야기하곤 했었다. 유예린이 남자와 잔 이후로 왠지 어색했지만.

"힘든 거 없니?"

"……네에……."

왠지 바짝 붙는 그녀가 귀여워서 유예린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이 그립지."

"……."

"나도 그래.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때까지만 힘들어도 참자."

"네."

유예린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그녀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가만히 있었다.

멀리 있던 임예정이 둘을 발견하고 뒤에서 유솔에게 장난치려는 시늉하다가, 유예린의 눈짓에 어깨를 으쓱하며 윙크하고는 다른 클랜원에게 걸어갔다. 임예정의 장난에 다시 그녀들이 깔깔거린다.

"언니."

"응."

"그때…… 있잖아요."

"응."

"그거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유예린도 왠지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다. 성교육 시간인가.

"그게……."

유예린이 무엇인가 이야기하려는 찰나였다.

----.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일어섰다. 시선이 공동을 향했다. 그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예의 노래, 엘가의 사랑의 인사였다. 유솔과 임예정이 유예린을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멍하니 반응하지 못했다. 다시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그 시간이 다가오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유예린은 우선 일어나서 공동으로 걸어갔다.

아프로겐, 강한 친구들, 운무 신세기, 모두가 주춤거리며 공동으로 나오고 있었다. 다시금 한 명의 여자를 선택하는 스테이지, 그리고 그 한 명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유예린은 애써 허리를 펴고 당당히 걸어나갔다.

누가 나갈지 정하는 것은 필요 없었다. 괴물이 총애하는 여자는 이미 여기 있으니까. 유예린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응시했다. 저 너머에서 그 남자가 나올 것이었다.

음악이 그치고, 엘리베이터가 지하 18층을 가리켰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나온 남자는 예전과 같은 아름다운 소년이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예린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예린이네. 기뻐."

소년이 양팔을 벌렸다. 유예린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소년에게 폭 안겼다.

벌써 젖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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