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59화 (15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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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끝까지 밟아 졸라 세게 박아

그의 행적은 드러나 있지 않다.

오른팔이나, 혹은 믿을 만한 부하, 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관계를 맺지도 않는다. 운무 징기스칸의 주요 거점이나 본거지를 돌며 순찰하고 약탈과 범죄를 지시할 뿐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비밀스럽다. 다만 그가 가진 압도적인 힘과 치밀한 전략, 주도면밀하게 상대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짜내고 팔아 이룩한 단물을 논공행상하여 승자독식의 공명정대한 룰을 베푼다는 것, 이것이 운무 징기스칸의 싸움꾼들로 하여금 마스터를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정이나 덕망, 카리스마 같은 것보다 더욱 강력하게 그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가 곧 운무 징기스칸이다. 그러므로 그를 없앤다면 운무 징기스칸은 다시 사분오열, 양아치패들로 전락한다.

당신이 그를 없앤다면, 강유종도, 그 힙합 찌질이도, 산 채로 당신의 앞에 대령해 포를 뜰 수도 있을 거에요.

유예린이 그리 말했다. 올가는 그저 인터넷 악플러 하나를 붙잡으려고 시작한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반추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대가를 치른다. 그것이 정글의 룰이다. 그리고 그녀는 믿는 바가 있었다.

자신은 뒷배가 있으니까. 혹시나, 혹시나 혹시나 잘못되어도 주인님, 혹은 이브린, 하다못해 예브게냐나 정하가 와도 운무시의 모든 정글은 초토화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리 약하지 않다.

올가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운무 징기스칸의 마스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곳은 운무시 외곽의 낡은 모텔,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손님을 받지 않는다. 폐업한 이곳에서 그 악당이 기거한다고 유예린이 말했다. 자신의 흔적을 결코 남기지 않는 그놈의 거처를 추적하느라 클랜원들이 수도 없이 희생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유예린이 말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마스터 또한 진짜 흑막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 또한 누군가의 대리인일 뿐, 진정 운무시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괴물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렇다면 운무시 클랜들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다. 그 녀석조차 장기말에 불과하다면 그들은 저항할 수 없다.

올가에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지만.

어쩌면 이것은 그녀에게 유희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어느정도 깨닫고 있었다. 실은 그녀 또한 예브게냐의 밑에서 힘을 부리던 먹이사슬의 위층이었다. 수현과의 일을 빌미삼아 예전의 그 폭력을 즐기고 싶은 것인지도.

그리고 기이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감싸는 검은 코트, 살갗을 드러내지 않는 가죽장갑과 마스크, 선글라스와 깊이 눌러쓴 중절모, 그 안에 있는 것이 사람 아닌 기괴한 모습의 괴물이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보고서 올가는 무엇인가 어긋나는 기분이 들었다. 봄인 줄 알고 나오니 실은 겨울이었던 것처럼, 그녀가 당연한 듯 생각한 무엇인가가 틀렸다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모텔의 앞으로 조용히 걸어오다가 문득 멈추었다. 자신의 기척을 들켰을가, 올가는 숨을 죽였다. 왜 들키고 싶지 않은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올가는 바로 싸움을 벌일 투지가 끓어오르지가 않았다. 저 남자가 강하다, 라고 하는 것과도 다른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 남자는 한동안 모텔 앞에 멈추어 섰다.

그 기이한 남자는 모텔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올가는 괜히 휴대폰을 열어서 사진함에 저장된 수현의 얼굴을 봤다.

음, 진정이 되는군.

가지고 있다가 여차하면 전화해야지.

그리고 올가가 숨을 골랐다가, 바닥에 분필로 마법진을 그렸다. 복잡한 도형이었으나 수도 없이 반복한 숙련된 마녀답게, 낙서하듯이 휘갈겼음에도 불구하고 자를 댄 듯 정교한 모양이 바닥에 떠오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양이었다.

곡선, 도형, 그녀가 마력으로 부여한 색깔, 모든 것이 인간의 인지로 인식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품었다. 이 아름다운 도형은 제물이다. 이것을 바쳐서, 그녀가 원하는 그것을 소환하는 것이다.

정령계의 가장 북쪽에 터를 잡고 아름다운 것만을 수집한다는 고귀한 얼음의 정령.

그대에게 바치는 아름다움이니, 나타나라.

그녀가 바친 문양과, 하이엘프의 피를 타고난 그녀의 정령과의 친화력, 두 가지를 매개로 하여 올가는 얼음의 정령 유리체니를 소환했다.

마법진을 무엇인가가 집어삼키고, 만족스러운 듯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마법진이 있던 곳에서부터 고운 손 하나가 튀어나와 바닥을 집고, 몸을 천천히 위로 일으키고 있었다.

유리체니, 아름다운 북풍의 정령.

그때였다.

콰직.

기어나오던 유리체니의 머리를 가죽 워커가 짓밟았다. 유리체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올가가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가 어느새 다가와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올가를 바라보며, 예리체니를 짓밟은 워커를 비틀며 다시금 그녀를 걷어찼다.

끼아아아아아아아

유리체니는 소환되지도 못한 채 정령계로 되돌아갔다. 올가가 곧바로 몸을 튕겨 그에게서 멀어지며 수인을 맺었다.

정령 소환.

클랜전 당시에 소환했던 바로 그 정령이었다. 유리체니와 같이 제물을 바치거나 준비할 시간 없이 불러낼 수 있지만 유리체니보다 격이 떨어지는 존재이다. 물론 한낱 인간이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유리체니를 물리력으로 강제 역소환 시킨 존재이니 이것이 얼마나 통할지도 미지수이다.

"누구냐."

쇠를 긁어내는 소리였다. 인간의 목소리 같지도 않았다. 올가는 소름이 돋았다. 정말 저 가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기면 파충류 같은 존재가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알아도 바뀔 거 없잖아?"

올가가 씩 웃었다. 바람의 정령이 천천히 떠오르며 그 남자의 주위를 맴돌았다. 올가가 마력을 끌어올려 혹한의 주문을 준비했다. 그녀의 주위로 온갖 마법의 모형과 구성요소들이 떠오르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럼, 왜 나를 노리는 건가."

"정말로 궁금한 거 아니지?"

"그런가."

남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뻔한 일인가."

"그래!"

올가의 주위에 떠오른 날카로운 얼음 송곳들이 남자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남자가 몸을 뛰어 피했고, 장전되어 있던 또다른 고드름들이 그의 뒤를 좇았다. 공중에서는 방향을 틀 수 없다. 남자가 코트를 펼쳤다. 얼음들은 그 외투에 부닥쳐 흩어졌다.

바람의 정령이 그를 노리고 쇄도했다. 실체 없는 정령은 그의 몸을 허공에 밀어올리고 바닥에 내리 꽂았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남자가 무너졌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너는 얼마나 강하지?"

"무슨 소리야?"

"나를 이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냐는 뜻이다."

그가 자세를 잡았다. 강렬한 기운이 공간을 점령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부디, 나를 쓰러뜨리기를."

*

쥬피 썬더 클랜의 유예린은 손끝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 엘프가 직접 그를 치러 갔다. 그들도 뒤따르려 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어차피 그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하나 운무 징기스칸에게 감시되고 있다. 올가만이 적이 모르는 그들의 조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메일로 날아온 한 편의 동영상 때문에 그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른 클랜의 마스터들과 함께 있다고 볼 수 없는 감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의 마스터였던 정혜리, 그리고 그녀의 오른팔이자 절친한 친구 김아현이 엉망진창으로 능욕당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스파이로 투입했던 오혜경도 사로잡혀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강유종, 그놈이 직접 그들을 학대하고 있었다.

승자독식의 정글의 생리라고는 하나 정글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잔혹한 행위였다. 약으로 사람을 절여서는 욕구를 배출하고 내키는 대로 가축 취급하는 최악의 행위였다.

오히려 이곳이 운무시가 아닌 다른 도시였다면 일이 쉬웠을 것이다. 악은 악이 구축한다, 저러한 행위를 자행하는 것이 드러난다면 오히려 자신들의 업보에 지레 겁먹은 다른 짐승들이 연합해서 저런 행위를 짓밟으려 일어났을 것이고, 그렇게 정글은 견제와 견제, 악과 악, 복수와 복수가 뒤섞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다르다. 하나의 거대한 악만이 존재하기에 저러한 행위에 반대급부로 보복할 수 있는 또다른 힘이 없다. 그들은 그저 사냥감이다.

"정체도 알 수 없는 그 엘프 하나에게 모든 게 걸려 있다니 우습군."

주세창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

"입 닥쳐."

유예린이 말했다.

다른 클랜들은 쥬피 썬더에 비해 아직 큰 손실을 입지 않았다.

"지금 당하는 건 우리니까. 너희가 피해자인 것처럼 지껄이지 말라고."

"너무 예민한 것 아닌가?"

"예민한 건 네놈의 자지겠지. 그 토할 것 같은 동영상 보면서 좆을 세운 게 누구였더라."

"말이 심한데. 네 마스터의 일은 안타깝지만, 그런 처지라 해도 네 무례를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아직도 한계를 안 넘었어? 난 진작에 꼭지가 돌아서 누구든 죽여버리고 싶은데. 응?"

"진정해라, 유예린."

"너라면 진정할 거냐!?"

유예린이 일어섰다. 그녀는 안절부절 제 자리에서 왔다갔다하며 말했다.

"아, 안되겠다. 우리는 간다. 남은 잔당이라도 가서 놈들과 싸우고 죽을래. 패배해도 좋다. 싸운다. 마스터에게 간다."

"미쳤나?"

"안 미치고 배겨, 이 개새끼야!"

유예린이 살기를 올렸다. 주세창과 길현수, 강성이 마주 일어섰다.

"일단 가라앉혀라. 유예린. 말을 들어보라고."

"입 닥쳐. 강성. 처음에 우리더러 탐색전이라고, 아니, 어차피 개인전은 압승이고 여차하면 연합하면 된다고 마스터를 꼬드긴 게 너였잖아?"

"지나간 일이다. 나도 그럴 줄은 몰랐고."

"나도 너 죽여버리고 그럴 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냐?"

강성 또한 얼굴에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정도껏……."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들의 기세를 사그러뜨릴 만큼 갑작스러운 전화벨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소리였으나, 기이하게도 그들의 살기 어린 대치 한 가운데를 잘라내듯, 모두의 신경이 일제히 그 벨로 향했다.

주세창의 휴대폰이었다. 그의 심복 전형태로의 연락이었다.

그가 유예린을 노려보다가, 그것을 집어들었다. 강성이 말했다.

"스피커폰으로 해."

지금 모든 걸 공유해야 한다. 주세창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스피커폰으로 열고 탁상에 올렸다.

"형태야, 무슨 일이냐."

/여어. 잘 있냐, 주세창./

"……!"

/동영상 멋졌지? 지금 계속해서 속편 찍고 있는데 더 보내줘?/

"길수인가."

/오오. 침착하네?/

"네놈의 수작에 놀아나지 않겠다."

/야, 그렇다는데? 세창이가 침착해, 침착해. 니 감상은 어때?/

그리고 저 멀리서 헐떡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 마스터…… 흣, 하악! 제발 그, 그마아…… 하아앙!/

"……너, 너……!"

/내가 너희 클랜원 숨겨놓은 곳도 모를 줄 알았냐? 다 내 손바닥 안이다, 쨔샤. 니 애인 졸라 잘 조이는데?/

"너 이 개새끼야-!!"

/왈왈. 왈왈왈왈! 왈왈! 푸하하하하핫. 근데 어떡해, 진짜 개꼴로, 그래, 암캐꼴로 꼬리 흔드는 건 니 애인인데. 니 부하도 있고, 니 친구도 있고. 신난다, 신이 나. 야, 이 썅년아, 더 조여보라고./

/흐윽, 흐, 흐읏, 제발, 용서…… 하앙, 흐으읏……!/

/난 말이야, 고상한 척 하는 니놈들에게 신물이 나. 어차피 여기는 정글인데, 뭐 도를 세운답시고, 푸하핫. 내 도를 보여주마./

"너 이 개새끼, 내가, 지금 내가 너 죽이러 가니까, 이 씨발……!"

/정글넷 중고품월드 확인해라./

그리고 통화가 끊겼다.

주세창이 주먹을 휘둘러 벽을 때렸다.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유예린이 옆에서 피식 웃으며 주세창이 했던 말을 돌려줬다.

"진정해라, 주세창?"

"너 이 씨팔련이……."

"시끄럽고, 중고품월드나 확인해봐. 무슨 소리인지."

그들이 각자 휴대폰으로 정글넷에 접속했다.

주세창도, 유예린도, 강성도, 길현수도 머릿속으로는 무슨 일인지 웬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굳이 확인하기 전에 입을 열지 않았다.

이내 주세창이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가자. 유예린."

"……."

"가자고. 니 말대로. 우리 다 죽어도 좋으니까 이 개새끼들을……."

그들이 우려했던 그대로였다.

수많은 여자들, 남자들, 그들이 붙잡은 클랜원들을 정글넷에 판매하겠다 올린 것이다. 남자도, 여자도 마찬가지였으며 주세창의 애인인 마녀조차 비참한 모습으로 거래품목에 올라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중고품 월드는 본래가 그런 용도이며, 거래란에 '인간' 품목도 카테고리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너무나 잔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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