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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끝까지 밟아 졸라 세게 박아
늪에 빠진 것마냥, 올가를 끌어당기는 미지의 힘에 그녀가 비틀대다가 빗자루에서 중심을 잃었다.
"아흣!"
그녀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끌어모아 다시금 날아오르려 했지만, 자신을 지상으로 인도하는 언령의 힘이 더 강력했다. 결국 그녀는 몇 바퀴를 허공에서 휘돌고는 운무 징기스칸 클랜과 쥬피 썬더 클랜 한 가운데에 착지하게 되었다.
"……."
예상 밖의 상황에 올가가 침을 삼켰다.
양측이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인후야, 잘했다."
길수가 말했다.
"이번엔 저 여자를 완전히 사로잡아봐. 너의 그 랩으로."
인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에 떨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녀는 강력한 마도사이다.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서는 다시금 인후의 언령이 필요하다. 인후가 몸을 천천히 흔들며 새로운 벌스를 구상했다.
그리고 올가는 그런 인후를 놓치지 않았다.
"저 녀석이군."
올가가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인간의 언어는 아니었다. 노랫말 같기도, 허밍 같기도 한 기묘한 음색, 엘프들의 언어였다. 그리고 그녀의 주문을 따라 허공에서 떠오른 존재가 있었다.
사람의 모습 같기도 한, 에너지의 집합체, 자연력의 화신.
정령 소환.
정글에서도 오직 엘프에게만 허락된 대자연의 힘이었다. 올가가 숨겨둔 한 수를 발휘한 것이다. 정령의 힘이 공터를 가득 메웠다. 엘프 중에서도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은 고위 하이 엘프의 피를 타고난 극소수, 그리고 올가는 그 혈통에서도 뛰어난 정령술사였다.
악의 소굴 러시아에서, 그리고 예브게냐의 휘하에서 피를 보아야 했기에 정령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자연 그 자체인 정령들을 살육에 사용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마도를 이용했었다. 그러나 절체절명인 지금, 그녀의 명에 따라 정령이 소환된 것이다. 세계에게 사랑 받는 존재, 이제 멸종이 머지 않은,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불멸의 종족, 엘프가 가진 궁극의 힘인 것이다.
그 존재감을 느낀 길수가 말했다.
"후퇴한다."
"네?"
"저거 못 이겨. 후퇴한다!"
인후 또한 정령을 마주하자마자 입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정령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목이 꿰뚫릴 것이다. 인후의 언령은 분명 강력하지만 랩으로 롸임과 플로우를 쌓기 전까지는 미약한, 그야말로 극악의 제로백과 제고의 최고속도를 동시에 타고난 불운의 병기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가 그를 지켜야 하지만 블리자드 오브 스톰과 빙하기(氷河期)에 시달린 그의 클랜원들은 정령을 막아낼 수가 없다.
"빨리 도망쳐!"
인후는 몸을 돌리기 직전 정령의 눈을 보았다.
정령은…… 아름다웠다.
바람을 닮았구나. 아니, 밤이 열대야를 관통하는 한 줄기 선풍이구나, 너는 바람이다. 우리가 들었던 너는 허공을 찢는 태풍의 이명, 산 정상에서 귓전을 스치는 상쾌한 바람, 이른 아침 나를 깨우는 미풍의 속삭임, 그런 것들이 너인 줄로 알았으나, 그러나 너는 실은 모든 소리이다. 우리가 들었던 모든 소리는 공기를 타고, 바람을 타고 입에서 귀로, 세상에서 뇌에게로 네가 밀어올렸던 것이다.
"뭐해! 빨리 가자 랩퍼!"
길수가 인후를 흔들었다. 그제야 인후는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운무 징기스칸, 대륙을 평정한 최악의 유목 민족의 왕을 본 딴 이름처럼 정복자의 모습으로 쥬피 썬더를 밟았고, 더 큰 강자를 만나자 다시금 유목 기마병과 같이 신속하게 후퇴하는 것이다.
이기는 싸움만 한다.
이것이 운무 징기스칸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도주했다.
올가의 뜻에 따라 소환된 정령이 빙글, 돌아 이제는 쥬피 썬더 클랜을 향했다. 클랜의 강력한 지도자들을 잃은 그들은 신속히 도주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부상 당해 쓰러진 이들, 블리자드 오브 스톰에 좀먹히고 빙하기에 얼어붙은 클랜원들을 부축하고 있었다.
올가와 정령이 자신들을 바라보자 쥬피 썬더 클랜원들은 긴장했다. 모두 움직임을 멈추었으나, 힐러의 재능을 타고난 치료사 왕택춘만은 모두를 무시하고 끊임 없이 돌아다니며 치료를 행하고 있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올가가 살벌하게 선언했으나 왕택춘은 올가를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힐을 시전했다. 그는 덜덜 떨고 있었으나 결코 멈추지 않았다.
"내 말 안 들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엘프!
올가는 저택을 벗어나자마자 태세전환하여 타인을 핍박하는 것이다. 본래 그랬는지 저택에서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수현의 저택 여인들마냥 올가는 성질을 부렸다.
"죄다 얼려줄까?"
"주, 죽는 동료들을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정글에서 중요한 건 동료가 아니라 네 목숨 하나뿐인데, 대체 어떤 꼰대한테 그런 성실한 인간존중을 배우셨을까나."
올가가 예쁜 입술을 오물거리며 이죽거렸다. 마치 어린애가 억지로 어른 흉내를 내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녀의 정령에게 압도되어버린 쥬피 썬더 클랜원들은 고개 숙이고 벌벌 떨 뿐이었다.
왕택춘이 힐링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약육강식의 정글에 도를 세우고자 한 도사님이 운무시에 있었습니다."
"……?"
"그분은 처음 능력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하던 저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런 힘을 타고났다면, 네가 해내야 할 사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너는 마땅히 그 힘을 세상의 선(善) 위해 쓰도록 해라.
"저는 그분의 뜻을 따라 죽어가는 이들을 구할 것입니다. 당신이 목숨을 핍박한다 해도!"
그렇게 소리치는 왕택춘의 힐링에, 죽은 듯 누워 있던 남자가 콜록,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사선을 헤매던 자를 생명의 손길로 구해낸 것이다. 그 경이로운 모습에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올가가 당황해서 말했다.
"그, 그래?"
"그렇습니다!"
왕택춘의 사명감에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한 올가는 죄책감에 뻘쭘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럼 하던 거 해."
"고맙습니다!"
그리고는 왕택춘이 벌떡 일어나 치료의 술을 마구 시전하기 시작했다. 쥬피 썬더 클랜의 동료들도 그를 도와 마력을 나누고, 힐링이 가능한 마법사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다들 힘을 합쳐서 치료한다!"
전선의 나이팅게일과 같은 기세로 왕택춘이 소리쳤다. 그는 쥬피 썬더 클랜원뿐 아니라 올가의 마법에 쓰러진 운무 징기스칸 클랜원들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올가는 엉거주춤하면서 옆에 서 있었다.
대충 사태가 진정되었다. 산 자도 있고 죽은 자도 있었다. 그늘진 틈새에서부터 정글의 청소부 스캐빈저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도 운무시에 거주하는 능력자십니까?"
"으응…… 그런데……?"
"도와주십시오. 운무 징기스칸은 운무시의 평화를 깨고 있습니다."
왕택춘이 말했다.
"운무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정글의 주민들이 세상을 위해 힘을 쓴다는 꿈이 실현되기 시작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 저놈들이 나타나고 나서……."
쥬피 썬더 클랜의 마스터 정혜리는 꿈이 있었다.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냉혈한 정글이지만, 이 힘을 잘 사용해서 평화로운 땅을 만들고, 운무시라고 하는 지역에서나마 정글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어려운 일반인들을 돕고 흉악한 자들을 제압하는 이상향을 만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쥬피 썬더 클랜과 몇몇 소수의 클랜, 분쟁을 떠나 무력의 공백지대인 운무시로 온 정글의 주민들이 협약을 맺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운무시에 존재하던 한 도사, 선기를 수련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특히 힘을 갓 각성한 정글의 청소년들을 계도하는 데 힘을 썼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무 징기스칸…… 그놈들이 왔습니다. 운무시의 괴물이 생각보다 조용한 존재라는 걸 알고서는 평화롭게 선행하며 살아가는 클랜들을……."
"그 도사는 뭐하는데?"
"일 년전…… 곤륜(崑崙)의 부름을 받고 잠시 떠습니다. 그분만 계셨어도 이리 쉽사리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그렇구나. 근데 난 운무 징기스칸의 딱 한놈한테만 용건이 있어서."
"운무 징기스칸의 클랜 마스터는 무서운 자입니다. 한 명이라고 한들 엘프께서 건드리신다면 그는 엘프님을 끝까지 추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땐 다 죽여버리지."
"저희가 돕겠습니다. 아니,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운무 징기스칸을 없애지 않으면 저희도, 당신도 계속될 문제입니다."
일이 커지고 있다. 올가는 일이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새, 생각해볼게. 오늘은 날이 늦어서."
"연락처라도!"
"시끄러. 난 갈 거니깐 알아서 해."
올가가 빗자루를 불러들여 올라탔다. 왕택춘이 그녀를 애타게 불렀으나 올가는 슝, 하고 날아가버렸다.
올가가 빗자루 위에서 혼자 심통을 부렸다.
"아! 그 힙찔이 짜증나! 또 이상한 것들 얽혀서 귀찮아졌어."
*
운무 징기스칸 클랜은 도주에 성공했다. 그들은 곧바로 클랜 아지트로 집결했다.
그들의 마스터를 만나기 위함이다.
"마스터께서 나오신다."
길수가 말했다.
운무 징기스칸 클랜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버려진 폐공장, 그곳에는 운무 징기스칸을 뜻하는 말탄 기마궁수의 그림이 여기저기 그래피티로 그려져 있다. 천마총의 수렵도를 닮은 모습이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걸어나오는 존재가 있었다.
얼굴은 알 수 없다. 가면을 끼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코트를 걸치고,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맨살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묘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자 일대가 긴장하며 공기가 굳어버렸다. 자유분방한 운무 징기스칸의 클랜원들이지만 지금은 숨을 죽이고 클랜 마스터에게 집중했다.
"방해자가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마스터는 잠시 뒷짐을 지고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다음에는 쥬피 썬더를 완전히 끝장내겠습니다."
"쥬피 썬더는 패퇴했고, 일대의 군소 클랜들과 연합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쥬피 썬더가 머무르던 영역은 지금 공백이다."
"그 말씀은……?"
운무 징기스칸의 클랜 마스터가 박수를 치자, 그가 나왔던 철문에서 다시 몇 명의 인원이 걸어나왔다.
박동근이었다. 그는 수갑을 채운 알몸의 김재현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몇 번이고 당했는지 얼굴이 부어 있고, 엉덩이 사이로 흐른 핏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걸음도 엉거주춤한 것이, 이미 클랜전 자리에서 그를 범했던 것이다. 망가져버린 듯한 공허한 눈이었다.
그리고 강유종이 뒤를 이었다. 그는 수갑 채운 두 명의 여인, 김아현과 정혜리를 데리고 걸어나왔다. 그녀들 또한 알몸이었고, 강유종과의 싸움 때문에 온몸에 멍이 퍼렇게 들어 있었다. 김아현은 허리를 펴고 당당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정혜리는 이미 전의를 잃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모이자 강유종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고 곁에 선 여인들이 엉덩이를 철썩, 때리는 여유를 부였다.
"이렇게 쥬피 썬더의 최고 전력인 셋을 사로잡았다. 각 대전에서 수고한 박동근, 강유종에게 패자를 처분할 권리를 준다. 승자독식. 마음껏 즐기라."
"크크, 알겠수다, 마스터."
"잘 들었지? 오늘밤 즐겨보자고."
박동근이 히히 웃으며 김재현에게 어깨동무했고, 김재현은 벌벌 떨었다. 강유종은 양측에 세운 여인들에게 팔을 둘러 둘의 가슴을 주물렀다.
전리품을 획득한 승자들에게 클랜원들이 야유 섞인 환호를 던졌다.
그리고 그들 뒤로 걸어나오는 또 한 명이 있었다.
황인후였다.
"새로운 우리의 클랜원이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고 들었다. 정체불명의 마녀에게서 우릴 구해낸 공신이다. 황인후의 언령은 앞으로도 클랜의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인후의 랩을 기억하는 클랜원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랩퍼! 멋지다!"
"공연 안 하냐! 데뷔해! 데뷔!"
"휘이이익! 휘익! 랩퍼! 랩해봐!"
인후는 이러한 환호가 부끄러웠으나, 동시에 가슴 한 켠에서 언령의 힘이 고개 쳐드는 것을 느꼈다. 한 가지가 새삼 분명해졌다. 그의 언령은, 라임을 거듭할 때뿐 아니라 청중들의 호응을 얻을수록 또한 강해지는 것이다.
"황인후에게 공에 걸맞는 보상을 내리겠다."
"와우!"
"자, 무엇을 원하나? 황인후."
인후는 이런 것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클랜에 합류한지도 얼마 안 된 새내기였기에 갸웃하며 마스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곁에 선 강유종이 인후의 어깨를 쳤다.
"인후야. 보통 여자, 돈, 이런 거 달라면 돼."
"여, 여자?"
"새끼 신난 것 보소."
"아니, 놀라서……."
"흠…… 좋아, 여자 하나 달라고 해서 오늘 우리 집에 와. 얘들이랑 다같이 놀아보자. 응?"
강유종이 씩 웃으며 자신이 끼고 있는 두 여자를 더 강하게 끌어당기며 가슴을 꽉 주물렀다. 정혜리와 김아현은 그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특히 너, 얘한에 꽂혔잖아?"
강유종이 김아현의 등을 인후에게 떠밀며 말했다. 갑작스레 떠밀리자 알몸의 김아현이 황인후에게 안기는 꼴이 되었다. 그녀의 가슴이 느껴졌다.
"……!"
"마스터, 얘한테 여자 하나 줘요!"
"합당하다. 황인후, 여자를 원하나?"
인후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랜에 들어오면서 스카운터인 윤희와 첫경험 한 이후 그에겐 예전과 다른 권력과 힘이 주어진 것이다. 이제 그저 그런 여자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글의 미녀들을 약탈하고 범하는, 그야말로 고대 유목민 전사가 된 것이다. 인후의 입가에는 어느새 강유종을 닮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데려오도록."
마스터가 눈짓하자, 길수가 끄덕이고 그들이 나왔던 철문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몇 명의 여인들을 데리고 나왔다.
모두가 미인들이었다. 정혜리와 김아현처럼 클랜전 후 운무 징기스칸에게 흡수된 수많은 클랜의 일원이었던 여인들이다. 마스터가 말했다.
"한 명 고르도록."
운무 징기스칸의 클랜원들이 가장 즐기는 논공행상의 장, 그들이 오늘의 주인공인 인후에게 환호했다.
"저기 가운데 애 골라서 빌려줘!"
"맨 왼 쪽! 백마가 좋잖아! 천 줄게!"
"씨팔, 내 노예 둘이랑 바꾸자!"
하지만 인후는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안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