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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적과 흑
비스트가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기운만으로 간담이 서늘한 곳이다. 이곳은 복마전이다. 반도에 자리한 저택 하나가 그녀가 살아 여태 보아온 모든 것보다 두려웠다. 부지를 휘감은 온갖 결계와 마법들은 물론이고, 저 복잡한 마력 구조를 아무렇지도 않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의를 잃게 만든다. 새롭게 태어난 이후, 그는 처음으로 다시 약자가 되어 목숨을 구걸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목적을 위해 높은 곳에서 아래로 추락하여 뒹굴 줄 아는 자이다. 어떠한 상황이든 그녀는 웃을 수 있다.
"멋지군."
"괜찮겠습니까?"
"물론."
초산이 그녀를 수행했다.
겨울 추위는 한층 그 위세를 떨쳤다.
비스트는 들러붙는 청바지에 그린 컬러의 N3B 파카를 후드까지 올려 걸치고 있었다. 잔혹한 성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본 누구나 감탄하던 날씬하고 탄력 있게 모양새 잡힌 하얀 팔다리는 겨울 복색에 파묻힌 채였으나, 후드 퍼 사이로 빼꼼 드러난 새하얀 얼굴이 그녀의 미모를 드러냈다.
"뭐 어때. 최악은 어차피 죽는 것. 난 이미 예전에 죽었어야 했지."
초산이 미소지었다. 이것이 그가 모시는 자, 비스트이다.
초산 또한 이미 죽었어야 할 것을 김상호이던 비스트가 구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의 어둠을 집어삼키며 온갖 쾌락을 누리고 있다. 그 또한 비스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다양한 하드코어한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가 원하는 누구든 안을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쾌락은 바로 이것, 죽음을 향해 달려들고 결국 살아남을 때, 그는 희열을 느낄 수가 있다. 비스트 또한 그럴 것이다.
비스트가 벨을 눌렀다.
대답 없이 문이 열렸다. 아름다운 저택이었지만, 괴물의 아가리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정원을 지나 현관을 열었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 키시노가 있었고 주위에는 그가 익히 알았던 수현과 이브린, 정하들이 있었다. 비스트는 싱긋 웃었다.
옆에 선 메이드복장의 하프엘프는 하녀겠지.
"……!"
미세하게나마 수현의 미간이 살짝 비틀렸다.
지금 오연하게 선 저 소녀가 그의 목표 비스트였다. 자신의 위치를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외투를 벗어 메이드 복장에 올가에게 건내고 있었다.
덥군, 하고 외투를 벗어던지자 들러붙는 청바지와 검은 반팔 티셔츠만을 걸친 채다.
수현의 미간이 한층 찌푸려졌다.
마치 이브린의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적발에, 짐승을 닮은 노란 눈동자였다. 흰 피부는 눈처럼 희고, 낭창한 팔다리는 가늘었으나 연약하다기보다는 근육으로 잘 짜여졌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모양새가 건방지며, 또 시원하다.
수현의 입매가 비틀렸다.
저 모습은.
수현의 취향을 저격한 것이다.
마치 이브린이 건강하게 자라 운동에 힘쓰면 저런 모습이 될 것 같다. 비스트의 대범한 몸짓에 이따금 티셔츠가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하얗게 마른 배였으나 희미한 11자 복근이 비쳤다.
"……!"
수현은 키시노보다 저 비스트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요."
비스트가 수현과 이브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이놈은 김상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다 알고 있으시겠군요. 저는 김상호입니다."
비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긴장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 같다.
"절 죽이고 싶으시겠죠."
"아니."
수현이 대답했다. 비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했던 짓들이 있는데도요? 정하 님은 절 죽이고 싶지 않습니까?"
"음…… 생각하는 중이야."
정하가 수현의 곁에 앉아 고개를 돌려 가볍게 입맞췄다.
비스트는 예상 외로 그녀를 적대하지 않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그녀가 생각하던 전개가 아니었다. 좋은 쪽이지만 예측이 틀리자 애매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김상호는 죽었는데."
안겨드는 정하를 팔로 감싸면서 수현이 비스트를 쳐다봤다. 비스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착각하는 거 같은데, 너 김상호 아냐."
비스트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서 눈을 굴렸다. 초산은 뒤에 물러서 사태를 관망했다.
이브린이 말했다.
"사람의 뇌를 먹었다고 사람이 되는가, 아브락사스여."
*
아브락사스를 이용한 크로울리의 진화연단, 더 나은 존재로의 변이는 상상하는 것처럼 편리한 것이 아니다.
엄청난 고통과 육체의 붕괴를 이겨내서 새로운 육체와 마력을 얻어 더 강력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실체는 다르다.
강력한 마력 덩어리이자 존재의 씨앗인 아브락사스가 대상의 생체 정보를 읽어들이는 것이다. 김상호의 기억들을 아브락사스는 흡수했다. 뇌를 흡수했다.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움직이는가. 인간의 신경계를, 모든 육체의 구성요소를 아브락사스가 빨아들여 인간 육체의 지도를 흡수한 뒤, 개화하여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실은 김상호조차 아브락사스의 거름인 것이다.
"……."
"김상호를 기반해서 그 녀석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 너는 김상호가 아니다. 김상호를 잡아먹고 태어난 새로운 생명이지."
"믿기 어렵군요. 그렇다 해도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곧 김상호 아닙니까?"
"너와 실존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이브린이 웃었다. 그녀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러므로 우린 너를 김상호로 보지 않는다."
"……그럼 이야기가 쉽겠군요."
"아니. 쉬워질 건 없어."
수현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자. 키시노는 널 죽이고 일본을 찾아달라고 했다. 넌 뭘 제안하러 왔지? 비스트."
"키시노는 무슨 대가를 주었습니까."
수현이 웃었고 분위기를 살피던 키시노가 대신 대답했다.
"그걸 알려줄 필요는 없지? 네 조건을 말해봐."
"키시노는 내 여자가 되기로 했어."
"……."
키시노를 무시하고 수현이 대답했다. 키시노가 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수현이 비스트에게 다가갔다. 소녀의 몸인 그녀는 수현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그녀의 기억, 아니, 그녀가 흡수한 김상호의 기억 속에서 수현은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소년이었고, 겉으로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안에 깃든 힘은 미증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존재이고, 노골적인 힘이 그녀의 육체를 언제든 가닥가닥 찢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느낀 절망감보다도 강한 두려움이 비스트를 감쌌다.
하지만 그는 비스트이다.
김상호가 아니어도 좋다.
광기와 불굴은 여전히 그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는 더 드리죠."
비스트가 씨익 웃었다. 이가 환히 드러나는 시원한 웃음이었다.
"일 년. 아니, 육개월만 기다리시지요. 그럼 저는 키시노를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비스트가 나른하게 웃었다.
남자의 기억을 가지고, 그때와 같은 성적 취향으로 여자들을 희롱하고 도구로 여성의 순결을 빼앗고 능욕하고 남자와 같이 정복하는 쾌감에 취하는 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육체이기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아름답고, 자신의 광기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내심으로 자신을 안고 싶어한다.
그리고 눈 앞의 수현, 처음으로 마주한 자신을 마음대로 짓밟을 힘이 있는 수컷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육체에 욕정함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저 또한 당신의 애인이 되어드리죠."
수현은 웃고 말았다.
"키시노의 클랜을 무너뜨리고 키시노를 붙잡아 내게 넘기겠다고?"
"키시노 하나보다는, 나도 함께 얻는 게 좋지 않겠나? 꼬마."
이제 존대는 그만 뒀다. 비스트는 마치 김상호일 때와 같은 어투로 수현에게 말했다. 새하얀 얼굴, 광기만을 담았던 그 노란 눈동자가 이젠 유혹의 빛을 띄었다. 초산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얼굴이다.
"그냥 지금 널 범할 수도 있는데?"
"자결할 거야."
"다시 살려내서 재갈을 물릴 거야."
"내 몸은 취해도 내가 네 좆을 빨아주는 일은 없겠지."
"조교하면 내 발을 핥게 될 텐데."
"강제로 날 가지는 게 좋아?"
비스트가 수현의 가슴에 손끝을 얹었다.
"육개월만 기다리면 내가 스스로 내 발로 찾아가 네게 키스해줄 텐데."
"……."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비스트의 말이 옳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수현은 지금 당장 이 소녀를 끌고 가 안고 싶어졌다.
"네 제안들을 역으로 키시노가 할 수 있단 생각은 안 드나?"
"전혀."
비스트가 수현의 오른손을 붙잡아 자신의 입가로 가져왔다. 코끝을 손가락에 대고 킁킁대고는, 씨익 웃었다.
"날 죽여달란 제안이고 뭐고, 저년은 이미 너한테 반해서 질질 싸고 있잖아? 좀 다르지?"
수현은 웃고 말았다.
뒤에서 듣고 있던 키시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잠깐…… 수현……."
"남은 육개월, 저년이 바둥거리며 발악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결국 절망하고 나한테 사로잡혀서 너한테 넘겨지는 거야. 너는 지켜보기만 하면 돼."
비스트가 속삭였다.
"그때 네가 저년한테 쑤시고 있으면 내가 다가가서 키스해주지."
수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넌 정말 김상호를 닮았구나."
수현 또한 김상호에 대해 알았다. 수현에게 덤비고 저지른 악행들을 논외로 한다면 대단한 남자었다.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온 남자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대담하게, 철저하게, 때로는 비굴하게 역경을 이겨 왔다.
"칭찬이지?"
"글세. 네가 약속을 지킬 거란 건 어떻게 믿지?"
"음……."
비스트가 턱끝을 매만지다가, 예의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키스할까, 꼬마."
"좋아."
비스트가 한 손으로 수현의 뺨을 붙잡고, 잠깐 고민하다가 입술을 맞댔다. 혀가 잠시 맞붙었다가 떨어지는, 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은 입맞춤이다.
둘의 계약이 성립하는 순간이었다.
키시노의 표정은 얼어 있었다.
비스트가 비웃으며 말했다.
"거기,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시간 없어."
"수현…… 어떻게……."
키시노가 원망어린 눈으로 수현을 보았다.
수현은 키시노를 쳐다보며 음……, 하고,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 싱긋 웃었다.
"뭐, 이렇게 됐네? 화이팅."
"아……."
키시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하, 예브게냐, 올가, 이브린, 누구도 그녀의 사정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거나, 지겹다며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나고 있었다.
수현은 비스트를 쳐다보았다.
김상호, 아니, 김상호를 집어삼켜 인간을 알고, 인간이 되어버린 인공생명체, 아브락사스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물론이지."
"내가 네 말을 들을 거라고 믿었어?"
"당연."
"어떻게?"
수현은 정말 궁금해졌다.
비스트가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수현이 귀를 가까이 하자, 비스트가 속삭였다.
"넌 나쁜 새끼니까."
"……."
"정하가 네 애인이 되었지. 예브게냐는, 그리고 이브린은?"
죄다 악당들이잖아?
비스트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이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만만한 가운데 동공에 광기가 이글거리고, 그러면서도 냉철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들자 수현은 다시 키스하고 싶어졌다.
"악은 악이 알고, 악에게 끌리지. 키시노보다 나랑 자고 싶잖아 꼬마?"
수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맞아."
수현은 육 개월 후가 기다려졌다.
키시노는 구원을 찾아 이곳에 왔고,
비스트는 악을 찾아서 왔다.
비스트가 옳았다.
<2-4. 적과 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