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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적과 흑
키시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유나였다.
─ 품에 안은 듀랜달, 검신만 남은 그 조각의 끄트머리를 양손으로 잡는다.
수현이 손을 흔들었다. 예브게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고, 이브린은 그저 수현에게 머리를 기댔다.
─ 다리에 힘을 주고, 단전에서부터 마력을 가닥가닥 그러모았다.
키시노가 팔짱을 끼면서 갑작스레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어냐고, 긍정적 대답을 주러 부른 것이냐고, 눈을 휘면서 물으려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유나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웃으려던 얼굴이 굳는다.
단숨에 적을 끝낼 때에는 일시에 번뜩이는 섬광과 같아야 한다.
─ 마력을 터뜨리면서 키시노에게 달려들었다.
테이블을 넘어, 두 여인과 노닥거리는 수현의 앞을 지나가, 이내 키시노의 앞이다. 도약하는 것, 그녀의 놀란 눈동자를 인식하는 것, 목표를 꿰뚫는 것, 모두 일시에 이루어진다. 칼날만 남은 검이나 적의 중심을 찌르는 데에는 충분하다. 온전한 듀랜달은 오히려 그녀에게 과분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성검 듀랜달, 롤랑에게서 전해진 성검이다.
─ 칼날이 키시노의 복부를 관통했다.
아직 찰나는 끝나지 않았다. 칼날을 비틀었다. 피가 쏟아지면, 유나가 적에게로 향했던 일순간의 섬광은 적의 생명과 함께 암전할 것이다.
"……?"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건 수현이었다.
마스터와의 감동적인 재회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유나가 부서진 칼날을 붙잡고 뛰어들어 키시노를 찔렀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처럼 표홀한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단숨에 적의 복부를 꿰뚫었다. 한없이 제로에 수렴하는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의 마력이 깃든 듀랜달에서 적의 생명을 사그라뜨리는 심연의 삭풍이 키시노에게로 불어들었다.
그 찰나를 수현은 인식하고 있었다.
이 순간이 끝나면 듀랜달에 깃든 마력과 함께, 키시노의 생명은 커튼이 내려가듯, 별빛이 어둠에 잠기듯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수현은 그녀의 공격을 저지했다.
수현의 지배를 받는 어둠이 듀랜달의 끄트머리로 소용돌이치며 휘감듯, 키시노의 복부를 꿰뚫어가는 한 점으로 빨려들었다.
찰나이나, 그에게는 영원과 같다. 찰나와 영원은 다르지가 않다.
우주와 시간은 한 점에서 시작되었고, 한 점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따라서 모든 상황이 끝났을 때, 유나는 키시노의 복부에서 샘솟는 피 대신, 자신을 가로막은 이글거리는 어둠을 볼 수 있었다.
"……!"
그제야 모두가 키시노와 유나를 보았다. 키시노가 뒤로 튕겨나 쓰러졌고, 날카로운 얼음이 생겨나 그녀의 목을 겨냥했다. 올가가 마력을 뻗어 유나를 휘감았다. 유나가 무릎을 꿇었다. 예브게냐의 정신지배가 그녀 육체의 통제권을 빼앗았다. 유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양손을 뒤로 고정했다.
수현이 키시노를 살폈다.
살짝 찔리긴 했으나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수현이 유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온몸의 통제권을 잃고 무릎 꿇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예브게냐의 지배권을 이겨낼 수는 없다. 그녀는 눈동자만 굴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현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겁에 질렸다. 자신을 가혹하게 다루던 수현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수현의 발길질이 그녀의 배를 다시 한 번 때렸다. 엉망으로 멍이 들었던 복부가 다시금 짓이겨지고, 내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그녀가 꺽꺽 헛구역질을 했다. 구토하듯 컥컥 타액을 질질 흘렸다.
"그…… 아니구나?"
수현이 발로 그녀를 뒤집고는 다시 옆구리를 걷어찼다. 손속이 가혹해져, 그녀의 장기가 뒤틀렸다.
"착각했네. 나는 키시노가 네 마스터인 줄 알았어."
유나는 고통 속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고통의 신음과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가 뒤섞여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는 짐승 같은 소리였다.
"내 마스터가 저딴 년일 것 같았어……?"
입에서 핏물이 배어나와, 유나이 이 사이사이가 붉게 물들었다. 피 섞인 치아를 드러내며 유나가 드러누운 채 씨익 웃었다.
"내 마스터는 비스트, 그 분뿐이다."
*
키시노가 쇼파에 걸터앉아 수현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나 때문인데요. 미안해요. 착각해서."
"그럼 빚으로 해두죠. 갚는 방법은 알겠죠?"
"비스트를 죽여달란 거죠? 그렇게 하죠. 어차피 김상호에게 빚도 있고……."
"김상호인가요?"
수현이 애매하게 입꼬리를 움직이다가, 이내 웃엇다.
"그렇든 아니든 상관 없죠."
키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린을 거느린 남자이다. 이런 일은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닌 유희에 가까운 것일 터다. 자신도 일본을 지배해온 강력한 클랜의 수장이지만, 이런 이들을 마주하면 자신의 모든 투쟁이 무의미한 것만 같다. 균형의 수호자들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모든 것은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고 그들의 손끝을 따라 세상은 흐르고 있었고, 자신들은 그저 장기말에 가깝다는 슬픈 느낌.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그녀를 우울하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감상에 취할 시간이 없다. 비스트는 시시각각 그녀의 기반을 조여들고 있었다. 이미 한국이다.
유리한 것은 자신이지만 왠지 불안했다. 비스트는 늘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가 어떤 수작을 부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죽는 것을 본 후에야 마음을 놓을 것이다.
"사과의 뜻으로 약속할게요. 키시노 씨 원하는대로 될 거에요."
수현이 싱긋 웃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키시노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고, 그 힘의 크기 만큼이나 아름다운 소년이다. 그녀의 전 생애에 이런 존재를 마주한 적은 없었다. 자신이 몸을 약속한 자이기도 하다. 왠지 볼이 뜨겁다.
선수금이라며 입을 맞췄던 기억이 선연하다.
이 남자가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싹트는 본능은 이성보다 강한 것이다. 아랫배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왔다. 저 턱선,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눈동자에 가슴이 떨렸다. 자신보다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 힘만 강한 쓰레기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에게 선수금이라며 허락한 입맞춤을 후회했다. 그때 자신은 이미 사로잡힌 것이다.
비스트의 부하가 듀랜달을 자신에게 찔러들었을 때, 자신을 휘감은 그의 어둠은 안온했다.
정글에 투신한 이후부터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 안겨 잠들면, 자신보다 강한 이의 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눈을 감을 수 있겠지. 그 전에 키스한다면 달콤할 거다. 온갖 생각들이 떠올라 그녀를 어지럽혔다. 키시노는 잡념을 떨쳐내려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비스트가 한국으로 왔어요."
"잘 됐네요."
"죽여줘요."
"죽일지는 생각해보고요."
"안 죽이면 계약은 없던 거에요. 선수금으로 충분해요?"
키시노가 눈웃음치며 말했다. 수현이 미소를 띄며 고개를 갸웃했다.
수현이 손을 뻗어 키시노의 뺨을 만졌다. 키시노는 가만히 있었다. 수현이 뺨을 훑던 손을 천천히 내려, 그녀의 목을 훑었다. 키시노의 무릎이 살짝 열렸다가 닫힌다. 수현이 쇄골께에 손끝을 얹고, 살갗을 매만지다가 이내 옷위로 손길이 떨어져내렸다.
"……."
키시노가 수현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수현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가슴께를 천천히 주물렀다. 그녀의 무릎이 흔들렸다. 키시노의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벽을 밀고 있는 것처럼 일말의 물리력도 통하지 않았다. 수현의 손이 더 떨어져내렸다.
키시노가 숨을 삼켰다.
청바지 위,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수현의 손이 얹혔다. 중심에…… 수현의 중지가 내려앉았다. 수현은 권태로운 속도로 중지를 위 아래 미세하게 움직였다. 키시노가 허벅지를 오무렸으나 손이 가두어지며 자극만 강해졌을 뿐이었다.
"하아……."
자극에 키시노가 다리를 벌렸다. 그러나 오히려 수현의 손을 허락하는 행태라 애무는 더 적나라해졌다. 키시노가 재차 다리를 오무렸으나, 허벅지가 손을 밀어내 밀착감만 더해졌다. 키시노는 그 기로에서 다리를 벌렸다 오무렸다, 어쩔 줄을 몰라 허리를 비틀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
수현이 웃으며 중지를 꾸욱 눌렀다.
"하윽……!"
키시노의 입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수현이 입을 뗐다.
그저 키시노의 눈앞에 중지를 들어 빙긋 웃었다. 키시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수현이 그녀에게 어깨를 붙이며 속삭였다.
"결말은 정해져 있어요."
"……."
"그냥 지금 할까?"
키시노가 아무 말도 못하자 수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키시노는 수치심, 기대감, 당혹감, 따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보다도 난감한 것은 흠뻑 젖어버렸다는 것이다.
남자에게 희롱당하면서 흥분하는 것 따위 있었던 적 없다. 저항은 수현에게 손쉽게 배제당하고, 언제든 취할 수 있는 여자를 대하듯 다리 사이를 애무당했다. 수현이 중지는 그녀의 구멍을 정확하게 짚어내, 일순간 삽입당하는 듯한 느낌에 허리가 떨렸다.
할까, 하고 다시 수현이 속삭여왔다. 키시노는 고개를 끄덕이고만 싶었다.
그래서 휴대폰이 다시 부르르 떨렸을 때 화들짝 놀랐다.
"……잠시."
분위기를 피할 수 있음에 안도하면서 메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더 당황했다.
"지금……."
"침대로 가자고?"
수현이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완전히 자신의 것 취급하는 그에게 화가 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그러나 이 소식이 우선이다.
"비스트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그녀의 수하가 말한 것은 그것이었다. 비스트가 지금 수현의 둥지로 직접 오고 있었다. 키시노는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