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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적과 흑
태진이 칼을 들었다.
그의 벗인 군용 대검이다. 날을 잘 갈아놓은 칼날이 가파르게 번뜩였다. 케이원 케이투를 위해 생산된 것이지만, 총신에 덧대 총검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태진의 손아귀는 총따위 비할 수 없는 강력한 발사대이므로. 그의 팔이 앞으로 쏘아져나가자 그를 가로막았던 악마가 산산히 부서져 육편으로 화해 허공을 날았다. 지옥의 거름은 언제나 피와 살점이다. 이 자리에는 아마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 한 그루 자라리라.
지옥의 왕들이 바알의 영토를 향해 진군했다. 그들의 연합은 헐겁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어마어마한 물량에 바알의 군세는 막아내기에도 급급했다.
바알이 말했다.
'일 퍼센트의 가능성.'
그것이다. 구십 구 퍼센트는 아마 급류에 휘말린 듯이 바알이 짓밟힐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 퍼센트를 위해 그들은 바알과 함께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진은 지금 악마 한 마리를 죽인 것으로 만족하기에 너무도 일렀다.
저 멀리에서 그를 향해 달려드는 어마어마한 지옥의 군세가 보였다. 온갖 더럽고 추잡하고 음흉하고 사한 것들이 태진을 노리고 진군하고 있었다. 패배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리라. 유일한 돌파구는 저들을 전멸시키는 것. 그러나 탁 트인 대지의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악마들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태진이 씨익 웃었다.
저정도는 죽여야, 그는 오늘의 일 퍼센트를 행했다 말할 수 있으리.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스탑워치가 돌아가고 있었다. 스물 두 시간을 싸웠다. 지옥의 시간은 현세의 열 배.
여덟 시간 안에 저들을 모두 도륙해야, 강의에 지각하지 않는다. 태진이 피묻은 칼날을 혀로 핥았다.
저게 바알의 의형제라는 나이트라이더 맹호 김태진인가.
디아블로군의 대 바알전 사령관을 맡고 있는 벨페고르가 군단을 곁에 세우고서 태진을 바라보았다.
이곳 바알의 영토 동부전선을 홀로 틀어막고 있는 괴물이다.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한 바알이다. 이곳 동부의 길목을 여태 누구도 뚫지 못했다. 오히려 수많은 군세로 진을 친 서쪽 전선이 돌파된 이력이 있다. 벨페고르가 자신의 곁에 선 악마들을 향해 말했다.
"저놈 하나를 죽이지 못 해서야 어찌 대왕께 고개 들겠나."
악마들의 대답은 그르렁거림이다. 짐승에 가까운 악마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거친 울음을 삼켰다.
"전멸하던가, 죽이던가. 둘 중 하나다. 가자."
수만의 악마가 일제히 태진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향해 태진이 함성을 내질렀다. 태진의 포효가 평원을 뒤덮었다.
*
"아 피곤하다 피곤해."
기말고사 기간, 중앙도서관에는 자리 싸움이 한창이었다. 좌석 배정기에는 빈 자리가 생기면 들어서려 기다리는 학생들로 북새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열람실 수많은 빈 자리에는 사람 대신 책가방과 전공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정작 바쁜 곳은 열람실 바깥 테이블이다. 혼란스럽다.
"혼란하다 혼란해."
태진은 전공서를 들고 헤매다가 그냥 포기했다. 저기서 해봐야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자취방을 가거나 카페에서 분위기 잡고 아메리카노 빨면서 책 보는 척이라도 하며 거리 지나가는 여인들이나 구경해야겠다.
공부를 하고 성적이 잘 나온다고 해서 태진의 앞날이 바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이제 지옥의 투사이므로 현세의 성공과 좌절, 눈물 나는 취준생들의 애환따위 먼 일이다. 씨쁠, 아니 그 이하 디제로가 나와도 태진은 웃을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학점보다 배부른 것은 자신의 통장 잔고이기 때문이다.
어제도 벨페고르의 군세를 모조리 학살했다. 성과금이 지급되었다. 이거 참 용병같은 삶이다.
어깨를 어루만졌다. 흉터가 늘었다. 옷 너머에는 뿔에 찔린 상처, 찢긴 상처, 부서진 상처로 얼룩덜룩하다. 어제의 전투로 복부에는 평생 남을 커다란 상흔이 생겼다. 내장이 흘러내렸다. 악마군의 치유술로 치료는 했으나 흉터는 남을 것이라고 했다. 없앨 수도 있지만 굳이 없애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전사의 사고를 하는 태진에게 흉터는 훈장이다. 복부의 흉터는 곧 벨페고르의 목을 상징할 것이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처 하나하나마다 적의 목을 추억할 수가 있다.
태진이 캠퍼스를 나섰다.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래도 아직 대학생이라는 의무감에 억지로 하려 했던 공부를 비킬 핑계가 생겼다. 게다가 연락한 이가 옛 군대 후임이다. 전우애. 밴드 오브 브라더스. 이보다 좋은 핑계가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허용호는 휴학을 생각 중이다. 아니 자퇴를 생각 중인데 가족의 시선 때문에 졸업은 할 것이라 한다.
태진이 택시를 잡았다. 자가용을 사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남자는 람보르기니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태진이 차를 멈추었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용호를 쳐다보았다. 용호가 입을 열려다가 잠깐 머뭇거렸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태진이 차창 밖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낮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차들은 여느 때처럼 신호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 평화로운 평소와 같으나, 그런데 무엇인가가 다르다.
태진의 눈에는 보였다.
정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곳에 한 발을 걸친 셈이다. 그러나 바알을 통한 지옥의 임무 외에 그쪽과 얽힐 일이 없어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 일일까.
이곳의 기운이 혼란하다.
아니 혼란하다기보다는…….
너무나 익숙한 피냄새가 났다. 많이 났다. 그리고 악마보다도 악랄한 기운이 진동을 했다.
나라가 어지러워서 그런가. 뉴스만 어지러운 줄 알았는데 길거리도 그렇다.
"온통 혼란하다 혼란해."
태진은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너무 짙다.
택시가 근처 길가에 멈추었다. 태진은 택시비를 치르고 바깥으로 나섰다. 찬 공기가 뺨을 식혔다. 저쪽, 저쪽에서부터 피냄새가 났다.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르듯 태진은 그 기운을 따라갔다.
호텔이다.
호텔 안까지 들어가야 하나……하고 고민하는데, 문득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호텔 입구에 선 소녀였다.
붉고, 희다. 첫인상이었다.
머리카락이 피처럼 붉었다. 새빨갛다. 눈도 붉고, 그녀가 두른 기운도 붉었다. 보이지 않는 오라가 온통 붉었다. 흰 피부 때문에 적색이 더 도드라졌다. 태진이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 또한 붉었다. 그녀가 자신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 인식조차 붉을 것이다. 온통 빨갛다. 태진은 그녀에게서 눈 돌릴 수 없었다. 색깔이 녹아내리고, 모두 무성영화의 한 장면인 것처럼 소리가 스러지고, 그 위로 한 가지 색깔, 그녀의 적색만이 태진의 시야에 가득했다. 그녀에게서 뿜어진 오라가 자신을 옭아매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뛰었다.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피냄새가 훅 끼쳐오는 것과 같이, 태진의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소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눈이다. 둘은 서로를 보며 직감했다.
자신과 같은 경지의 강자다. 태진은 이 피냄새의 표적을 만나면 아마 싸우지 않을까……하고 긴장했었다. 조금은 기대했다. 그러나 태진은 그 마음가짐이 뒤집혀버렸다. 지금 자신의 심장이 뛰는 이유를 태진은 외면하고 싶었으나 실은 알고 있었다.
세상은 정말 알 수가 없다.
태진이 그녀에게 걸어갔다.
이제서야, 그녀 주위에 선 남자들을 볼 수 있었다. 조폭들이 저런 모습일까 싶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들도, 저 여자도, 자신을 알아볼 것이다. 그가 그들을 알아본 것처럼.
소녀의 앞에 섰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뭐하는 새끼야?"
전혀 상상하지 못한 대사였다. 이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할 줄 몰랐다. 예측불허의 대답에 태진은 더욱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피냄새가 나서 왔다."
"개새끼도 아니고 냄새를 쫓았다?"
그녀가 씨익 웃었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한국이 대단하긴 하네. 요만한 땅에 뭐 이리 많아?"
그녀가 태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태진은 배에 힘을 주면서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다. 가까이서 본 이 소녀는 더욱 고혹적이고 아름다웠다.
"너 내 밑으로 들어올래?"
"……."
"원하는 건 다 주지. 여자든. 돈이든. 권력이든."
태진은 널 주면 가겠다는 진부한 대사를 속으로 삼켰다. 그는 이미 바알의 의형제이고 새로운 지옥을 위해 싸우는 투사이므로 그럴 수 없었다.
"이름이 뭐지."
태진이 목소리를 내리깔아 말했다. 소녀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깔깔대기 시작했다.
"이름? 네 이름은?"
"김태진."
"난 비스트라고 불린다. 마지막으로 묻지. 내 밑에 들어올래?"
"그럴 순 없지만……."
"클랜 있나?"
"친구를 위해 지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너가 설마 트리플 드래곤이냐?"
소녀가 팔짱을 낀 채 깔깔 웃었다. 눈빛도 말투도 기세도 피냄새 자욱한 살육자의 것이지만, 가는 팔과 동세, 몸짓은 유혹하듯 나른하여 태진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태진은 정신을 차리려 했다. 힘이 없었다면, 평범한 사람이나 그보다 약한 자였다면 이 소녀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으리라. 이 소녀는 내뿜는 기세조차 폭력이었다.
"그럼 내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도와라. 대가는 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태진은 취한 기분이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도, 후회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무얼 원하지?"
태진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