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41화 (14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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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적과 흑

쥐새끼가 있었군. 수현은 부인했다.

"나는 쥐가 아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날아드는 것은 흰 칼날이다. 수현은 적의 공세를 홀연 빠져나와 그녀의 뒤를 점하고 발로 그녀의 엉덩이를 밀어 찼다.

아주 노골적인 희롱의 의미로 엉덩이를 찬 것이다. 그대로 철푸덕 넘어져버린 여인이 잠시 멍하게 사태를 파악하다가, 홱 돌아 다시 검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싸움도 쥐새끼처럼 하는군."

수현이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쥐답잖은 건데?"

"당당하게 맞서라. 남자답게."

그리고 그녀가 다시 뛰어들어 수현을 크게 일도양단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수현의 정수리로 흰 칼날이 내리쳐졌다. 그러나 칼날이 수현에게 닿기 전 그녀는 다시 튕겨져 나갔다.

수현이 그녀의 배를 밀어찬 것이다.

그녀는 다시 배를 접으며 넘어졌다. 한동안 바닥에 허물어져 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쥐새끼같은……!"

"아니 뭐 어떻게 해야……."

"남자답게 싸우란 말이다."

"남자답게?"

수현은 웃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해줄게."

"들어와라."

그녀가 일어나 자세를 취했다. 수현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녀가 몸을 긴장시키다가 단숨에 검을 수현의 가슴께로 찔러들었다.

수현은 물고기가 역류를 거스르듯 공세를 타고 들어가 그녀의 명치에 주먹을 날렸다. 그녀가 배를 잡고 다시 허물어졌다. 주저앉은 그녀의 배를 다시 한 번 걷어찼다. 그녀가 바닥에 넘어져 꿈틀거렸다. 배를 감싸쥔 손등 위로 수현의 킥이 다시 한 번 작렬했다. 그녀가 바닥에 헛구역질을 하며 꺽꺽거렸다.

"남자답게 계속 할게."

배를 차려고 다시 발을 뒤로 물리자, 그녀가 도리질하며 손을 들어 막았다.

"몇 대 맞으니까 무섭냐?"

수현은 개의치 않고 다시 그녀를 걷어찼다.

그녀가 헛구역질을 하는데 튀었다. 수현이 웃었다.

"별 말 안했는데 쥐새끼라느니 남자답게 하라느니 해서 해줬잖아. 더 맞자."

수현이 그녀의 옆구리를 찼다. 손으로 막자 손아귀째로 찼다. 집요하게 복부만 공략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상처나면 흉지니까 그쪽만 찼다. 그녀가 널부러져 반항도 못 하고 경련하고 있을 때에야 수현이 폭력을 멈추었다.

발로 그녀를 뒤집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수현이 뺨을 쳐서 깨웠다.

"어이. 어이."

"으으…… 그만…… 그만……."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사색이 되어 애원했다. 수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많이 아팠나?"

그녀의 티셔츠를 걷었다. 가슴에서 골반으로 이어진 허리는 예쁘게 들어가 있었지만, 수현의 폭력으로 거무튀튀하게 시들어 있었다. 독이 퍼진 듯 배 주위로 검붉게 온통 멍이었다. 수현은 배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팠겠다."

그녀는 대답 대신 숨을 고를 뿐이다.

수현이 흘끗 티를 더 올려보았다.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이 드러난다. 크기가 궁금해진 수현이 브래지어를 밀어올려 가슴을 확인했다.

그녀가 움찔거리며 입술이 달싹였지만 소리는 내지 못했다. 수현은 그녀의 겁먹은 태도에 만족하면서 드러난 제법 큰 가슴과 유륜, 그 사이 곤두선 유두를 확인하고 손끝으로 건드려보았다.

"좋게 좋게 할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왜 그랬어. 누나야."

"죄…… 죄송……."

"으음…… 그 태도 맘에 드는데."

수현은 그녀의 가슴을 쥐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노골적인 희롱에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은 정글, 강자가 독식하고 약육강식이 룰이다.

칼이 눈에 띄었다.

낯이 익었다. 희다. 어둠 속에서 빛 발하는 광채가 해를 닮았다. 어디서 본 누군가를 닮았다. 잊고 있던 이름 미카엘을 기억했다.

"칼 어디서 났어?"

말하지 않았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기 싫음 말고."

수현이 발로 검신을 밟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꺾었다.

쨍, 하고 칼이 부러졌다. 하얀 광채가 죽었다. 부러지고나자 그냥 철검이었다. 그 변화에 수현이 휘파람을 불었다. 여자의 눈이 커졌다.

"……아아……."

"아끼던 거였어? 미안."

부러진 검을 휙 뒤로 던졌다. 여자의 눈이 흔들렸다.

"뭐. 가보라도 돼?"

"……."

"숨겨진 전설의 검 같은 거 아니지?"

"듀랜달이……."

"에이 몰라."

수현이 웃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수현이 뒤로 물러났다.

"넌 누구냐?"

"지나가던 사람."

"놈들이 보낸 하수인이 아닌가?"

"아닌데. 그러게 좀 알고 덤비지. 괜히 맞았잖아 나한테."

그녀가 몸을 일으켜 부서진 칼을 들었다. 빛이 죽은 검은 불 꺼진 전등처럼 이전같은 생기가 없었다. 부서진 단면을 들여다본다. 터덜터덜 걸어 나머지 조각을 갖다대어보아도 붙을 리 없다. 그녀는 떨어진 검날을 함께 들었다.

유럽에서는 아직도 찾아 헤메는 성검이다. 그녀의 재능을 믿고 마스터가 하사한 것이다. 그런데 칼이 부서졌다. 마스터를 볼 낯이 없다. 그녀는 칼을 품에 안은 채로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얻어맞은 복부가 다시 시큰시큰 아려왔다. 충격에 잊었던 고통이 되살아나면서, 불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저 남자는 자비 없이 자신을 걷어차고 때렸다. 장기가 상했을까. 어쩌면 아기집까지 망가졌을까. 아랫배가 아파왔다. 아이를 가지는 삶을 상상하지는 않았지만 영영 길이 막혀버릴까 하는 마음에 두려워졌다. 빨리 병원이나 치료사에게 가서 검사를, 하지만 눈 앞의 남자는 아직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죄송……합니다. 보내주세요."

자신의 몸, 부서진 칼, 이 두 개로도 온통 만신창이다. 마스터에게 어떻게 말할까. 차라리 죽어 없어지면 변명할 필요 없을 텐데, 그럼에도, 목숨은 중요해서 살고 싶었다.

수현이 싱긋, 하얗게 웃었다.

밤이다.

별이 잠든 도시의 밤은 까마득하고, 저 남자의 머리 위에서 달만 떠올라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내려앉아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얼굴 가득 드리우는 그 웃음은 꽃이 피듯 아름다웠다.

"도와줄까?"

*

예브게냐의 표정이 좋지 않다.

데이트를 잔뜩 기대했는지 열심히 꾸민 차림새였다. 언제나 헐리우드 레드카펫이다. 수현이 혹을 달고 등장하자,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 검은 렌즈 너머 눈매는 고혹적으로 찡그려져 있었다. 여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는 자신을 유나라 불러달라 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유력 클랜에 들었고, 마스터의 신임을 받아 귀한 칼까지 얻었다고 했다. 주된 임무는 재일 출신 클랜원과 함께여서 아직 일본어가 서툴다고 한다. 수현이 부순 것이다. 마스터가 급한 일로 한국에 왔고, 클랜의 지시로 뒤이어 그녀와 합류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클랜에서도 중요한 전투 자원으로, 역시 임무는 적과의 교전과 살해다. 그녀의 마스터가 방한한 이유랄 수 있는 적대 클랜을 만나 싸운 것이다.

"그거네?"

"그거지."

딱 봐도 그거다. 유나는 수현과 예브게냐가 실은 자신의 마스터와 긴밀한 관계라는 것은 짐작치 못 할 것이다. 실은 방한 목적이 그들이었다.

"그래서 이 여자를 데려온 이유는?"

"그냥……."

"굳이 데려올 필요는? 나와의 데이트는?"

"……."

수현이 고민하다가, 휙, 유나의 티셔츠 자락을 들었다. 거리에서 속살을 보여버리자 유나가 움찔했으나, 수현을 저지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예브게냐가 어깨를 으쓱했다.

"때렸네?"

"때렸어."

"사디스트 주인님."

"누나만하겠어."

"주인님 앞에선 그 반대인데?"

"그래서 더 좋아하잖아."

"좋아만 해?"

"사랑해."

"내가 더."

갑자기 애정표현에 돌입한 둘을 보며 유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얘 주웠으니까 걔한테 보내면 되는 거 아냐?"

"근데 이거……."

수현이 그녀가 들고 있는 칼을 가리켰다. 부서져 두 조각이 된 칼을 그녀가 품에 안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고쳐줘야 하지 않을까?"

"고칠 수 있나? 이브린이 할 수 있어?"

수현이 유나를 쿡쿡 찔렀다. 그녀가 수현을 쳐다보았다.

"그거 귀한 거지?"

"클랜 기밀 중 하나라 알려줄 수……."

"아까 듀랜달인가 뭐라고 불렀잖아."

"듀랜달?"

"알아?"

"그럼 그거 성검 듀랜달 아냐? 부다페스트에서 잃어버리고 십이기사회에서 아직도 추적 중인데."

"아닙니다."

"아니야?"

"……아닙니다."

별로 아닌 것 같진 않지만 아니라고 해두자.

"그거 이제 못 써? 원랜 빛이 막 났잖아?"

셋은 예브게냐의 차에 탑승했다. 그녀는 이제 스포츠카를 버리고 검은 세단을 추구한다. 차에 대해 잘 모르면서 허영심에 타고 다녔지만 수현과의 밀회에 더 편리한 세단으로 넘어간 것이다. 오늘은 리무진이다. 예의 생체 운전기계랄 수 있는 기사는 묵묵히 운전하고 있다. 그녀와 함께 여기 타니 정말 헐리우드 스타 체험이라도 하는 것 같다.

유나가 기를 불어넣자, 다시 검이 희게 빛 발하기 시작했다. 전처럼 화사하진 않았으나 여전히 검광이 시리다.

검이 동강 나서, 손잡이 부분과 검신 부분이 따로였다. 그녀가 양 쪽에 따로 기를 불어넣었는데, 검신에 바로 전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검신 부분의 빛이 훨씬 밝았다.

"장인에게 부탁하면 붙여줄지도……."

"성검인데 그렇게 쉽게 고쳐질까?"

"……."

유나가 시무룩해졌다.

"괜찮아. 괜찮아. 고쳐질 거야."

수현이 달래주려고 유나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하지만 아까의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수현이 옆구리를 건들자마자 화들짝 물러나며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노골적인 수비 자세다. 자신의 반응을 깨달았는지 곱게 앉긴 했으나 그 반응에 예브게냐가 웃고 말았다.

"주인님 어떻게 했길래 저래?"

"뭐…… 근데 먼저 공격했으니까……."

"나쁜 남자네. 섹시하네? 나한테는 다정하면서."

예브게냐가 수현의 옆으로 옮겨서는 한 쪽 다리를 수현의 허벅지 위로 걸쳤다. 둘이 눈길을 주고 받더니 이젠 입 맞추고 키스를 시작했다. 유나를 옆에 두고서도 혀를 주고 받는 노골적인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녀 또한 상식과 윤리에 개방적인 정글의 주민이지만, 이런 걸 직접 눈 앞에서 행하니 눈 둘 곳을 모르겠다. 게다가 연예인 이상의 미남 미녀 둘이 끈적하게 굴어대니 민망하면서도 눈이 자꾸만 그들을 좇는다. 수현의 손이 예브게냐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쟤는 어떻게 하지?"

"일단 데리고 간 후에 주인 찾아주면 되겠지?"

"그럼 나와의 데이트는?"

"오늘은 데이트 침대에서 하고. 내일 함께 나가자."

"어머. 흡혈귀는?"

"응…… 내가 이비 누나랑 약속 깼으니까 미뤄야지."

"엄청 마음에 들어. 주인님 키스해요."

둘이 다시 입술과 혀를 비벼댔다. 유나는 살짝 그들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갑자기 서러워졌다.

쪼옥쪼옥, 츄, 쩝쩝거리는 소리가 진해졌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끝나질 않는다. 유나는 눈을 감으려고 노력하다, 슬쩍 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니, 설마 끝까지 가려고?

예브게냐와 혀를 섞던 수현이 웃으며 말했다.

"같이 할래?"

유나가 귀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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