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40화 (140/180)

0140 / 0180 ----------------------------------------------

2-4. 적과 흑

생각할 시간이다.

살육과 사색은 정반대인 것 같으나 실은 상통하는 영역이다. 두 가지를 함께 할 때에 효율이 좋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사지를 찢으면서 피를 보면, 그 속에서 죽은 피식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는 듯 방울 방울 새로운 아이디어 번뜩인다. 그러한 맥락에서 비스트는 기술자이다. 아니 어차피 죽어 묻힐 필멸자들의 몰락을 잠시 앞당겨, 본래 세계에 없었을 멋진 생각들을 창조해내는 예술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비스트는 창조를 위한 파괴로서 이 사나이의 어깨죽지를 주욱 잡아 뜯고 있는 것이다.

날카로운 비명이 잡생각을 걷어내어 머리가 명징해진다. 비스트는 이 사나이가 그의 앞에서 무릎 꿇고 고문 끝에 주절주절 내놓은 이야기들을 되새겼다. 키시노의 수행역으로 한국에 온 이 사나이는 그녀의 명으로 이브린의 위치를 확보했고, 그녀가 직접 협상한다고 했다. 그 이외에는 모른다. 별 시답잖은 정보이다.

그리고 이브린의 거처에는 세 여인, 한 소년이 더 있다고 증언했다.

키시노가 협상의 대가로 내놓을 것은 무엇일까. 아니면 그저 복수의 기회일 것인가. 정하의 원한이 대가 없이 자신을 잡아 죽이러 일본을 향할 것인가. 가능하다. 키시노가 더해 내놓을 것은 무엇일까. 이들은 충분히 강하고, 실은 비스트로서도 가늠할 수 없이 강해서 그들의 행동양식은 아마 풍문으로만 들은 정글의 최상층을 닮아 있을 터였다.

너무 높이 있어서 지상의 얕은 보상은 대가가 되지 못한다. 돈은 아닐 것이다. 여자, 는 가능하나 정하와 멘탈마스터, 이브린을 거느린 자가 여자가 부족할 리 없고, 권력을 논하자면 이미 그들은 권력에 거리를 두고 은둔한 자들이다. 자신에 대한 복수심, 정보의 제공으로 충분할 수 있다. 아니면 이브린의 언령을 담은 아티팩트를 얻어 키시노에게 복수를 위임할 수도 있다. 어느쪽이든 위험하다.

키시노의 수하에게 기계적인 고문을 행하면서, 비스트는 다시금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을 행할 때임을 직감했다. 그는 아브락사스를 삼킨 자이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알고 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그걸 모르는 듯하다.

"살려줘……. "

"살려줘?"

살려달라. 이 사나이는 지금 비스트에게 팔이 뜯겼고, 양다리의 아킬레스건이 잘려 평생 앉은뱅이일 터이고, 고문을 못 이겨 키시노를 배반했으므로 조직에 되돌아갈 수도 없다. 마력의 근원도 끊어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남은 삶은 비비적 비비적 땅을 기며 일반인들 틈에 구걸하는 벌레가 될 것. 그것을 이 사나이는 아직 모르는 것인가?

"살면 대체 무얼 할 수 있는데?"

"살려줘……."

"이제 네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개새끼처럼 땅을 핥으면서 빌어 쳐먹는 것밖에 없어."

"제…… 발……."

"아. 아아. 맞다. 내가 잊었다."

비스트가 웃으면서 사나이의 하반신에 손을 뻗었다.

알몸이어서, 다리 사이에 말려 들어간 겁 먹은 성기를 단숨에 휘어잡는다.

"끄흑……!"

"그렇지. 이거. 인간이 왜 사느냐, 바로 섹스 때문에 살지. 종족번식이 지상대명제라고 유전자에 새겨져 있거든. 니가 지금 발악하는 것도 이것 때문일 거야. 그치?"

"하지마, 하, 하지……!"

남자의 비명이 터졌다. 남자의 생식기는 단숨에 핏물로 터져나갔다. 손아귀에 뒤섞인 핏물과 정액과 체액을 바라보며 비스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킁킁, 냄새를 훑는다. 그러다가 시선이 뒤켠에 닿았다. 그리고는 얼굴에 악마와 같은 미소를 올렸다.

"아. 굿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역시 사람 조지는 게 나의 브레인스토밍이야. 피와- 비명이- 나의 아이디어- 뱅크-."

유치한 가락을 흥얼거리고 웃으면서 구석에 웅크려 있던 또다른 여인에게 다가갔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겁에 질린 여인이다. 사나이와 같은 키시노의 타치바나구미의 일원이었다. 이 남자와 함께 사로잡을 수 있었다.

"저 새끼가 이제 고자가 되었어."

"……."

"그러니까 마지막 핏줄은 남겨야지?"

여인의 목을 붙잡고 들어올린다. 여인은 숨이 막혀와 버둥거렸다. 그녀가 여인의 하반신을 강제로 추행했다.

"오늘 배란일이지? 냄새가 나는데? 암컷 냄새."

여인은 그저 켁켁거렸다.

"내 손에 귀한 게 있어. 수컷의 마지막 촛불 같은 거지. 잘 쓰자고."

여인을 바탁에 내팽개치고, 억지로 가랑이를 벌렸다. 그리고 드러난 그녀의 둔부에, 피와 체액이 뒤섞인 정액을 억지로 밀어넣는다. 그녀가 버둥거리며 저항했으나 비스트는 어거지로 그녀의 질을 벌리고 곧 죽을 이의 정액을 주입했다. 여인을 거꾸로 매달아버리고, 다시 사나이에게 다가갔다.

"자 이제 죽어도 여한 없지? 아마 착상하겠지?"

"미친…… 년……."

"년……."

비스트가 그 말을 곱씹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낮은 웃음은 이내 어깨를 떨며 실내가 흔들려라 폭소하기 시작한다.

"미안. 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러는 거거든. 걱정 마라. 나도 곧 죽을지 말지 할 거니까. 이게 우리네 삶이잖아? 약육강식에 승자독식. 내가 너보다 센데, 나보다 센 애들도 있어서 말이야. 내리갈굼 같은 거지."

씨발, 하고 비스트가 씹어뱉었다.

키시노가 내놓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들에게 먹힐 만한 가치있는 게 무엇인가. 모르겠다. 아마 자신의 목이 가장 큰 대가이겠지. 그러므로 그는 그와 맞먹는 것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키시노가 그들에게 바치려 하는 자신의 목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비스트의 것이다. 그러므로.

비스트, 김상호라 불렸던 자의 목을 대가로 협상하기에는 키시노보다는 비스트 본인이 제격 아니겠는가.

*

스캐빈저들은 어둠을 타고 피를 찾아 이를 사각거린다. 그들은 빛이 부재한 어둠 어디에서든 떠올라 정글의 주민들의 최후를 씹어 삼켜 공(空)으로 돌려보낸다. 수현은 길을 걷다가,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 골목, 자동차 아래, 같은 빛의 공백지에서 그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정글의 피를 찾아 떠돌고 있다.

수현은 길을 걷고 있었다.

예브게냐가 레스토랑에서 예쁘고 야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는 걸음이 가벼운데, 여기저기 스캐빈저들이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멈추어 섰다. 이 길거리 너머, 보이지 않는 정글의 세계에선 언제나 피냄새가 나지만, 오늘은 더 짙게 시취가 난다. 스캐빈저들이 들끓고 있었다.

키시노와 관련이 있을까.

김상호, 아니 비스트를 처리하기로 했다. 이브린이 아브락사스를 해체하는 자신의 용언을 담아줄 수도 있었으나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키시노는 그의 행동양식은 예측하기 힘들다고, 어쩌면 자신의 행보를 파악해 한국으로 찾아 올 가능성도 있다고 했었다. 그가 온 것일까, 그는 언제나 피와 살육을 동반한다고 했기에 피냄새가 그를 떠올리게 했다.

수현은 골목으로 들어가 어둠에 스며들었다.

떨어진 곳에서 결계가 느껴졌다.

아까부터 예브게냐가 계속해서 하트를 날리며 재촉하고 있었지만 짬을 내어 그곳으로 향했다. 운무시에는 몇 개의 클랜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피를 보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한 오피스 빌딩의 옥상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가운데, 하나와 셋이 대치하고 있었다.

한  줄기 어둠으로 화한 수현이 난간에 걸터 앉아 그들을 구경했다.

한 여자, 세 남자.

여자의 키가 컸다. 수현보다 커서, 백 팔십은 되는 것 같다. 예전에 정하가 자신보다 컸었지…… 하고 추억에 잠겨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니네 뭐하는 것들이야?"

남자들이 무어라 지껄였다. 일본어였다.

남자들은 자기네들끼리 무어라 속삭이며 웃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인은 굴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니네 누구냐니깐!"

일본어로 지껄이던 남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임 재패니즈. 캔 유 스피크 잉그리쉬?"

"와, 왓?"

"위 돈 노우 코리안. 캔 유 스피크 잉그리쉬?"

짧은 영어였으나 여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민하던 여자가 이내 입을 열었다.

"문답무용. 대화는 더이상 필요치 않겠지."

"잉글리쉬 플리즈. 잉글리쉬. 위 돈 워너 파이트."

"모욕은 칼로 되갚을 뿐."

여자가 허공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장신인 그녀에게 걸맞는 새하얀 양손검이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검신이 떠올랐다. 제다이들의 검 같았다. 여자가 검을 뽑아들자 기세가 일변하고, 남자들도 긴장하는 기색이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가볍지 않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남자들은 셋으로 흩어져 사방에서 그녀를 공격했다. 그들의 싸움은 실용적이었다. 필요한 부분만 간결하게 협공한다. 그러나 그녀를 죽일 생각은 없는지 치명적인 부분은 피해 그녀의 살갗에 생채기를 내며 그녀를 천천히 무력화시켰다. 정글에서, 남자와 여자의 싸움이라면 그 결말은 명확하다.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승자는 패자를 취할 것이므로.

숨을 고르던 여자가, 단숨에 도약했다. 칼이 허공을 찢고 남자를 덮쳤다. 장신이지만 늘씬하고 유연하다. 그녀의 방식은 사람의 검술이라기보다는 야생 표범의 사냥법을 닮았다. 이와 발톱을 대신하는 것은 새하얀 양손검이다.

두 남자가 황급히 그녀를 공격했으나 그녀는 몸을 비틀어 유연하게 피해내고는 칼날을 비틀었다. 남자의 복부에 칼이 박혔다.

피냄새가 짙어지고, 스캐빈저들은 어둠 속에서 전투의 끝을 기다린다.

협공하던 남자의 단도가 여인의 허벅지에 박혔다. 그녀가 비틀거렸다. 그 틈을 노려 다른 남자가 주먹을 휘둘렀다. 여인이 황급히 칼을 빼내려 했으나 복부에 칼이 박힌 남자가, 손을 뻗어 검신을 맨 손으로 잡고 자신의 몸뚱이로 칼을 품어 그녀를 방해했다. 처절한 협공이었다.

"칙쇼! 유 다이!"

"……하찮은."

여인이 손잡이를 놓았다. 그리고 허공을 움켜잡았다.

처음 검을 뽑아들 때와 같이, 허공에서 긴 칼 한 자루를 발도한다.

빛이 번뜩였다.

두 남자가, 여인을 향해 공격하려던 자세 그대로 허물어졌다.

필사적으로 칼을 저지하고 있던 남자의 눈이 커졌다. 여인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목 긋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의 배에 박힌 칼자루를 발로 걷어차, 다시금 뱃속을 헤집었다. 그 남자 또한 쓰러졌다.

"쥐새끼처럼 훔쳐보지 말고 나와."

여인이 수현을 향해 말했다.

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의 눈이 수현에게 붙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