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33화 (13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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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더블 드래곤

그의 이름은 허용호.

그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그는 그저 평범한 공대생에 지나지 않았다. 우연히 초자연적인 사건에 휘말렸지만 크게 비중은 없이 현실로 되돌아가게 될 그런 존재였다.

── 필必, 사死, 즉卽, 생生.

하지만 그가 이름을 불러준 순간.

── 골骨, 육肉, 지之, 정情.

그는 한 명의 백골 부대원이 되었다.

이곳 지옥땅이 그의 뛰는 심장에 반응하여 그를 한 마리 악귀로 만들었다. 적들에겐 악귀이지만 자국민에겐 한 없이 따뜻한 사나이, 그것이 백골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금 K-2 돌격소총을 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저 사나이의 진심이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밥 몇 끼 강의 몇 번 같이 들은 개념 없는 후배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죽어가는 악마의 머리채를 붙잡고 이마에 총구를 들이밀며 말한다.

"하지만 그 여자애가 아무리 쌍년이라 한들, 너희가 그 여자애를 이유 없이 핍박한다면 나는 그녀를 위해 싸울 것이다."

태진이 언제 발랐는지 모를 위장크림 너머의 흐린 얼굴로 씨익 웃었다. 악마는 죽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여자가 네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가……?"

"……물론 아니지."

태진이 대답했다. 악마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그리 싸우는 것이냐? 수많은 악마들이 너희들을 죽이려 달려들 것이다. 네게 남은 미래는 파멸과 끝없는 고통이니!"

태진이 악마의 머리채를 눈높이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스산하게 말했다.

"정正. 의義."

"네, 네놈……."

"그저 그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불의에 무력하게 짓밟히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이 살인병기를 손에 든 것이다."

"네놈이 대체 무엇이관데! 네가 인간에게 살해당한 위선자 크라이스트냐, 말장난만 남기고 승천한 기만자 불타이더냐!"

"나는!"

태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K-1 돌격소총이 불을 뿜었다. 악마는 한 줌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태진이 문득 이는 미풍과도 같이 속삭였다.

"나는…… 강한친구, 대한육군이다."

허용호는 조용히 젖어드는 눈시울을 훔쳤다.

저 사나이였다.

그를 싸우게 만든 것은.

빛기둥까지는 아직 까마득한 거리, 그 사이사이에 자리한 수많은 악마들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스테이지, 그들이 손에 쥔 것은 오로지 대검과 돌격소총,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나는 용기이다.

저 먼 곳의 악마들을 마주한 태진의 등이 지쳐보였다.

용호가 그의 뒤에서 그를 위해 전쟁의 노래를 소리 높였다.

아름다운 이 강산을…… 지키는 우리…….

***

태진이 허공을 날았다.

뒤에서 용호가 엄호사격을 했으나 우뚝 선 악마의 갑주와도 같은 강력한 외피에 튕겨나갔다. 한 차례 연속 사격이 끝나자 악마는 용호가 자세를 추스릴 시간도 주지 않고 뛰어올랐다. 용호 또한 악마의 발길질에 얻어맞아 바닥을 굴렀다. 널부러진 두 자루 소총과 시래기처럼 구겨진 두 사나이의 몸뚱이. 그들의 곁에는 떨어져 나간 군용 대검이 묘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나.

태진이 생각했다.

그들은 단 둘이고 이곳은 지옥이다. 그들이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로 무장했어도 불가능은 불가능이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되 리얼리스트가 되어라. 가슴에 활활 타던 의지는 차츰 바래어가고, 허연 재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태진이 눈을 깜빡였다. 눈앞이 흐리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각혈했다. 입가에서 질질 흐르는 핏물을 내려다보며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빌어먹을…….

용호가 곁에서 꿈틀거렸다. 그 또한 쓰레기처럼 부서진 육체를 이끌고 힘겹게 몸을 든다. 태진이 용호를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나 때문에.

태진의 뜨거운 후회였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 저 사나이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이곳은 그의 전장이 아니었는데 그가 그의 멱살을 붙잡아 이곳 지옥 밑바닥에 내팽개치고 싸움을 강요한 것이었다. 태진은 지금 무력했고, 또 유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호는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을 마주하자 태진은 가슴이 턱 막혀왔다. 몸에 전율이 휘돌았다. 아아, 다시, 사죄하리다. 나는 당신을 얕보았다.

그는 필사즉생의 백골이었다.

삶은 곧 죽음을 향한 투쟁이다.

우리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수렴하는 존재이다.

하루를 사는 것이 곧 하루를 죽는다는 것임을 안다.

그러나 너희는 모를 것이다. 악마들아. 이곳 모든 것들의 밑바닥에서 아귀처럼 서로를 쳐먹고 죽지도 못해 영원을 절규하는 너희 불쌍한 피조물들은 결코 알 수 없다. 나는 너희들에게 죽어가고 있지만 너희들을 동정한다. 너희들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알 수 없을 테다.

나는 이제 죽으니, 너희들에게 남길 수 있는 건 비웃음뿐이구나.

태진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대검을 붙잡고 상의를 찢어발겼다. 드러난 그의 육체는 결코 강인하지 않다. 근육이 남았으나 더 많은 살집들이 몸을 뒤덮었고 선명하던 근선들은 지금 살과 살 사이의 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비루한 육체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수치 그 자체이므로. 그가 손에 케이원을 다시 쥔다.

용호 또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옷은 이미 너덜해서, 그가 팔을 휘젓자 금새 흩날려 나갔다. 그의 몸은 앙상하다. 오랜 실험실 생활과 불규칙한 생활로 예전의 강인한 육체는 삭아버리고 가늘은 뼈대만 남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앙상하게 마른 육체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앙상하게 마른 정신이므로.

"자, 이제 멋지게 한바탕 싸워보자고. 이대로 저 악마들을 돌파해 빛의 기둥까지 달리는거야. 만약 자네가 나를 따라올 수 있다면, 오늘 저녁에는 학교 정문이 자랑하는 행복국밥에서 국밥 한 그릇을 사주지. "

태진의 호언에 용호가 큰 소리로 웃었다. 용호가 이렇게 통쾌하게 웃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맹호 김태진 병장. 역시 수련이 부족해. 겨우 행복국밥인가? 나라면, 정문을 넘어 북문 끝까지는 달리자고 하겠네."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용호가 말했지만 태진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한 용호의 말에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북문 끝까지 달리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불고기 백반을 자네에게 소개하겠네. 북문 해바라기 식당의 불고기 백반, 그곳에 내 모든 것이 있었지."

태진도 큰 목소리로 웃었다. 웃옷이나 돌격소총은 필요 없었다. 태진과 용호는 동시에 군용 대검을 뽑아 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악마 대군을 향해 뛰쳐나갔다.

***

이것이 죽음이구나.

어둠 속에서, 태진은 암흑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악마 군단들 사이에서 갈가리 찢겨져 나갔을 것이다. 그와 용호가 악마 대군을 향해 돌진했고, 수십의 악마들을 베어넘겼으나, 이후에 모든 기억이 암전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억조차 희미하다. 몸은 어둠을 부유하고 있다.

어둠은…… 빛의 부재이다.

어둠은…….

태진은 어둠을 손에 쥐었다.

태진은 깨달았다.

빛의 부재는 그늘에 지나지 않을 뿐, 암흑은, 이 어둠은 다른 것이다.

저 먼 곳, 어둠이 도사린 저 너머에 암흑의 핵심이 있다.

그것은 불현듯 벼락처럼 그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는 지금 여지껏 알지 못했던 어둠의 핵심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빛보다도 무겁고, 빛보다도 진하고, 빛보다 까마득한 것이었다. 빛은 삶이고, 삶은 찰나이다. 그러나 어둠은…… 삶이 시작되기 전에도, 죽음이 내려앉은 이후에도 우리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이 암흑과 가장 닮은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의지.

강철 같은 의지야말로 어둠과 함께 영원히 불멸하는 것이었다.

태진의 영혼이 어둠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 힘을 원하나.

태진의 뇌리에 울리는 말이 있었다.

── 힘을 원하나.

힘을 원한다. 태진은 생각했다. 저 악마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저 빛의 기둥으로 가 유경이를 구하고 싶다. 그것이 본심이다.

태진이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를 인식하는 순간 갈가리 찢긴 육체가 그의 정신에 다시 연결되었다. 죽지 못하고 영원히 떠돌아야 하는 지옥땅에서 태진의 육체는 고통받고 있었다. 잇사이로 짐승같은 으르렁거림이 새어나왔다.

"힘은 원하지 않는다."

태진이 단언했다. 어둠 속의 목소리가 침묵했다. 태진이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지난 삶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더 이상 유경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가 어머니 자궁에서 태동했을 때부터 대한민국 정규 교육과정을 지나 군대를 구르고 다시금 이곳 대학 캠퍼스에 서기까지 그가 겪었던 모든 기억들이 머리에 넘치기 시작했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반오십 인생 속에서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자신이 지금 유경이라는 한 소녀를 위해 목숨 걸게 한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태진이 입을 열었다.

"증거."

태진은, 인간들은 희망을 좇고 산다.

언젠가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의 굴욕을 삼키고 내일의 고난을 기꺼이 감내한다. 오늘 가난하여도 내일은 창대하리라. 미래에 내 가정이 아름다우리라. 내 자식을 위해 오늘을 고개 숙이면 훗날에 내 자식이 고개 드리라. 언제나 현재를 저당잡혀 내일을 살았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연 이후 인간들은 저 벽 너머에 희망이 있으리라 믿고 이마를 기대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축여 왔다.

그것이 정말일까.

우리는, 인간은……

인간은 의미가 있는 존재인가.

우리의 삶은 가치가 있는 것인가. 우주의 먼지보다 작은 이 조그맣고 자그마한 지구에서 발버둥치는 우리 인간들, 작은 것들에 울고 웃는 우리 인간사, 그것들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인가. 무한한 우주의 시공 안에서 우리는 정말로 잠시 일었다 스러지는 바람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한 무엇인가.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유경을 위해 목숨을 건다.

정의로운 행동이,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필사적으로 믿어야만이 이 공허한 삶을 감내하고 죽음을 용납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헛되지 않다는 증거를 원한다."

그리고 태진은 침묵했다.

저 멀리에서, 어둠 저 편에서부터 웃음소리가 새어들었다. 그 웃음소리는 차츰 가까워지더니 태진을 휘감았다. 온 세계가 울리는 웃음소리였다.

── 좋다.

── 우리는 의미가 있는 존재인가?

── 모른다.

── 우주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 모른다.

── 그 답만은 우리도 줄 수가 없다. 그러나.

── 그 질문은 또한 우리의 숙원이므로.

── 답을 얻을 때까지.

── 너희와 함께 하리라.

태진의 시야가 암전했다.

모든 것이 어둡다.

까마득하던 어둠은, 이젠 그저 빛의 부재, 그늘이 되어 시야를 뒤덮었다. 태진은 그것이 눈꺼풀임을 깨달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붉은 사막, 붉은 하늘이 차츰 시야에 들어왔다. 저 멀리에 진 친 거무튀튀한 악마들의 대군도 들어왔다. 그들은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온몸이 무겁다. 몸이 떨렸다.

아니, 대지가 떨렸다.

지상이 갈라지고 있었다.

"……!"

태진은 보았다.

붉은 지옥땅이 갈라지고, 그 아래에서 침을 흘리며 고개 쳐드는 악마를.

거대한 괴물을.

고대의 악마.

지상을 짓밟고서 오랜 잠에 빠져들었던 최초의 악마들이었다.

그 악마의 불길과 같은 시선이 태진을 향했다. 그 거대한 얼굴에서부터 열기가 뿜어져나와 태진을 덮쳤다. 용암과 같은 것이 쳐올라와 시야를 뒤덮었다.

***

이곳 서쪽 붉은 사막을 지배하는 악마 군단의 왕, 바알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는 저것을 알고 있었다.

지옥이 생기고, 헬게이트가 처음 열렸을 때부터 지옥을 전쟁터로 만들었던 최악의 존재들, 일말의 협상도 타협도 없이 오로지 전투와 학살만을 목표로 삼던 고대의 악마들. 악마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프로토 타입.

발로크.

모두가 죽었고, 발로크를 이끌던 최강의 두 존재만이 지옥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영원히 침몰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의 부활이 아니다.

현세와 지옥을 연결하는 정글의 부류는 많지 않다. 단 둘이다. 하나는 나이트워커, 바알에게 수현이라는 존재를 씹어먹도록 유혹하고 있는 능력자 정한새의 능력이다. 지옥으로 이르는 길을 볼 수 있고 그 위를 걸어 헬게이트를 넘나드는 밤의 간세, 어둠의 파발마, 그들은 악마와 협상하고 악마를 이용하고 악마를 현세에 풀어헤친다. 지옥에 관련된 능력자들은 태반이 나이트워커이다.

하지만 극소수의 다른 자들.

악을 행하기 위해, 혹은 악을 죽이기 위해, 무엇이 목적이든 악을 등에 엎고 힘을 휘두르는 자들. 악행을 위해 악마가 되고 악마를 죽이기 위해 또한 악마가 된, 스스로 악으로 타락하여 악마의 기수가 된 기사들.

나이트라이더Nightrider!

될 수 있는 자들도, 힘을 줄 수 있는 악마도 극소수, 그러나 그들은 하나 같이 정글과 지옥을 뒤흔드는 강자들이다. 역사에도 채 오십이 되지 않을 터.

지금 그들은 새로운 나이트라이더의 탄생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깨웠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인간을 인정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엄청난 적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군단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하는 적.

그리고 그들이 탈 군마(軍馬)는.

사상최악의 악마이자 악마학살자, 발로크!

발로크를 상징하는 용암과 불길이 지옥 하늘을 뒤덮었다.

이윽고 그것들이 내려앉았을 때, 바알은 두 사나이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전과 같았으나, 그들의 눈동자는 지옥 밑바닥의 염화처럼 타오르고, 그들의 그림자는 지평선에 이를 정도로 까마득하다. 그들의 온몸에서 투기가 넘실거렸다. 그들의 손에 든 군용 대검은 그저 단검이 아니라 악마들을 도륙할 기요틴이다.

온몸에 차오르는 악의를 주체하지 못하고서, 용호가 검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LET THE KILLING BE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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