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2 / 0180 ----------------------------------------------
2-3. 더블 드래곤
그는 경영학도였으므로 이곳 이공계열의 연구동에 들어선 적이 없다. 이따금 학생들이 흰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은 보았으나 그 내부에는 무지하다. 그래서 그는 어두컴컴한 입구 로비에서 우두망찰했다. 사위가 어둡다. 그를 안심시키는 일말의 빛은 그가 들어선 입구 바깥 하늘의 희미한 노을이 전하는 것이고, 그조차도 가라앉으며 한층 어둑해졌다. 태진은 다시금 갈등했다. 발끝이 금방이라도 뒤돌 것 같다. 어둠에서 배어나온 적막이 그의 살갗을 기고 있었다.
무슨 용무가 있는 거겠지.
내가 잘못 본 거겠지…….
태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조금 더 먼 거리에서 바라본 양 복도와 위층을 향하는 계단은 더 어둡고, 색조를 잃은 것처럼 바래어 보였다. 태진은 다시 생각했다.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돌아가자…… 하고, 다시 결심을 세우려는 찰나였다.
히이이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인 줄 알았는데, 사람의 소리를 닮았다. 그 소리는 현실감을 지우고 태진의 이성을 가라앉혔다. 그때와 같다고 태진은 깨달았다. 술과 약물에 의한 고양 상태와 같이 현실은 이제 부유하고 있었다. 그 느낌과 함께 태진은 자신의 자기합리화를 인지하고, 이것이 명백한 위기상황임을 인정했다. 말하자면 그 여자는 유경이고,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뒤도는 것은, 그저 실수이거나 착각……이 아니라, 유경이라는 여자애를 내버리고 도망치는 행위라는 것을 태진은 납득했다.
그는 스스로를 속이지 못한다. 타인보다 자신이 소중하지 않느냐, 하는 당연한 고민들은 아직도 태진을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마치 몰랐던 일처럼 돌아설 수는 없다. 지금 저 어둠으로 들이닥쳐 위기에 직면하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경멸하느냐의 기로였다.
유경아, 너 씨발 운 좋은 줄 알아라…… 하고 태진은 생각했다.
이 오빠가 제대한지 일 년만 더 지났어도 그냥 갔다, 이년아……, 하고 억지로 웃었다.
히이이이…….
다시 그 목소리는 태진을 불렀다. 태진은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공포와 두려움은 멀어지고 무모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군인 시절 주말에 할 일이 없어 병영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뒤적거리다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을 읽고 오자서의 최후에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났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 그에 대해서는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그의 숙원은 복수였으나…… 지금 현실의 경계가 명백히 무너진 지금 태진은 유경이라는 여자 아이를 구하기 위해 간다.
가오가 있지.
태진은 소리가 들려오는 위층을 향해 계단을 박차고 올랐다.
그리고, 태진은 넋을 잃었다.
마지막 계단을 지나 바닥을 내딛었을 때, 그곳은 황야였다.
하늘은 붉고, 바닥 또한 적색 모래로 끝이 없었다. 이따금 쌓인 구릉을 제외하고는 그저 황야와 하늘, 그리고 귀를 쏘는 바람떼 웅성거릴 뿐이었다. 태진은 아까 마셨던 커피에 누가 약을 타놔 환각 상태에 돌입한 것이 아닌가 자신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상상 이상의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태진이 자신의 뺨을 꼬집으려는 찰나.
무엇인가가 부닥쳐 와, 그는 허공을 날았다.
바닥에 형편 없이 내리꽂히고도 한참을 굴렀다. 피와 모래를 함께 뱉으며 컥컥거리며 눈 뜨자 눈 앞에는…….
괴물이 있었다.
"들개의 이빨로 대지를 긁고 구더기의 창자로 세상을 갉는 갈개꾼 갈가마귀 갈라드."
"와, 와 씨발. 와 씨발."
태진이 뒷걸음질쳤다.
상체는 개였으나 하체는 거대한 구더기였다. 개의 입 안에서 튀어나온 사람의 대가리는 이마와 입이 거꾸로 되어 있고, 눈은 꺾어질 수 없는 각도로 휘어지며 기괴한 눈웃음을 그린다. 체구는 태진의 두배였다. 그의 그림자가 태진을 뒤덮었다.
괴물이 다시 헐떡이며 태진에게 달려들었다. 개의 앞발과 구더기의 몸뚱이로 꿈틀거리는데도 속도가 빨라 태진은 피하지 못하고 다시 부닥쳐 나뒹굴었다. 개의 몸에서 갈라진 개의 아가리에서 기어나온 사람의 입 안에서 튀어나온 혓바닥이 태진의 뺨을 핥았다. 태진은 공포에 전율하며 몸을 비틀었으나, 개의 앞발이 그의 가슴을 짓밟아 바닥에 몰아붙이고 있었다.
"삼킨다. 삼킨다. 갉는다. 갉는다."
자신의 패기는 어디로 갔는가.
태진은 후회했다. 이렇게 체급이 다르면 불공평하다…… 지금 그에겐 대검도 소총도 없고…… 개죽음이 아닌가.
태진이 씨발, 하고 마음속으로 신을 모욕했다. 눈을 질끈 감고 욕을 되뇌었다.
신 개새끼. 니가 신이면 이딴 걸 내리고 나를 그냥 보낼 수가 있어. 좆같은 세상. 개같은 세상. 씨발. 말도 안돼.
"신은 개새끼지."
낯선 목소리에 태진이 눈을 떴다.
한 남자가 태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의 괴물은 뒤로 물러나 고개를 조아리고 있고,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미소를 지었다.
금발을 단정하게 넘긴 서양 사내였다. 상복과 같은 검은 정장에 흰 셔츠를 차려 입었다. 그는 태진에게 손을 내밀었고 태진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키가 컸다. 그가 다시 말했다.
"생각이 마음에 드는군."
태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우리는 내기를 좋아해. 도박과 불확실성을 사랑하지. 자 너에게 기회를 주겠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면 돼."
"뭐, 뭐요."
"여기서 나가 도망치게 해주겠다. 아니면, 너에게 네가 바라는 무기를 주겠다. 도망치던가, 아니면 다시 싸우던가. 널 위해 살겠니, 그 가엾은 여자애를 위해 싸우겠니."
허공에서 함성과 같은 기성이 휘몰아쳤다. 태진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그림자가 그들을 둘러싸는 것을 느꼈다. 수백, 수천, 수만의 시선이 그 둘을 향하고 있었다. 태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늘도 땅도 붉고, 마주한 것은 이 기괴한 괴물들.
이 인간의 형상을 한 것이 저것보다 더한 괴물임은 알 수 있다.
태진이 눈을 감았다.
기이하게도, 이 본능적이어야 할 순간에 태진은 이성적이었다. 그는 한 번도 종교를 가진 적 없다. 군인 시절 주말에 향했던 성당도 교회도 법당도 그저 떠밀려서, 혹은 무료해서 갔을 뿐이었다. 그는 현실을 살았다. 태진은 이들이 악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기만에 능하다.
혹 그 목사와 신부가 옳다면, 지금 자신을 위해 이곳을 도망친다면 그는 과연 목사와 신부가 열변하던 말한 천국에 이를 수 있겠는가.
훗날에 이들을 다시 만나리라.
혹 그 퉁퉁한 법사가 옳다면, 이 카르마는 되돌아와 내세에 나는 다시 한 번 벌을 받겠지.
혹 실은 아무 것도 없다면, 이 또한 어떠리.
본능을 믿지 말아라. 우린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가엾은 이들이다. 이성에 의하라. 죽음을 앞두고 살려 발악하는 것은 본능의 영역이다. 우리가 정말로 죽음을 직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 것이다. 오히려 죽음이 두려워 생을 비겁하게 부지하는 것을 두려워하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 그에 대해서는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태진은 맑은 이성으로 싸움을 결정했다.
순간 환호와 같은 바람 소리가 다시금 주위에 휘몰아쳤다. 남자 또한 미소를 지었다.
"선전을 기원하네. 나도 너에게 걸었다. 자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주지."
그리고 남자는 없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두 개의 무기가 떨어져 있었다.
하나는 잘 갈린 군용 대검이었다. 그것을 허리띠에 꽂았다.
그리고 이어 악마가 그를 위해 남긴 살인병기를 손에 쥐었다.
구경 5.56mm x 45mm의 나토탄을 사용, 최고 길이 838mm, 무게 2.87kg에 30발이 장탄 가능한 연사속도 700~900RPM의 살상 병기. 한국인의 신체 구조와 한반도의 산악지형을 감안해 설계된 대한육군 특작부대원들을 위한 최강 최악의 흉기.
K-1 돌격 소총.
태진은 멜빵끈을 목에 걸치고 총신을 비틀어 고유번호를 확인했다.
총번 892125.
태진이 미소지었다. 손에 딱 맞아 떨어지는 이 총은 그의 전우였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총의 영점이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악마들이여,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지금 무슨 게임을 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이 황야에 내가 왜 오게 되었는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유경이라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왔으나 이젠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내 앞길을 막는 괴물이 있는 것이고, 내 손에는 괴물을 죽이기 위한 최고의 전우가 들려 있었다. 남은 것을 그것을 분쇄하고 그 소녀를 끌고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라운드. 악마가 말했다.
──── 간다 인간. 준비된 탄알의 잔량은 충분한가.
태진은 대답 대신 조준간을 겨누었다. 문답무용. 태진은 괴물에게 총탄을 쏟아부으며 돌격했다.
***
태진은 피와 살점을 뒤집어 쓴 채 황야를 걷고 있었다.
저곳 지평선의 끝에 하늘로 치솟는 빛의 기둥이 있었다. 그곳에 유경이 있다고 했다. 태진은 자신이 왜 그 썅년을 위해 이 고생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곳을 향해 행군했다. 갈갈갈갈 뭐라고 하던 악마 새끼는 K-1의 연사에 벌집이 되어 터져나갔고 살려달라고 비는 그 낯짝에 대검을 꽂고 오줌을 싸주었다. 낡고 삭은 근육에서 힘이 샘솟았고 그는 지금 일 년 전 산하를 누비던 수색대원 김태진 그대로였다.
"포탄의 불바다를 무릅쓰면서……."
태진이 흥얼거렸다. 저 먼 곳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새로운 스테이지. 태진이 침을 퉤 뱉으며 가락을 이었다.
"고향땅 부모 형제 평화를 위해……."
와라, 씨발 새끼야. 뇌까리면서 태진이 돌격자세를 취했다. 악마는 곰의 형상이었으나 배에 사람의 얼굴이 있었고 이빨은 상어의 그것처럼 뾰족하고 무성의했다. 오늘 니네 다 죽이고, 씨발. 곰이 네 발로 대지를 박차고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태진이 근육을 긴장시켰다. 유경이 꼬셔서 같이 냉동이나 먹어야겠다. 태진이 총구를 정면으로 향했다.
"죽어라!"
"우워어어어어어!"
곰이 포효했고 곰의 배에 떠오른 추악한 인간의 얼굴은 끼야아아아하고 비명을 질렀다. 빗발치는 케이원 돌격소총의 총탄을 두꺼운 가죽으로 버텨내며 곰은 태진의 지척에 이르렀다. 태진은 곰의 스매쉬를 예감하고, 곰의 앞발바닥이 아닌 곰의 어깨를 주시했다. 진정한 고수는 힘의 시발을 관측하는 법이다.
"크어억!"
곰이 발차기를 날렸다. 미친 씨발. 태진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쿠마도 아니고 곰이 왜 발차기를 해. 태진이 케이원 돌격소총을 다시금 부여잡고 곰의 미간을 노려 연사했다. 두다다다, 악마가 무슨 묘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소총의 탄알은 무한대로 쏘아져나갔다. 태진은 뒷걸음질치며 곰에게 총알을 먹여주었다. 곰이 앞발로 머리를 보호하며 주춤했다. 자신감을 얻은 태진이 일순 무릎을 꿇었다.
서서쏴보다는.
조준간의 중심에 곰의 머리를 올렸다. 입가에도 그린 듯한 미소를 올린다.
앉아쏴가 정확하지.
태진의 소총이 불을 뿜었다.
"크어어어어엉!"
곰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태진이 대검을 뽑아들었다. 이제 비틀거리는 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차례였다.
"크어어어어어엉!"
태진이 조심스레 곰에게 접근하는데, 문득 오한이 느껴졌다.
분명히 대가리를 터뜨렸는데 그의 본능은 끊임 없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 태진은 자신의 본능을 신뢰했으므로 거리를 유지했다. 머리 없는 곰의 움직임이 일순 멎는가 싶었다. 그리고는.
배가 사라지는 감각을 느끼며 허공을 날았다.
"크으엑!"
가벼운 발차기만으로도 태진을 죽음 가까이 이르게 했던 곰이 영혼을 실어 배를 빵 쳐올린 것이다.
태진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케이원 돌격소총을 놓쳤고, 멜빵끈이 홀홀 풀리며 허공을 날았다. 하늘이 몇 번 빙글빙글 반전했고 어느새 머리맡에 붉은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대검은 그의 눈가에 꼽혀 있었다. 고통은 뒤늦게 찾아와 온몸을 지릿거렸다.
"허어억……."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곰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데도 육체는 무력했다.
태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병신. 만화도 안봤냐. 머리가 둘인 경우 본체는 바로 배에 달린 쪽인 법."
곰의 배에 달려 있던 얼굴이 비웃었다. 그런가. 태진은 비통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배빵이 답이었나. 종료를 앞두고 마지막 문제의 답을 알았는데 작성할 컴퓨터용 싸인펜이 없는 수험생의 심정이 되었다. 저 새끼를 터뜨리면 되는데.
그때 태진의 흐린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한 남자와 악마가 걷고 있었다.
실험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그는 악마로 보이는 작은 괴물의 인도를 받아 태진이 걸어온 황야를 되짚는 중이었다. 안경을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 정말 살려주시는 거죠?"
"되돌아가는 걸 택했으니 살려준다. 크크크. 악마는 약속 지킨다. 크크. 기억은 잃을 것이다. 케케."
"휴. 실험하다가 뭔 날벼락인가 했네."
그 태평한 대화에 태진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저 놈은……! 저 놈은……!
순간 그 남자를 이끌던 악마가 태진을 보며 비웃었다.
"저 놈은 딴 거 선택해서 졸라 쳐맞는 중이다. 크크크. 병쉰. 케케케."
"저, 저 사람……?"
순간 다 죽어가는 태진을 발견한 남자가 주춤했다. 안경 너머 그의 눈동자는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오자서를 그리며 태진은 저 남자에게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태진은 배에 힘을 실어 일갈했다.
씨발, 갈───────!
영혼을 실은 호통에 남자가 깜짝 놀라서 태진을 쳐다보았다.
"에, 에?"
"너 이 새끼 군대 어디 나왔어!"
"저, 그, 그냥……."
두 손을 모으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 안경잽이 청년을 보며 태진은 절망했다.
유약한 어깨, 흐린 안경과 우물거리는 입술. 그에게 전투본능이란 남아 있지 않았다. 국가 남성의 태반이 진창을 구르며 살인기술을 연마하는 대한민국에 저런 사나이가 남아 있다니 태진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태진은 몸을 뒤집어 하늘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하늘은 붉었으나…… 지상과 같이 드넓고 아름다웠다. 죽기에 좋은 날이다.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최선을 다했으므로 후회는 없다.
다만, 뜻한 바, 한 소녀를 구하지 못함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때, 태진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 삼 사단 소총수 출신인데……."
────────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
태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아. 아직 엔딩을 맞이하기엔 이른가.
눈을 감았다. 사람에겐 누구나 그에 걸맞는 숙명들이 있다. 저 남자는 잠시 그걸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 말, 태진은 남자를 소리내어 말했다.
"필必, 사死. 즉卽. 생生."
순간 적막이 일었다.
황야가 지독한 침묵에 빠졌다. 악마들의 기척도, 우물쭈물하던 남자의 신음도 들리지 않았다.
이내 남자의 나지막한 대답이 황야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골骨. 육肉. 지之 정情."
순간 허공에 인 바람이 거세지더니 이내 회오리가 되어 안경잽이 사나이를 덮쳤다. 곁에 서 있던 악마가 비명을 지르며 돌개바람에 휘말려 허공을 날았다.
──────── 그러므로 그대, 산 동안은 필사적으로 투쟁하라.
이윽고 회오리가 멎은 그곳에는, 유약한 은테 안경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착검한 K-2 돌격소총을 견착한 채 엄지를 치켜든 한 명의 백골 용사가 서 있었다.
남자가 태진을 향해 경례했다.
"백. 골."
태진이 씨익 웃으며 피투성이인 오른손을 이마에 올렸다.
"맹. 호."
후대에 정글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 최강최악의 악마사냥꾼 듀오 더블 드래곤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