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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129화 (12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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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악마의 기호

태진이 담배를 피고 돌아왔을 때, 소희는 분위기에 잘 어울리고 있었다. 태진은 제 테이블로 돌아가지 않고 나이 좀 있는 선배들 모여서 술잔 기울이는 자리에 합류했다.

"여, 태진이 제대한 이후 간만이네."

"예, 형님 취직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형님 태진이 군대 갔다와서 사람 됐는지 요새 도서관에서 살아요."

"뭐? 이 자식,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믿을 수 없다."

술잔이 몇 번 기운다. 대학에서 인연은 다 헛되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라고 태진은 생각하면서, 취기에 적당히 좋아진 기분으로 부유하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고 반 잔, 채워 다시 들이켰다. 나이 든 이들은 술을 강요하는 법이 없다. 제 몸 가눌 만큼만 흐트러지고, 살짝 흔들리는 눈으로 서로를 보며 피식피식 웃는 것이다.

저 멀리에서 시끄러운 청춘들이 먼 이야기 같다.

남자 새끼들아.

니네 곧 다 군대 간단다.

여자애들아.

니네 헌내기 되면 찬밥이란다.

혼자 생각하며 태진이 다시 낮게 웃고는 잔을 들었다. 학창 시절에 후배들 술로 죽이기를 일삼던 선배도 이제는 술병을 쌓는 데에 태평하다.

그래서 소희가 일어났을 때, 태진은 낮게 깔려 찰랑이는 소주를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멀리에서도 빛이 났으므로 그는 소희의 낯선 표정을 알아 보았다. 차츰 술자리가 고요해지고, 그녀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저 어딘가로 한 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태진은 그녀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얼굴을 응시했다.

소희가 걸었다. 눈을 치뜬 흰 얼굴은 싸구려 전등 불빛에 잔뜩 구겨져, 흐느낄 것 같았다. 태진은 그제서야 그녀가 향하는 그 끝에 선 누군가를 보았다.

너였구나.

이수현이라는 녀석이.

태진은 알 수 있었다. 이야기로 들었던 그녀의 옛 연인이 너구나. 저 소년 같기도, 청년 같기도 한 퇴폐적인 얼굴을 보는 순간 태진은 이야기의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소녀가 쉬이도 망가졌던 뒤떨어진 개연성의 이야기는, 그를 그 빈자리에 올리자 납득이 되었다. 그 얼굴과 분위기는 비현실적 이야기에 걸맞게 기이하리만치 아름다운 것이었다.

소희가 그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함께 자리하던 선배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소녀는 소년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 강렬한 감정이 태진에게까지 끼쳐왔다.

태진이 함께 자리한 모두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들 모두가 여전히 그 해프닝에 관심을 두고서 잔을 들었다.

소희는…….

그 녀석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태진이 여태 본 가장 멋있는 키스였다.

그는 그만 웃고 말았다.

"저기 청춘들을 위해서 건배."

태진이 제안했다.

원탁에 둘러앉은 네 사나이는 감탄한 얼굴로, 조금은 씁쓸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함께 술을 들이켰다.

좋은 밤이고, 좋은 날이다. 그래서 소주도 좋은데이다.

빈 잔을 허공에 들고 있던 취직한 선배가 말했다.

"태진이 이 새끼 고작 작년에 제대한 게 갑자기 존나 나이든 척 해……."

"그치, 나도 느꼈다……."

"허허허. 형님들도 참……."

***

주변을 정적에 빠뜨린 그 키스가 끝났다.

소희는 이제 완전히 울고 있었다. 수현의 멱살을 붙잡은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수현은…… 씁쓸한 얼굴로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다.

소희가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수현은 다시 손을 올려서 그녀의 등을 감싸 안고 천천히 토닥였다. 소희가 수현의 가슴을 한 번, 두 번 치다가 이내 그의 품에 완전히 안겼다.

"왠일이야. 저거 뭐야?"

"저 남자 누구야?"

"헐…… 대박……."

"이소희 남자친구야?"

술자리가 술렁였다.

영화 찍고 있네…… 하고, 몇몇은 생각했다. 그들은 지금 명백한 단역들이고, 세상의 조명은 저 둘을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화 찍고 있네…… 는, 조롱이 아니라 실은 질시와 열등감을 떨치기 위한 마지막 자존심이다. 조금 더 솔직해진다면, 내가 저 자리에 있으면 어떨까…… 하고 상상해보고, 모두의 질시와 부러움을 받는 그 기분을 공상할 것이다.

"멋있다……."

하고 누군가는 입밖에 내고 만다.

"저 남자애 진짜 잘생겼다…… 연예인 같애."

"그림 되네……."

어떤 사정들이 있는 것인지 그들 멋대로 짐작하며 시선을 향했다.

남자들은 수현을 부러워하면서, 자기들 시간 가지게 해주자고, 다시 술판으로 주의를 환기시킨다. 삼 년만에 만난 남녀를 뒤로 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유경만이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패배감에 휩싸여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가 노렸던 수현과 소희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른다. 눈치로, 옛 남자친구거나 하겠지. 방금의 애틋한 입맞춤은 벼린 칼날처럼 그녀를 그들로부터 잘라내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끼지 못하고 그녀는 군중속에서 홀로 우두망찰했다.

"유경아 뭐해. 너도 남자친구 불러!"

곁에 있던 여자애가 떠들었다. 유경은 흘끗 그녀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척추를 달리는 패배감과 열등감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소희가 알면 얼마나 비웃을까. 저 남자애는 날 얼마나 같잖게 봤을까. 그런 비관적인 생각들이 계속해서 차올랐다. 유경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일어날게요……."

"어, 벌서 가게?"

유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등뒤로, 남자친구 보고 싶어졌나, 하고 눈치 없이 누군가가 떠들었다. 유경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아직도 껴안고 훌쩍이는 그들에게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머리가 엉망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막연한 분노로 몸을 떨었다. 왜, 쟤네만. 나는 왜. 스스로도 무의미한 저주들을 하늘에 퍼부었다.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가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소년이었다. 기이한 눈이었다.

눈이 마주치는 것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순간 유경은 뒷걸음질쳤다. 그의 눈이 붉게 물들고, 낯선 공포가 치밀었다.

"와, 거짓말처럼 너 같은 애가 여기 있었네."

"누구세요……."

"화나지? 저 두 년놈 보니까 막 열불이 나지? 질투 나고 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

"무, 무슨……."

"기억해. 악마는 그런 걸 좋아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모든 것들을 악마가 사랑한다. 질투는 나의 힘, 콤플렉스와 자기 혐오에 매몰된 너의 자아가 나의 양식, 흉하게 일그러진 너의 얼굴이 나의 거울, 그리고 그러한 너의 자궁을 열고 우리는 길을 터.

소년 정한새가 웃었다. 그 순간 유경은 무엇인가에 꿰뚫린 듯이 온 몸이 경직되었다. 아랫배 어디엔가, 그녀의 귀한 무엇인가가 아래를 향해 늘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래로 아래로 침몰해서 그녀의 몸 바깥, 바닥 아래에까지 그것은 질질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길이 열렸다. 아래에서, 바닥 너머에서 그들은 타고 올라와 그녀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다. 유경이 헛구역질했다. 어지럽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원하는 걸 이루어줄게."

정한새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시야가 암전했다.

***

수현은 자신의 품에 안긴 소희와, 자신들을 흘낏거리는 시선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원래 말랐는데…… 이젠 더 말랐네.

그녀의 등줄기에 도드라진 척추뼈를 손끝으로 느끼면서 수현이 그녀의 등을 다시 한 번 토닥였다. 문득 안타까워졌다. 상상한 적 없는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수현은 소희의 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인데, 눈동자만은 선명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망과 그리움, 꺼지지 않은 애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긴 시간 자신을 기다린 이 소녀를 수현은 외면할 수가 없어,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부은 눈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동안 뭐했어…… 는 아니다.

어떻게 보상할 거야…… 조차 아니다.

다시라고 묻고 있었다. 다시 함께할 수 있냐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수현은 이 예쁜 소녀의 마음이 기꺼워서, 무어라 입을 열 수가 없고 그저 그녀의 뺨을 쓰다듬을 뿐이다. 수현이 그녀를 이끌어 주막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함께 캠퍼스를 걸어내려갔다. 축제가 한창이었다. 먼 곳의 광장에서 노래 대회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말없이 수현의 손을 잡고 있다.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둘은 어느새 캠퍼스를 벗어나 대학로 너머 주택가에 이르렀다.

"이수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이 메어 있다.

수현이 대답했다.

"……응."

"나 봐."

발이 멈추었다. 둘의 시선이 다시 얽힌다.

"할 말."

수현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뺨을 감싸쥐었다.

"……미안."

"또."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수현은 눈을 감고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서로의 숨결이 뒤섞였다. 다가오는 소희의 체취가, 지난 날 깔깔거리며 애정을 속삭였던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채어 올렸다. 입술에 닿던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다시 못견디게 그리워졌다. 수현이 고개를 틀어, 소희에게 키스했다.

서로의 혀가 섞였다가, 떨어졌다. 수현은 순간 너무나 그녀를 안고 싶어졌다. 그녀는 예전과 같은 얼굴로 신음할 것인지.

소희는 수현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예전과 달라진 눈높이가 새롭다.

너 때문에 바닥까지 처참하게 추락했었다.

애초에 아예 꺼져버렸으면 모를까, 너는 결국 다시 나에게로 왔다.

그러니까 책임을 져.

소희는, 수현이 그녀의 메세지를 이해할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콧등이 닿았다. 서로의 속눈썹 끄트머리가 서로를 간질일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수현은 다시 키스했다. 소희가 수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삼 년만의 키스는 달콤했다. 오래 쌓인 기갈만큼 그녀는 더욱 간절하게 수현에게 매달렸다. 둘의 입술이 떨어지고, 둘의 뜨거운 눈길이 마주쳤다.

"너. 이래놓고 다시 사라져버리면."

소희가 수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위협이라기보다는,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나는 죽을 거야."

알아. 하고 수현이 속삭였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러브호텔이 휘황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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