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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 번째 겨울
중간고사가 끝나고, 기말고사는 조금 남은 애매한 그 시간에 학교 축제가 있었다.
학과 대부분은 술판 벌이기 좋은 주점을 열 것이다.
경영학과도 그랬다.
"태진 형님 좀 도와주세요."
"야 니가 과대잖아. 니가 알아서 해."
"그래도 예전에 과대셨잖아요. 후배 좀 도와주십쇼."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태진이 고개를 내저었으나 정철은 이미 그가 넘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태진은 그런 남자니까. 정철이 태진의 양손을 잡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뭐, 뭐냐. 난 아무 말도 안했는데……."
"감사합니다!"
"허허…… 요 새끼……."
태진이 헛웃음을 짓더니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주점이라…… 뭐, 대학생활 하면서 축제에 한 번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태진이 휴대폰을 열었다. 우선 졸업하고 취직해서 지갑 빵빵한 선배들 모시고 용돈 좀 타서 후배들 술 먹여야지. 사실상 축제의 궁극 목표가 그것 아니던가. 태진은 머릿속으로 무얼 할지 차례로 떠올렸다.
그리고 주점에서 일할 녀석들도…… 아니 이건 과대 새끼가 알아서…….
자신은 지금 과대 녀석이 하기 힘들 것들을 해주는 정도면 된다. 그러니까 녀석은 모를 선배들을 초청하고, 동기들을 끌어들이고, 그리고…….
그리고…….
태진은 문득 한 여자애를 떠올렸다.
과의 그 누구도, 아마 오직 자신만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터무니 없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맹호이다.
한 번 맹호는 영원한 맹호다.
그러므로 태진은 수사불패의 정신으로 소희를 불러낸 것이다.
"……."
소희가 말끄러미 태진을 쳐다보았다.
인상을 쓰지도 않았다. 그저 그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선이, 태진은 견디기 힘들어 눈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쟤가 저렇게 바라보면 누구라도 여자 손 처음 만지는 쑥맥 마냥 어버버하게 될 것이다. 아, 괜히 말했나. 태진은 후회하면서 다시 흘끗 시선을 돌렸다. 소희는 여전히 표정이 없다.
"그…… 싫……니?"
"……."
소희의 눈썹이 살짝 비틀렸다. 태진은 그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고민하고 있다.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 고민하고 있었다.
태진은 순간 감개가 무량해졌다. 마치 설리번 선생님이 헬렌 켈러에게 워터라는 단어를 깨닫게 했던 순간처럼, 이 자발적 아싸 독고다이 소녀는 이제 남들과 함께 하려고 내키지 않는 행사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은 소희가 정말 하기 싫어하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그녀는 거절 않고 고민하는 것이다.
태진이 미소지었다.
"편하게 생각해. 뭐 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니까. 그냥 사람들이랑 재밌게. 재밌게 축제 즐기는 거지."
"……."
"고민되면 그냥 확 저질러버려. 하고 후회하는 게 안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들 하잖아."
그 말을 들은 소희가 순간 미소를 지었다.
태진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하고 후회하는 게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
예전에, 수현이 떠나기 전에, 그 명랑하고 밝았던 소희가 늘 하던 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공부 빼고 온갖 것들을 하곤 했었다. 실은 담배도 해보았고, 술도 마셨고, 추억이라며 화장으로 나이를 속이고 클럽, 나이트도 가보았었다. 그리고 수현을 만났고…… 상념은 거기에서 끝난다.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어, 정말?"
"네…… 하루 정도면."
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 소희의 손을 잡으려다가 그녀 미모에 기가 죽어서 거기까진 못했다.
태진은 소희와 인사하며 휴대폰을 열었다. 아, 이 카톡을 보내고 나면 자신은 레전설이 될 것이다.
***
학과가 술렁였다.
유경도 놀랐다.
그녀는 이미 친분을 유지하던 과대의 부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왠 걸, 이소희가 주막을 돕는단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릇 경영학과처럼 인원이 많은 곳에서, 축제 주막이란 걔중 활발하고 잘 나서는 인싸들의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혼자 휩쓸 수 있는 강력한 아싸 하나가 참전한단다. 화력이 다르다.
그녀가 일한다니까 관심도 없던 녀석들이 꼬여서 참가 인원도 늘었다. 무상 노동력을 그러모은 과대는 좋아서 신이 났다.
유경은 다시 기분이 저조해졌다.
괜히 펜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끝을 씹었다.
언제나 그녀는 승자였다. 적당히 예쁜 얼굴, 그리고 뛰어난 성적으로, 더 예쁜 애들은 성적으로 눌렀고, 일부 성적 좋은 애들은 얼굴로 눌렀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과 대등한, 실은 더 나은 듯한 여자를 만났다. 얼굴과 학력을 떠나 삶의 분위기 자체가 그녀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딘지 상처가 있는 듯한 고요함, 그리고 슬슬 세상으로 나오려 노력하는 그 모습이 마치.
걔가 주인공 같잖아.
나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허영에 찬 조연.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런 게 어딨어. 다들 그저 제 딴에 사는 거지…… 그러나 짜증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녀는 그 허전해진 마음을 달래려 폰을 들었다.
호준의 메세지는 무시하고, 그 예쁜이를 골랐다.
그렇게 취한 척을 했는데 모텔 대신 집으로 데려다줘서, 더 마음에 들었다. 그땐 자신도 살짝 정신이 나갔었다. 그러나 그 덕에 그 녀석이 더 괜찮은 남자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오히려 이득이다. 그저 여자 눕힐 궁리만 하는 그런 남자놈은 아니다. 지금 남자친구인 호준은, 뭐 사실 그런 놈인데.
"유경이 넌 남자친구 데려와. 공짜로 대접할게."
기분이 좋아진 과대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유경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과대는 얼핏 허름해보여도 계산이 빠르다. 호준이 온다면 아무리 공짜라고 해도 자존심 세우려고 돈을 더 내겠지. 호준과도 몇 번 만난 과대는 호준이 어떤 남잔지 이미 알고 있다. 태진을 꼬셔서 취직한 선배들 모시는 것도 다 의도했을 것이다. 태진이 예전부터 선배들과 친하고 잘 대해서 이리저리 인맥이 넓었다.
과대는 이미 사회속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유경의 게임은, 그녀 홀로 하는 것이다.
***
축제가 시작되었다.
소희는 강의를 다 듣고 가기로 해서, 조금 늦게 합류하게 되었다. 몇 학생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막상 그녀가 도착하자 진짜? 하는 소리와 함께 면식만 있는 동기들도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그녀를 보았다.
내가 이정도로 박혀 살았나…… 하고 소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희 넌 웨이츄레스야. 웨이츄우레스. 음식이랑 술만 나르면 돼."
"아 오빠 너무 차별하는 거 아님?"
"아냐 소희 그냥 호객 시켜. 걍 앞에 세워두기만 하면 돼."
그녀는 대충 맞춤한 듯한 검은색 앞치마를 둘렀다. 그녀가 등장하자 주변의 이목이 온통 쏠린다. 바로 옆에서 주점하던 경제학과 학생들도 상대에 저런 애가 있었냐며 웅성거렸다. 이런 반응이 익숙해서 소희는 조금 질리는 감이 있었다.
아직 해도 다 지지 않아 손님은 많지 않았다. 어두워지고, 강의 끝난 학생들과 졸업한 선배들 몇 오기 시작하면 진짜 술판이 벌어질 것이다. 소희는 상상만 해도 고개를 젓고 싶었으나 이미 하기로 한 것, 마음을 다잡았다.
입구에서는 유경이 서 있었다. 당장 할 일이 없어진 소희는 그녀 곁으로 갔다.
"안녕."
"어, 왔네?"
유경이 반가운 듯 웃었다. 눈치 빠른 소희는 짧은 순간 그녀의 낯빛이 굳은 걸 놓치지 않았다.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다. 소희도 억지로 웃었다.
"여기 서서 사람들 부르면 돼."
"으응."
소희가 서자마자 지나던 남자들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급기야는 두엇이 들어오기도 했다. 반응이 너무 빠르다.
남자 손님이 더 늘었고, 소희는 다시 돌아가 주문을 받았다.
"주문 도와드릴게요."
어설프게 손수 쓴 메뉴판을 보던 남자들이 늘상 그렇듯 소주와 제일 싼 탕을 하나 주문했다.
치마를 너무 짧게 입었는지, 바닥에 대충 깔고 주저 앉는 방식이라, 그들의 시선이 다리를 자꾸 훑는다. 소희는 기분이 나빴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너희들 보라고 이렇게 짧은 거 입고 다니는 거 아니니까.
그럼 누구 보라고.
…….
언제나 이런 생각들은 깔대기를 타고 흐르듯 한 점으로 귀결한다. 소희가 자리에서 멈췄다. 걷다가 갑자기 멈추자 몇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리에 떠오르는 잔념들을 떨쳤다. 만약에, 만약에 다시 만나면…… 그저 따귀 후려치고, 끝이다. 그런 녀석…… 잊을 거다.
오랜 암흑기를 감내하며 겨우 발을 내딛으려는 참인데.
다시 얽매여버리면 다신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소희가 다시 움직였다. 그녀는 그녀의 노출된 살갗을 훑는 시선들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걸어 음식들을 날랐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고, 경영학과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태진도 그곳에 섞여서는 자리를 잡고 크게 술판을 벌였다. 태진과 친한 동기들과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분위기를 띄웠다. 경영학과 주막은 전에 없이 호황이다. 특히 어디 소속인지도 모를 타과 학생들, 특히 공대생 과잠바 입은 남학우들이 소희를 발견하고는 홀린 듯 들어와 매상을 올렸다.
게다가 정장을 입은 선배 하나의 등장에 분위기가 더 달아올랐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임마, 무슨 조폭이야? 앉아, 앉아."
"형님 벌써 퇴근하셨어요? 일찍 오셨네요. 맨날 야근한다고 징징…… 아니지, 푸념을……."
"오늘은 여기 오려고 칼퇴근했다. 오늘이 불금 아니냐. 간만에 주말 특근도 없으니 태진이 너 이 새끼 죽을 준비 해라."
"하하. 형님 계실 때에도 저 못죽였는데 이제 회사원되서 기력도 예전 같지 않으셔 보이고 과연 저를……."
"회사원 무시하네? 회사원이 더 많이 마셔 새꺄. 맨날 회식이거든? 아, 후배님들 반갑습니다. 전 졸업한 김영호입니다."
"안녕하세요!"
"야 선배님 잘 모셔라. 대기업! ㅁㅁ! 다니시는 분이다. 오늘 형님이 쏘신다! 총알은 충분하십니까!"
"새꺄 걱정 마. 나 말고도 희윤이 유나 정근이랑 세나 누나까지 다 온단다. 오늘 너 토할 때까지 들이부어."
소희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태진의 붙임성 있는 성격이 어쩐지 신기했다. 예전의 자신은 어떻게 저럴 수 있었을까.
문득 소희를 발견한 영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장되게 놀란 자세를 취했다.
"이 후배님은 누구야? 빛이 나는데?"
"아, 소희라고, 귀한 몸인데 제가 겨우 섭외해서 모셨습니다. 형님 어서 이 까마득한 후배님께 먼저 인사 올리시죠."
"어이쿠, 후배님 반갑습니다. 김영호입니다."
그들의 장난에 소희는 웃고 말았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유경은 폰을 만지작거렸다.
"……."
잠깐 자리를 나와 휴대폰을 들었다.
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자신을 향했으면 좋겠다. 나를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꾸고 싶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나 유경인데.
우리 학교 축제하거든. 주막하는데, 와줄래?
보고 싶어.
수화기 너머에서 수현이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유경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