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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 번째 겨울
"야, 그 소식 들었어?"
"뭐?"
"어제 이소희 남자들이랑 밥 먹었다는데?"
"진짜? 그 얼음이?"
유경이 함께 걷는 무리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그녀와 대화하는 카톡 상대는 둘, 하나는 호준, 현 남자친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현이라는 남자, 예비 남자친구. 달리 말해 하나는 헤어질 사람, 하나는 새로 만날 사람이다. 지금은 수현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호준과의 이별을 유예하고 있었다.
"유경아 들었어?"
"응?"
"이소희 어제 남자들 여럿이랑 밥 먹었대. 대박."
"그래……?"
요새 이소희 갑자기 안하던 짓을 계속 하네. 유경은 잠시 휴대폰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했으나, 지금 수현이라는 남자에게 총력을 기울이는 그녀에게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남자가 궁해졌나? 누구랑?"
"그 태진이라는 오빠랑 창준이 규태, 뭐 그 쪽 애들?"
"흐음…… 그 복학생 오빠?"
"그 오빠 보니까 내가 볼 땐 그냥 배고픈데 돈 없어서 따라간 거 아냐?"
"화장실도 안갈 것 같은 애가? 그 오빠 사람은 괜찮으니까 뭐 같이 갔겠지."
"그래도 난 건호 오빠가 좋다. 잘생겼어."
"엄청 괜찮은 건 아닌데 우리 과에선 뭐."
이 기집애들아, 너희들이 남의 얼굴 따질 때니. 유경은 얼핏 생각하며 수현이 왜 답장을 하지 않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 먹자는 데이트 신청을 쉬크한 분위기로 먼저 언질을 줘봤는데,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으나 크게 좋아하진 않는 것 같다. 이정도는 괜찮다. 이 관계에서 그녀는 지금 언더독이다. 하지만 그것도 곧, 머지 않아 상황을 역전시키고 그가 자신에게 목을 매게 하리라.
"너는 요새 남자친구랑 잘 돼 가?"
"으응…… 뭐……."
문득 저 멀리에서 그녀들 수다의 당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유경이 휴대폰에서 눈을 뗐다.
멀리에서 걸어오는 그 모습을 마주하자 유경은 다시금 예전의 열등감 치밀었다. 다들 그런 거겠지, 떠들어대던 동기들의 말수도 줄었다.
목까지 내려오는 숏컷, 한 쪽 머리는 내리고, 한쪽 머리는 귀 뒤로 넘긴 모양새, 그 사이에는 작은 얼굴에 살짝 치켜올라간 도발적인 눈매, 곧은 콧날, 무심하게 닫힌 도톰한 입술과 갸름한 턱선이 있다. 여우상이나, 특유의 가라앉은 분위기 덕에 차분한 느낌이 난다. 몸매는 말라서 가슴이 크지는 않지만, 피팅 모델들처럼 어떤 옷이든 잘 소화할 수 있게 늘씬하다. 스키니진에 브이넥 티셔츠, 재킷, 특별할 것 없는 스타일인데 그녀들로서는 열등감을 느끼고 만다.
그녀의 무리와 이소희가 서로를 향해 걸었다.
앞으로 예상되는 광경은 이렇다. 떠들던 무리는 조용해지고, 소희는 조용히 걸어오고, 서로의 시선이 얼핏 얽힌다. 소희든 그녀들이든 안녕, 하고 인사는 분명히 하지만 그뿐, 그들은 애초에 남남처럼 스쳐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한쪽은 아무 생각 없고, 한쪽은 괜한 패배감에 우울해지겠지.
다시 한 번 느끼는 거, 외모란 불공평하다.
소희가 가까워졌다. 아, 오늘따라 더 예쁜 것 같네, 저 계집애는. 피부가 저렇게 희지.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희가 먼저 말했다.
"안녕."
그리고 그녀가 잠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짧고 덧없는 미소였다. 그 이변을 느낀 것은 유경뿐인 것 같았다. 동기들이 안녕, 안녕? 안녕- 하고, 각자의 톤으로 억지로 안부를 나눈다.
그 웃는 얼굴의 모양새.
저렇게 웃을 줄 아는 애였어?
잠시지만 보았다. 짧은 억지 웃음이었지만, 수줍어하거나 애매한 구석 없이 명랑하게 얼굴을 피는 그 흔적. 자신만만한 미소. 그런 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때였다.
"어-이!"
힘껏 소리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다닥, 달리는 발소리는 이곳을 향했다. 그들의 맞은 편이었다. 한 여자애가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이-소-희!"
소희보다 키는 조금 더 작다. 눈꼬리가 살짝 쳐진 부드러운 눈매, 구김이라고는 없이 분홍색 입술로 만드는 웃음이 아름답다. 소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예쁜 여자애였다.
그녀가 달려와서, 당혹해하는 소희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이소희, 어디 가!"
"어어. 진하 너 여긴 왜……."
"너 여깄다는 정보를 다 입수하고 왔지, 멍충아."
그녀가 뒤에서 소희를 껴안고 비비적댔다. 소희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경의 무리는 그녀들을 스쳐지나면서, 흘끗, 누구일까 어떤 관계일까 그런 궁금증들을 머리에 세운다.
유경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소희를 처음 보았을 때의 처참하던 기분이 다시금 떠오르고 한층 무게를 더한다.
얼굴밖에 없는 대인관계 제로의 모자란 여자애, 그게 너였다. 하지만 너는 오늘 처음 보는 미소를 보이고, 너처럼 축복 받은 미모의 여자애와의 친분을 보인다. 이해로 얽힌 그저 그런 관계가 아니라, 정말로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에게 익숙한 오래된 애정이다. 나는 가지지 못한 그런 것을, 너처럼 예쁜 애가, 또한 너처럼 잘난 애와 공유하고 있다. 너는 그저 얼굴밖에 없는 모자란 애였어야 했다. 그래야 나는 견딜 수가 있다.
허례로 얽힌 가벼운 관계의 여자애들과 함께 걸으며, 남자친구를 두고 다른 남자를 저울질하는, 너처럼 예쁘지도 못한 여자애, 그게 지금 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유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호준을 제끼고 수현의 카톡창을 띄웠다. 오늘 만나자. 식사를 하자. 나 오늘 왠지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야, 술은 내가 사겠다. 이런 의사들을 인터넷 어체에 맞게, 그에게 보이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게 적당히 조정하여 메세지를 띄웠다. 그러니까 너 오늘 잘만 하면 나랑 잘 수 있다는 거야. 너라도 가져서 내 옆에 세우지 않으면 못견디겠어.
"밥 먹자. 학식 말고! 맛있는 걸로!"
"좀 조용히 해. 떨어져."
"우리 쏘희 오늘 앙탈이 심한데?"
다른 사람 개의치 않고 그렇게 떠들 수 있다는 것도 자신감 때문이지. 좋겠다 예뻐서.
***
메뉴판이…… 없어?
유경은 잠시 얼어붙었다.
실은 레스토랑 정도를 기대하며 온 것이었다. 차가 벤츠였으니까 아마 돈이 많을 것이고 동네 밥집에서 밥을 살 사람은 아닐 것 같았지만…… 그랬어도 물론 반전 매력이라고 좋아했을 것 같다. 얼굴은 패션뿐 아니라 이미지 전체를 완성하니까. 그런데 지금 이 남자애는 지금 자신을 이 낯선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왔다.
벤츠 조수석에 앉을 때는 좋았다. 그때 주변의 여자들이 차를 발견하고, 곁에 선 수현을 보고, 이내 자신을 부러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한껏 즐겼다. 하지만 지금 아예 다른 세상 같은 레스토랑에 앉고 나니 위축되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지금 수현은 웨이트리스에게 이것저것 주문을 하고 있다.
처음 듣는 고기의 부위라던가 에피타이저와 후식 따위를 묻고 답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다음 차례는 자신인데, 아. 이거 뭐야. 메뉴판 없는 레스토랑 따위 와본 적도 없다고. 잘 사는 사람들은 정말 이런 데 와?
나 오늘 쪽 좀 팔겠다…….
수현이 주문을 끝내고, 웨이트리스가 유경을 향해 돌아서려는 참이었다. 유경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뭘 말하지.
그때 수현과 유경의 시선이 마주쳤다.
웨이트리스가 입을 열기 전에 수현이 먼저 말했다.
"너 가리는 거 없지?"
"으, 응. 응."
"그럼 쟤는……."
수현이 그녀를 대신해 주문했고 웨이트리스가 그걸 받아 적었다.
유경은 그 자상함에 감동했다.
아…… 얘 정말 괜찮다…….
레스토랑의 조명 아래에서 수현의 흰 얼굴이 마치 은은하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웨이트리스가 떠나자 수현이 유경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유경은 심장이 쿵했다.
식사는 즐거웠다. 대개 유경이 말을 하고 수현이 들어주거나 맞장구를 쳤다. 말하다가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수현의 검은 눈을 마주하면 유경은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고 얼굴이 빨개지고는 했다. 그렇게 당황하면 수현은 계속 하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웃는다. 그런 표정들, 몸짓만으로도 유경은 수현에게 빠져버릴 것 같았다.
자기 걸 먹어보라고, 수현이 쓰던 포크로 찍어 유경에게 내밀었고, 유경이 그걸 받아서 우물거렸다. 맛있다. 그리고 음식보다도 좋은 것은, 그 포크로 유경의 음식을 찍어 다시 입에 무는 수현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다.
식사 후에는 걸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예정대로 술을 마셨다.
유경은 자신이 사기로 한 만큼 자기답게 근처의 싼 프랜차이즈 주점으로 갔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여자들, 그리고 서빙하는 여자애들의 시선이 기분 좋다. 유경은 탕과 소주를 시켜서 계속 먹이고 먹었다.
낮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이소희, 그 계집애. 그녀가 주었던 첫인상. 오늘 그녀가 주었던 패배감. 자신의 꼬인 성격 때문이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알기 때문에 더 짜증이 난다. 카톡에는 곧 헤어질 남자친구 호준의 메세지가 떠올랐다. 평소엔 어디서 노는지 연락도 안하는 새끼가 이럴 때 카톡이야, 짜증나게. 유경은 술에 취하자 기꺼이 악의적인 상상들을 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얻었다. 좆도 작은 새끼. 좀만 느낄 만하면 자기가 쌀 것 같다고 허리 멈추어서 김 다 빼는 새끼. 이런 문장들을 혼자 생각하며 헛웃음을 짓는다. 아, 웃겨. 세상. 고개를 드니 수현이 살짝 상기한 얼굴로, 취기 어린 고요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기운의 힘을 빌려 유경은 사뭇 도발적으로 웃어보였다.
니 예쁜 눈.
그걸로 날 계속 보기만 해도 나 느낄 것 같다고, 이수현.
오늘 나랑 잘래?
직접 하지는 못할 말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경의 눈은 한층 색기에 젖는다. 오늘 얘기해보니 너 그렇게 눈치 없는 놈 아닌 거 알겠는데. 유경이 다시 소주병을 수현의 잔에 따랐다. 소주는…… 맑다. 맛이 어떻든 높은 도수와 역한 냄새가 어떻든, 보기에는…… 맑다. 조명등 아래에서, 물보다도 맑고 투명하다. 이 예쁜 걸 마시면 우리는 꼴사납게 취하지. 자, 예쁜아. 너는 어떻니?
"나 오늘 좀 취한다."
유경이 운을 띄웠다.
"원래 안이러는데…… 어지러워."
유경이 말했다.
"조금 기대도 돼……?"
수현의 맞은 편에 있던 그녀가 일어나 수현 옆에 앉았다. 좋은 냄새가 난다. 수현의 어깨에 살짝 기대어보았다.
"……."
흘끗 보니 수현은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뭐 봐……?"
"네가 볼 땐 둘 중에 누가 더 예뻐?"
수현이 휴대폰 액정에 두 여자의 사진을 올렸다.
새까만 머리의 고혹적인 미녀와, 금발 벽안의 화려한 미녀가 카메라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이었다. 컨셉은 악우, 정도일까, 둘은 서로 못마땅한 기색이다. 유경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여자 앞에서 어디 모델들, 그것도 보정했을 게 뻔한 화보 사진을 보여주면서 누가 더 예쁘냐고 묻는 건 일종의 밀당인가? 유경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거기서 거기네."
솔직히 이건 포토샵 보정 잔뜩 했잖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생겨?
"그래도 하나 골라봐."
"흠……."
동양 미녀 쪽이 약간 더 재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까, 눈빛에서 자만심, 같은 승리자의 기분 같은 게 엿보인다. 그래서 반대쪽을 찍었다.
"금발이 나아."
"정말?"
수현이 웃었다.
"어디 모델이야?"
"말해줘도 모를 거야."
"흥……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유경은 문득 소변이 마려워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현이 카톡을 열어 메세지를 보냈다.
[수현 : 이비 누나 야하게 입고 기다려^^]
[정하 : ㅁㅊ 뭐야 그년 눈 삐었어?]
[예브게냐 : 후훗 기다릴게 주인님♥ 빨리 와]
[정하 : 오늘 내 차례였다고 ㅆㅂ]
[예브게냐 : 그러게 왜 굳이 깝쳤니? ㅋ]
[정하 : 아 짜증나]
[정하님이 퇴실하셨습니다.]
[예브게냐님이 정하님을 초대하셨습니다.]
[예브게냐 : 풉ㅋ]
[예브게냐 : (음성메세지)]
[정하님이 퇴실하셨습니다.]
클릭하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낮게 들려오는 예브게냐의 녹아내리는 목소리. 주인님…… 빨리 와아 나 급해……. 수현은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아 빨리 가야지.
수현은 시계를 확인하고, 몸을 돌려 화장실 쪽을 보았다.
오줌 존나 오래 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