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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124화 (12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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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 번째 겨울

"야 저거 유경이 아냐?"

"어. 재 남자친구 있지 않냐?"

"놈팽이 새끼 있어. 한다리 건너 아는데 집만 부자인 양아치 새끼."

태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소희가 음료수를 받아줘서 기분도 좋은 날인데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 소희에 밀리긴 했지만 현실적인 외모로는 나름대로 그들 경영학과의 선두를 달리는 유경이었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데, 지금 그녀가 함께 걷고 있는 저 남자는 아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데 호리호리한 실루엣만 비친다. 뒷모습만으로도 분위기가 남달랐다.

"지 연애사인데 뭐 어때."

"이 새끼 오늘 소희가 음료수 받아줬다고 존나 관대한데? 지금 소희랑 잘 될 생각에 신난 거 아냐?"

"무슨. 음료수 받았다고 뭐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 그정도로 바보 아니다."

"크크. 전에는 뭐, 존나 허벌……."

"아, 씨 그냥 술에 취해서 장난으로 한 말이지 병신아."

태진이 웃으면서 친구의 팔을 쳤다.

소희가 음료수캔을 받아준 건 의외였다. 하지만 그간 소희를 훔쳐본 그는 나름대로 그녀도 남들처럼 노력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려운 강의 시간에는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도 하고,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에 머리를 붙박고 종일 지내기도 한다. 음료수캔을 받아준 것도 갑작스런 변덕이 아니라, 그녀도 나름대로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만, 또 영원히 그대로인 사람도 없다. 태진은 그런 모습을 보자 자신 또한 무언가 달라질 때가 아닌가 괜히 마음이 환기되는 것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첫 학기가 다 지나가고 있는데, 시험 약간 더 잘본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매일 술 먹고 놀고. 소희에게 음료수를 준 것도 그냥 반사적인 것이었다. 기대도 않았고 이제 이걸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받아주었다. 그걸로 뭐, 소희와 잘 될 수 있다는 괜한 기대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이 예쁜 여자애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고 변하려고 애쓴다는 걸, 그 순간 느꼈다.

태진도 제대할 때에는 이렇게 지낼 생각이 아니었다.

보다 뭔가 멋진 놈이 되려고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던 그가 헬기에서 강하했을 때, 목이 쉬도록 유격장을 구르고, 지독한 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그것이 다시 식으며 혹한이 엄습할 때, 그는 위장 크림 범벅이 된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감했었다. 하지만 지금 막상 자유를 맞이한 그는 이렇게 담배를 피우고 술이나 마시는 일상을 보낸다.

복학생 아저씨 그 자체다.

"안돼. 그러면 안돼."

"뭐?"

"한 번 맹호는 영원한 맹호다."

"에엥?"

"수사불패!"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다 새꺄."

"자네, 중간고사가 끝났다고 헤이해지면 안된다는 것 명심하게.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

"으악. 군바리 티 좀 내지 마."

"난 도서관으로 간다."

"야. 씨. 너 가면 나도 가야 되잖아."

태진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그도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태진은 그러다가  문득 한 소년과 어깨를 부딪쳤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데, 그 소년은 개의치 않고 먼 곳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진은 그를 스쳐지나며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보았다.

유경과 이름 모를 그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우연일까.

소년이 중얼거린다.

"드디어 찾았다."

무슨 소리일까.

태진은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을 애써 떨치며 발을 바삐 놀렸다. 이번 목표는 장학금이다. 복학했으면 그쯤해야 정신차린 티 나지 않겠어.

***

"주인님은 예전 여자친구들 안찾아가?"

"예전 여자친구……?"

수현이 쇼파에 누워 책을 읽다가 시선을 흘끗 돌렸다.

정하는 삼 년 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모습으로, 쇼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채 수현을 내려다보고 있다. 남쪽의 햇살 좋은 나라들을 돌아다니느라 살갗이 조금 탔다. 요새에 비키니 라인을 따라 드러난 태닝 자국이 잠자리를 할 때마다 수현을 자극했다.

"글세……."

이소희, 예지윤, 이런 이름들이었다.

그 얼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삼 년 전에 수현의 앞에 누나라는 여자가 나타났다.

수현이 믿어왔던 부모들은 없었다.

그래, 없었다.

실은, 왜 그동안 있다고 생각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 사실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암시를 걸어놓은 것처럼 수현은 세상에 없는 부모를 긍정했던 것이다.

그러자 모든 것들이 위태로워졌다. 애초에 그 자신은 누구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미한 어린 시절들이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지직거리고, 진실은 스크린을 치운 그 너머에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최초의 기억, 그 동물원은 무엇이었는가. 수현은 자신이 자라온 이 대한민국조차 낯설어졌다.

누나라고 하는 여자는 아무 답도 주지 않고 그날 밤에 홀연 다시 떠났다.

그리고 수현도 한국을 떠났다.

북미로 가 끝없는 황야를 보고, 남미로 가 아마존을, 오세아니아의 바다를, 아프리카의 초원을, 유럽의 도시를 차례로 떠돌았다. 가는 곳마다 낯이 익었다. 새로운 곳에 발 딛을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오를 것만 같은 기시감에 휩싸였었다. 낯선 땅에서 유혹한 이국의 미녀들에게서는 낯 익은 젖내음들이 났다. 안에 자리한 짐승은 더 커지고 음험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답은 찾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한국.

그녀들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

"어쩔까나……?"

정하의 눈이 휘었다. 그녀가 쇼파 등받이를 뒹굴 넘어들어 수현의 위로 떨어졌다. 수현의 위에서 깔깔 웃음을 터뜨리고, 둘은 키스했다. 키가 자란 수현은 이제 정하를 내려다볼 수 있다.

예전에 한국을 떠나는 순간에 그들은 수현에게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냥 그런 거였다. 그녀들을 유혹하고 다정한 말을 속삭여주고 날마다 몸을 섞었어도 실은 수현에게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 그런 거였다. 다른 것들보다 조금 더 마음에 드는. 그가 주었던 상냥한 웃음들에 의미는 없었다. 그녀들에겐 맹목적인 애정을 요구했으나 수현 또한 되돌려줄 필요는 없었다.

"인연 되면 다시 만나겠지."

"로맨티스트인지, 악당인지."

둘 다. 수현이 웃으며 정하의 입술을 핥았다.

문득 수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하가 그것을 들어서 대신 액정을 열었다. 카톡창에 낯선 여자의 이름이 있었다.

"누구야?"

수현은 대답 대신 정하의 입술에 혀를 밀어넣었다. 둘의 혀가 얽힌다. 정하의 한 손이 아래로 내려가 수현의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나한테 꽂힌 여자애."

"가는 곳마다 유혹하고 다니고."

"난 아무 짓도 안했어. 여태 다 봤잖아."

"예전에, 누구더라, 네덜란드에서 이사벨라? 걔는?"

"그 여자는……."

"그 여자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정하가 눈을 치뜨며 추궁했다.

"말 안할려고 했는데."

"뭘?"

"사실은……."

수현이 정하의 귀에 속삭였다.

"그 여자가 누나랑 너무 닮아서 참을 수가 없었어."

정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앙탈 부리듯 손에 들어온 수현의 물건을 꽉 움켜쥐었으나 수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정하의 뺨을 키스하고 입술을 빨았다.

"치. 카톡이나 확인해."

"읽어줘."

"어디 보자…… 그만해, 말 못해애…… 우웁, 츄, 쭙…… 츄, 흐읏. 오늘 밥 사주세욬, 키읔, 그때 신세 갚는다고 하셨으니 그정도는 괜찮죠? 히읗."

"같이 갈까?"

"됐어, 놀다 와. 이 꼬마애 많이 급한 것 같은데. 얘 몇 살이야?"

"……스물."

동갑이라고 말하려다가 수현은 말을 바꾸었다.

실은, 이제 그조차도 희미하다.

나는 몇 해를 살아왔을는지.

"좋을 때네. 주인님 옛날 여자친구. 이소희. 걔도 이제 딱 그 나이겠다."

"그런가……."

정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 고동을, 수현 자신의 심박 또한 닮아갔다. 그 일정한 울림 속에서 소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쁘고…… 순진하고, 치기 어리고, 어린 여자애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푹 빠져있었다. 그러자 문득 그녀의 존재감이 가슴 한 켠에 떠오른다. 잊고 있던 숙제를 마감 당일에 떠올리고 당혹하듯, 그녀가 그를 대하던 그 애정을 생각해내고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자신을 잊고 잘 살고 있을까.

자신과 함께 했던 그때처럼 환히 웃고 있을는지.

그녀는 항상 말했었다.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함께 살자고. 그녀도 노력할 테니 좋은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졸업하면 결혼하자고. 먼 미래의 행복을 말하는 어린 여자애를 보고 있자면 자신 또한 기분이 달콤해져서 수현은 그녀의 공상을 깨뜨리지 않고 그저 고개 끄덕였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공상의 한 가운데에서 황홀할 때에, 수현은 일별 않고 떠났다. 공상 속에 홀로 남은 그 여자애는 이제 현실로 발을 내딛었을까, 아니면 깨어진 꿈의 잔해를 붙잡고 여직 울고 있을 것인가.

어떤 쪽이든 미안하다.

실은, 내가 바랐던 꿈은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져 있었다.

정하가 가슴에 안긴 수현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안온하다.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자 정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현이 정하에게 다가와,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입을 맞추었다. 지금 그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입맞춤이 아니고, 혀로섹스하는 농도 짙은 키스도 아니며…… 그보다 지독한, 영원을 바라는 구애의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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