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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 번째 겨울
"쟤 누구야? 예쁘네."
"이소희? 얼굴은 반반한데, 성격이 장애야."
외제 승용차 안에서 유경이 말했다.
그의 남자친구는 중견 기업 사장 아들인 김호준이다. 이미 건물 몇 채를 상속받아 매달 나오는 임대료만으로도 비싼 외제차와 높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다. 외모도 준수한 편이어서 유경은 그를 알게되자마자 적당한 우연들을 가장해 그와 계속 만남을 유지했고, 결국에는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명문대 재학생이라는 타이틀과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접근했지만,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그녀에게 비싼 백을 사줄 수 있는 김호준이었다.
"왜, 관심 있어?"
"아니. 유경이 두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가 금새 장난을 쳤다. 유경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나보다 쟤가 좋음 쟤 꼬시던가. 뭐 가능하진 않겠지만."
"무슨 소릴 그렇게 하냐?"
"전자, 아니면 후자?"
"그야 전자지. 너 두고 쟤를 왜 꼬셔."
"대답이 좀 느린데?"
"얼척이 없어서 그랬다, 바보야."
유경이 차에서 내렸다. 외제차에서 내리는 예쁘장한 여자의 모습에 남자들이 흘끗거렸다.
그녀는 언제 툴툴거렸냐는 듯 싱긋 웃으며 운전석의 호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 간다. 나중에 데리러 와."
"나도 나름 바쁘거든."
"빠빠이."
유경이 강의동으로 걸었다. 바깥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이소희와, 저 멀리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며 낄낄거리는 남자들 외에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재수 없어.
그것이 소희에 대한 유경의 인상이다.
유경은 첫 강의 시간에 이소희를 처음으로 보았다.
합격생들의 사전 술자리에도, 오티에도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모두의 시선이 모였던 것을 기억했다.
여자들은 눈치가 예민하다. 소희가 나타나기 이전에 남자들은 아마도 자기네들끼리의 술자리에서 여자들 순위 따위를 쟀을 것이고, 아마 첫째로 자신을, 이외에 두엇을 더 댔을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유경은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그녀는 예쁜 편이었고 공부까지 잘했다. 공부만 하다 온 애들이 뻔하지. 괜찮은 선배들도 먼저 접근해오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이소희, 명단에 이름은 있고 얼굴을 보이지 않은 이 여자애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녀는 수치심마저 느꼈다.
얼굴이 고요하다.
사람의 얼굴이 유전자의 레벨에서 결정된다면, 그녀는 터무니 없는 확률 끝에 태어난 천운의 주인공이었다. 티비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여자애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는 어떠한 치기나 오만함, 허영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함께 하게 될 동기나 선배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듯 했고, 자신의 미모를 아예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빈 자리가 없어 한 남자애가 앉아 있던 두 칸짜리 책상에 가방을 올렸다.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는 의자에 곧게 앉아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았다. 유경은 취해서 벌거벗고 춤추다가 확 술이 깬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진짜 공주가 나타나면 가짜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 모두가 술렁이는 가운데, 유경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었다.
물론 이소희가 단순히 무심한 것 이상이라는 걸 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들지 않았다. 과제와 같은 일로 얽히면 자기 일은 한다. 그뿐이었다. 그냥 얼굴 반반한 이상한 애였다. 저런 얼굴에 저런 성격이면 뭐, 따돌림이라도 당했던 거겠지. 그러나 그날 받은 충격의 잔향이 남아 그녀는 이소희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밑바닥을 일깨운 이에게는 근거 없는 적개심만 남는다.
"안녕."
유경이 인사했다. 소희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안녕."
"우리 같은 강의지? 아직 전강의 강의중이야?"
"응."
소희는 차분했다. 유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말만 걸어도 피곤한 기색이던 애가 왠지 조용하다.
"어이. 이거면 되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발성이 좋은 듣기 편한 목소리였다. 유경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키 큰 남자애가 걸어오고 있었다.
……멋있네.
키가 크고 비율이 훌륭하다. 말하자면 이소희에게 꿀리지 않는 남자였다. 운동을 했는지 훌륭한 체격이 옷 밖으로 태가 났다. 그가 유경을 발견하고서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소희 친구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전 소희 고등학교 때 친군데 놀러 왔어요. 박정태에요."
웃을 때 더 멋있었다. 유경은 그와 소희를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아. 그냥 친구에요."
"아하."
유경은 본능적으로 그의 차림새를 몰래 훑었다. 잘 사는 애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정태가 소희에게 음료수캔을 건내주는 것을 보며 유경은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소희 대신 자기가 저기 끼어든다면 저리 멋진 그림이 나올까. 텔레비전 속 영상의 한 장면 같았다.
역시 외모란 불공평하다.
그저 주어진 대로 받는 거니까.
유경은 소희를 보았다. 다른 남자와 대할 때에는 확연히 다르다. 그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태라는 남자가 좀 웃으라고 어깨를 툭툭 칠 때는 소희가 피식 웃기까지 했다.
그 짧은 미소.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그녀의 웃음이었다.
"나는 간다. 또 보자."
"어. 잘 가."
정태가 멀어졌다. 소희도 벤치에서 일어났다.
소희는 다시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 없는 얼굴로 유경에게 조용히 말했다.
"……쟤 여자친구 있어."
"……."
말수는 적은 게 속으로는 눈치 더럽게 빨라.
유경은 괜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호준과 계속 사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 생기고 돈 많은데 너무 가볍다. 다른 여자가 없는 것 같지도 않다. 그녀는 사람이 쉽게 변할 수 있으리라 믿을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가벼운 남자는 계속 가벼운 법이다. 생일까지만 사귀다가 적당히 깨져야겠다. 그리고 새로운 남자는…… 방금 남자애 정도면 좋았을 텐데.
어쩌다보니 소희와 함께 강의실로 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좀 어색하다. 소희를 쳐다보니 요년은 역시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다. 진짜 온리 마이 웨이 스타일이다.
"방금 그 애랑은 친한가봐?"
"응."
"정태랬나? 걔 여기 그냥 너 보러 온 거야?"
"여자친구 보러 온 김에 들렀을 걸."
"여자친구도 이 학교야?"
"아니. 옆 예대 연영과."
연영과면 예쁘겠다……. 유경이 어깨를 으쓱하는데 문득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선배인 태진이었다. 흔한 복학생 중의 하나로 이미지도 딱 복학생 그 자체였다. 소희와 유경이 함께 다니자 조금 놀란 얼굴이다. 하기야 소희가 누구랑 같이 다니는 성격이 아닌데, 그 동행도 나름 이소희 다음을 달리는 나 박유경이니까. 유경은 웃으며 인사했다.
"어,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 강의 들으러 가니?"
"네."
그리고 가려고 했는데 태진은 할 말이 있는 기색이었다. 유경은 불편해졌다. 그가 소희에게 관심 있는 건 다 알았다. 손에 음료수캔 있는 거 보니 주려고 하는 모양인데 소희 손에는 이미 캔커피가 있는 상황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따서 마시면서 가세요, 선배님.
하지만 태진은 소희에게 캔을 내밀었다.
"소희야. 이거 강의 들으면서 마셔."
유경은 소희를 바라보았다. 이 계집애가 거절에 능하다는 건 이미 익히 알려져 있다. 어떤 레파토리로 다시금 이 남자를 내칠 것인가 유경이 기대하는데, 의외로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맙습니다."
얼굴 표정은 안고마운 표정이지만 받기는 받았다. 유경이 놀랐고, 태진도 놀랐다.
"그럼."
소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마실래?"
소희가 유경에게 캔커피를 내밀었다.
태진이 준 것은 아니고, 정태가 준 거였다.
유경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소희가 싸가지가 없어서 혼자 다니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으나, 방금은 마치 태진의 마음을 배려해서 버거운 짐을 겨우 받아준 듯한 모습이었고, 별로 좋아할 것 같지도 않은 탄산음료를 성의를 생각해 자신이 가지고 캔커피를 자신에게 내밀자 그녀가 기특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고마워."
오늘따라 이소희가 되게…… 착하다.
유경은 교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생각을 접었다.
소희도 노트를 펼쳤다.
실은, 소희로서는 오늘 정태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도 아마 진하가 궁시렁대서 온 거겠지. 소희는 짐작할 수 있다. 박정태와 송진하는 졸업 전부터 사귀기 시작했다.
이젠 그냥 그 녀석 없다고 생각하고 살 때 아니냐?
오히려 너한텐 다행인 거 같다. 걔 하나 없어졌다고 네가 이렇게 되면, 나중엔 어떻게 됐겠냐?
좀 릴렉스해라.
릴렉스.
하지만 박정태, 네가 오해하는 게 있어.
나한테 필요한 건 릴렉스가 아니야…….
지금 나는 오히려 아주 퍼져서 움직일 힘이 하나도 없이 뭉개진 잔해 그런 거야.
힘이, 없다고.
지금 나한테 남은 힘이라고는.
그 녀석 다시 만났을 때 따귀 때려줄 힘뿐이야.
***
유경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날이 쌀쌀해져서 짧은 스커트로는 다리가 시리다. 앞으로 스타킹이라도 신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득 까페 창 바깥으로 외제차 하나가 미끄러지고 있었다. 차는 잘 모르지만 벤츠의 상위 클래스라고 들은 것 같다. 요새 서울에는 돈 많은 놈들이 참 많아…… 중얼거리는데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
유경은 물고 있던 빨대를 떨어뜨렸다.
잘생긴 사람은 많이 보았다. 유명 클럽에서는 이따금 밤놀이 나온 연예인들 얼굴도 지나치며 본 적 있었다. 그들 누구도 저렇지는 않았다.
아름다웠다.
소년기와 청년기 그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맞닿은 시기, 그 두 가지가 부딪치며 빛을 뿜어내는 그러한 모습이었다. 키는 백팔십이 조금 안될까 싶은데, 딱 그 정도가 어울리는 퇴폐적인 미모였다. 소년처럼 천진한데 새까만 눈에서는 색기가 떨어졌다. 유연한 몸은 유려해서 군살이라고는 없다.
마치 그래픽을 보는 것처럼 비현실의 영역에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현실에서 이러한 광경을 목격하자, 마치 발밑이 어그러지며 추락해버릴 듯 현실감이 사라졌다.
그녀는 저 외모를 본 떠 조각이라도, 아니면 사진이라도 찍어 간직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 남자가 걸어들어왔을 때 유경은 저절로 심장이 뛰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새까만 눈은 칠흑 그 자체였다. 흰 피부에 대비되어 한층 고혹적이다.
그가 카운터 상단의 메뉴를 쳐다보다가 문득, 곁에 앉아서 훔쳐보는 유경을 보았다. 그녀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저 새까만 눈동자.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저 검은 눈에는 감정이라는 게 있을까. 그저 인간을 흉내내어 움직이는 존재 아닐까. 그래야만 설명되는, 저 퇴폐적인 빛.
"여기 뭐가 맛있어요?"
"아……."
목소리도 섹시했다. 유경은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수줍은 처녀 마냥 이렇게 굴다니. 말도 안돼.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것도 똑같은 사람이다. 유경이 하나 제대로 배운 게 있다면, 외모에 꿀리지 않고 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잘 생겨도 결국은 사람이다. 저렇게 사람 같지 않게 생겨도…… 안은 똑같이 먹고 싸고 자는 남자놈이다. 그녀는 억지로 생긋 웃었다.
이정도면 내 모든 걸 걸고 꼬실 가치가 있다.
============================ 작품 후기 ============================
박정태 : 가장이라 면제(부양가족 면제)
이수현 : 능력으로 면제
(구)김상호 : 교도소 갔다와서 면제
요한 : 외국인
해두산 : 육군 병장 만기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