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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122화 (12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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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 번째 겨울

"저기요."

돌아보았다.

잘생긴 남자가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의 손에서 금방이라도 휴대폰이 내밀어질 것 같다. 그의 어깨 너머에서 한 무리가 이쪽을 바라보며 실실거렸다. 대충 알 만하네. 소희는 갑자기 피곤이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할 말 해보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순간 이것 봐라, 하는 기색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강의 혼자 들으시나봐요? 매일 혼자 오시던데."

"……."

"혼자면 심심하실 텐데 앞으로 인사도 하고 그래요."

"네."

소희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굳이 모두에게 차가울 필요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문제는 그녀의 마음이다. 상냥할 여력이 없다. 추위에 떨며 남에게 내어줄 온기가 없는 것처럼, 그녀는 이러한 모든 접근들이 진저리났다. 그래서 최대한 애써 대답한 것이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하지만 그 다음의 이어질 단계를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

번호라도 교환해요. 여기.

하고, 그가 말했을 때 소희는 아, 또, 하고 생각했다. 또 한 차례 따가운 시선 받겠네. 하지만은, 그녀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휴대폰을 받아내 그곳에 자신의 번호를 눌러주는 그 짧은 순간을 도저히 감내할 수 없다. 이어질 그의 연락과, 마음에도 없는 말로 받아주면서 그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명백하고, 좋은 친구로 지내자는, 애초에 얽히고 싶지도 않았던 사람이 이깟 소리 하는 걸 견디기도 힘들다. 그 모든 것을 제하더라도, 번호따위 주고 싶지 않다. 자신의 번호를 눌러주는 그 짧은 순간이 혐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짜증나게 하기 싫다.

그리고 왜 이렇게 예민한지 그녀 자신도 답을 알고 있다.

답을 안다는 것도 짜증난다.

자신의 비틀린 성미와 신경질적인 사고과정이 무엇에 연유했는지 스스로 잘 알고, 그게 너무 한심해서 자신이 싫어진다.

그래서 소희는 그가 내민 휴대폰을 보면서, 스스로의 생각만으로도 지쳐버렸다.

이렇게 짧게 밖에 대답할 수가 없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개뿔이. 짜증을 숨기고 공손해야 한다는 것이 다시금 못마땅하다.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좋은 징조가 아닌데.

"아니, 그냥 알고 지내자는 건데. 저 뭐 찝적거리고 그런 거 아닌데요."

"……제가 번호 교환은 잘 안해서."

귀찮게 왜 이런 말을 앵무새처럼 하고 있어야 하지. 그냥 말없이 몸을 돌리고 이 자리를 뜨고 싶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매 호흡마다 들어차는 공기까지 버겁다.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바로 이해하고 떨어지면 안되나.

"선후배 사이로 잘 지내자는 건데 사람 좀 이상하게 만드시네."

소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냥 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지금이 학교가 아니라, 집이었으면. 그냥 침대에 누워서 죽은 듯이 눕고 싶다. 지긋지긋한 것들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잠으로 침몰했으면 좋겠다.

그는 무어라 다시 말하고 있었다.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소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속삭였다.

"……관심 없다고요."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힘없는 그 어조에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도도하다거나, 싸가지가 없다거나, 성격이 차가운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도 알 것이다. 그녀는 지쳐 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번잡한 생각들에 가득 차 마음에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그녀의 고독은 진정으로 원한 것이다.

소희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었다. 발걸음이 위태롭다.

쟤야. 쟤.

진짜 예쁘네.

싸가지는 없다던데?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어지럽다. 잠시 이마를 짚고 서 있었다. 침착해. 남은 강의가 몇 개였더라. 그냥 집으로 갈까. 어디에도 그녀를 향하는 시선들이 있다. 잘난 자기 얼굴한테마저도 짜증이 날 것 같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여어."

소희가 뒤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다. 짧게 쳐올린 머리, 큰 키에 남자다운 얼굴로 여유로운 웃음을 입가에 늘 머금고 있는 녀석. 소희는 안심되어서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박정태."

"잘 지내냐? 얼굴이 왜 그리 더위 먹은 얼굴이야. 추운데."

"……따라 와."

"어디 가."

소희가 정태의 소매를 붙잡고 잡아끌었다.

학교 후문 근처 카페에 앉았다. 정태를 앞에 앉혀두고 그대로 엎드렸다. 카푸치노 아이스를 빨대로 꼴깍거리던 정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사람 앉혀두고 뭐해?"

"잠깐만 그대로 앉아 있어."

"왜 이리 힘이 없어. 천하의 이소희가."

소희는 대답 없이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정태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의자에 기댔다. 여자친구의 카톡이 계속해서 울렸다. 귀찮아서 주머니에 넣고는 컵을 들어 그냥 마셨다. 주위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픽 웃고 말았다. 여전히 얼굴값 하네.

"사람 앞에 두고 자냐?"

"그냥 좀…… 있어."

소희의 말에 정태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수현이 사라진 이후 소희를 지켜본 그였으므로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는 알고 있다. 대학에 들어와서 어떻게 될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일 때에도 이수현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이 녀석 저 녀석 찝적거리기도 했었으니까. 이따금은 질 나쁘게 구는 녀석도 있었다. 수현이 없었으므로 정태가 소희를 도와주었다.

하다보니 괘씸해서 죄다 짓밟고 졸업 전에는 운무고 짱이라는 유치한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 어린애 장난 싫었는데. 수현이 갑자기 사라져서 그 자신도 잔뜩 짜증이 난 상태여서 누군가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진짜 자냐?"

"……."

안자네. 정태는 소희가 손도 안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슬쩍 가져와 마셨다. 단 걸 마신 후라 더 쓰다.

슬쩍 소희의 머리 옆에 있는 그녀의 휴대폰을 들었다. 자지 않아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소희는 말없이 엎드려 있었다. 비밀번호도 걸려 있지 않다. 사람들 연락처 개수도 극히 적다. 이따금 송진하, 박서은 같은 익숙한 이름들도 있는데 그게 다였다.

영번은 아직도 이수현이다.

정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

그녀, 혜진은 쫒기고 있다.

대낮이었으나 적이 펼쳐둔 결계가 드넓어 피할 수가 없다.

요새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일명 거미, 마법사의 수작이었다. 그는 무차별로 정글의 주민들을 공격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그의 취미는 결계를 펼쳐 그 안에서 발악하다 죽어가는 적을 보는 것.

여기서 이렇게 걸릴 줄은 몰랐는데.

저 멀리서 거미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로잡히느니 죽는 게 나을 것이고, 그럴 준비는 되어 있다.

떨리지만, 정글의 주민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가.

누구를 죽여도 되고,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

그때였다.

"도와줄까요?"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허스키하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소년의 것 같기도 청년의 것 같기도 했다. 목소리와 함께 미풍이 불어들었다. 그녀가 뒤돌아보았다.

소년과 청년, 그 사이 즈음에 걸쳐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녀가 보았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아름답다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생김새였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모두 칠흑처럼 까만데, 피부는 희다. 키는 백칠십칠, 팔쯤 될까, 호리호리했으나 옷 안으로 자리한 유연한 근육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퇴폐적이고 섹시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저딴 녀석부터 만나네."

남자의 뒤에서 걸어나오는 건 눈부신 금발벽안의 미녀였다. 차림새가 화려하다.

"전 시차적응 덜됐어요. 아함."

곁으로는 눈부신 미소녀가 기지개를 켜며 나타났다. 어린 듯 보이나 키가 늘씬하다. 그녀의 곁에는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붉은 눈동자를 뜨고 둥실 떠 있었다.

"저 자식 기분 나빠. 내가 죽일게."

그림자에서부터 홀연, 늘씬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본 소년만큼이나 칠흑을 닮았으나 그녀는 마치 핏빛과 같은 붉은 기운이 희번뜩인다. 그녀가 잠깐 뒤돌아보며 혜진의 곁에 선 소년에게 미소지을 때에, 그 고혹적인 분위기는 여자인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녀가 등장할 때와 같이 그림자로 스러졌다. 그리고 저 너머, 거미가 있는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살육은 짧았다. 되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결계는 걷혔다. 그림자에서부터 스캐빈져들이 떠올라 그녀의 손을 핥았다. 마치 어둠에 잠기듯 그녀의 손에 묻은 피들은 정글의 청소부들에게 쓸려들어갔다.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에 혜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곁에 서 있던 소년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이제 안전해요."

"아, 주인님 또. 또."

그 고혹적인 흑발의 여인이 미간을 찌푸리자 소년이 혜진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웃었다.

그들이 함께 하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혜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들 누구신지……?"

"우리요?"

소년이 말끝을 흐렸다.

"그냥…… 착한 행인?"

"뭐야, 그게."

"맞잖아. 우리 행인이고. 나빴으면 도왔겠어?"

소년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거리의 구석, 그늘 드리운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팔에서부터 어둠이 흘러나와 허공을 꿰뚫는다.

허공에서부터 피가 배어나왔다. 소년이 씨익 웃었다. 손을 끄집어내자, 그에서부터 이어진 어둠이 허공을 뒤집어 끌어들였다. 그리고 공간이 갈라진 틈에서 또 한 명의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질질 끌려 나왔다.

서울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살인마, 거미의 정체는 둘이었다.

그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무어라 웅얼거렸다. 소년은 개의치 않고 손을 꽈악 쥐었다. 어둠이 그를 으깨어 없애버렸다.

"삼 년이면 많이 변했겠지, 이곳도?"

수현이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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