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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 번째 겨울
저 년은 얼굴 믿고 저렇게 뻣뻣한 거냐?
그녀는 노트를 덮고 일어났다. 조별과제 한 번 같이 했다고 같이 술 먹을 의무가 생기는 건가. 저열하게 뒷말하는 거 다 들린다고 쏘아주는 대신에 그냥 강의실을 나섰다. 복도의 열린 창으로 새어드는 바람이 쌀쌀해지고 있었다.
다시 겨울이 오고 있다.
강의동을 나오자 바람이 불어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녀는 머리를 정리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호리호리한 뒷모습이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가벼운 몸짓이 누군가를 닮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뒤를 향해 발을 내딛다가, 그가 동행과 웃으며 이야기할 때 드러난 옆얼굴을 보고서, 멈추었다. 그는 아니다.
전혀 닮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기분이 처참해졌다.
바닥을 향해 낮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문득 저편에서부터 지나가는 여자들 몇이 그녀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같은 과 동기…… 라고 했었나. 전공 시간에 유난히 어울려 떠들어대는 그룹이 있었지. 그녀는 그네들의 못마땅한 시선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바닥을 친 기분을 그대로 담았다. 시선을 먼저 피하는 건 그쪽이다. 그렇겠지.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치며 걸음을 옮겼다. 너희는 나와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니까.
나는 예쁘니까. 그녀에게 여자의 질시는 익숙하고, 접근하는 남자들의 호감들이 분노로, 저열한 뒷얘기로 이어지는 일은 수없이 겪었다. 같이 무리 짓지 않으면, 밥 한끼 술 한잔 같이 하지 않으면 그들은 금새 뒤에서 떠들어댔다. 물론 먼저 거리를 둔 것은 그녀다. 그들에게 마음에도 없이 상냥하게 대해줄 수도 있겠지. 사회가 그렇게 굴러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언제나 기분이 저조해서 억지로 웃어줄 힘이 없으니까.
어떤 개새끼를 욕하고, 그리워하느라 지난 삼 년을 지새우고 지금도 하루하루 타들어가고 있으니까. 가슴에는 재만 남아서 타인을 위해 미소지을 좋은 것들은 옛날에 산화했다. 싸가지 없다거나, 차갑다거나, 웃을 줄 모른다거나, 사회성 제로라던가, 하는 평들은 기꺼이 감수하겠다. 이제 사실이니까.
그녀는 다른 건물로 넘어가 교양 강의실 중간 빈자리에 앉았다. 어김없이 주변의 시선들이 웅성거린다. 그녀는 노트를 펴고 눈을 내리깔았다. 늙은 교수가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간신히 출석부 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유종훈…… 김건태…… 이수영…… 어, 거기."
교수가 아직 열려 있던 강의실 뒤쪽 문을 향해 말했다.
"거기, 거기 수현 학생. 여기 프로젝터 좀 준비해주겠나."
순간, 그녀는 귀를 의심했다.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예, 교수님."
낯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는 자조했다.
바보.
그럴 리 없지.
강의실 뒷자리의 시선들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놀란 눈, 태평한 얼굴들, 저 여자가 왜 저러나 싶은 그 표정들에 그녀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되돌려 앉았다. 볼펜을 노트에 짓눌러 길게 주욱 그으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단어들을 되뇌었다. 중증이다, 너.
창 바깥 캠퍼스에서 와하하 웃는 소리들이 새어들어왔다.
노트를 직직 긋다가 볼펜 끝을 입에 물었다.
"이소희."
"……네."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
"그년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도도해? 어?"
태진은 소주잔을 들이키고, 곧바로 담배를 입에 물면서 말했다. 곁에 앉아 있던 후배가 곧바로 불을 붙여주었다.
캠퍼스 앞 주점은 늘 북적거렸다. 전통 주점을 컨셉으로 메인홀 하나와 주변으로 방을 여러 개 나누었는데, 바깥을 차지한 과 단체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태진의 신경을 긁었다. 술게임이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꺅꺅대는데, 태진은 괜히 씨발, 욕설을 더하면서 술병을 들고 마주한 이들에게 차례로 따랐다.
"얼굴 존나 잘났잖아. 그정도면 도도해도 되지."
"그래요. 저도 첨 봤을 때 깜짝 놀랐어요. 와, 이 학교에 저런 애가 다 오네 씨발?"
"요놈 새끼. 형들 앞에서 씨발씨발거리고 이 씨발놈이."
친구 녀석과 후배 하나가 낄낄댔다. 태진도 피시식 웃으면서 담배 연기를 뿜었다.
아주머니가 주문한 알탕을 들고 와 탁자에 올리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태진이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오오, 이모 감사합니다. 여기 알탕을 잊을 수가 없어서 또 왔네."
"응, 먹고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술? 더 먹을 거지?"
"네, 이모 소주 세 병이요."
"우와, 이놈 이거 두 병이라고 해도 놀랄 거였는데 세 병을 시키네."
"헤헤. 어차피 더 드실 거잖아요. 일인일병이 기본이라고 하신 게 누구시더라."
"크. 이 멋있는 후배 새끼."
"소주 세 병이지? 한 병은 서비스해줄테니까 적당히들 먹어."
"이모 싸랑합니다!"
술병을 내오자마자 태진이 따서 한 명 한 명 따랐다.
"그러고보니 경렬이 너 이소희랑 같은 학교 나왔다고 하지 않았냐?"
"맞다. 그랬지."
셋의 시선이 쏠렸다. 경렬은 안경을 고쳐쓰며 씩 웃었다.
"네, 그랬죠."
"걔 어땠냐? 고등학교 때도 저렇게 존나 쌀쌀맞았냐? 남자혐오증 이런 거 아니지?"
"고등학교 때는……."
경렬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해야 되지…… 원래는 안저랬어요. 오히려 완전 밝았는데."
"엉? 걔가 밝았다고?"
"야, 진짜야? 상상이 안가는데? 형들도 걔 웃는 거 본 적 없죠?"
태진이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갑자기 술이 땡기는구나."
넷이 술을 들이켰다. 경렬이 켁켁댔다.
"야 못먹으면 반잔만 해."
"윽크, 괜찮습니다."
"야 그 얘기 좀 더 해봐. 걔가 밝았다고?"
경렬이 알탕 국물을 떠먹고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니까 소희 걔는 원래…… 날라리? 그런 거였어요. 솔직히 공부도 좆도 못하는 그런 애요. 얼굴 몸매 쩌니까 일진 뭐 이런 애들도 꼬이고…… 그런 것치고 애가 붙임성이 있어서 보통 애들이랑도 잘 지냈는데 공부랑은 담 쌓고 매일 놀러 다니고 그랬죠. 맨날 걱정 없이 깔깔거리는 타입 있잖아요."
경렬은 세 남자의 뜨거운 시선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계속해. 계속해."
"진짜 상상 안간다. 걔 무슨 불의의 사고로 머리라도 다쳤냐?"
잠시 경렬이 말을 고르다가 번쩍 술병을 들었다.
"오, 이놈이 이제 뭘 알아. 뭘 알기 시작했어. 이런 얘기에는 술이 있어야지."
경렬이 공손히 선배들에게 술을 따르고, 동기인 녀석에게는 엉거주춤 어설프게 한 손인지 두 손인지 모를 자세로 술을 따랐다. 태진이 큭큭 웃었다. 바깥에서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랜덤게-임 랜덤게임! ○○이가 좋아하는 랜덤게임!
"랜덤게임 좋아하네. 씨."
넷이 동시에 술을 다시 들이키고, 경렬은 황급히 알탕을 퍼먹고는 말했다.
"걔가 남자친구가 있었거든요."
"언제?"
"고일 때요."
"그때면 뭐…… 별 일은 없었겠네?"
"모르지. 얘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
"아뇨아뇨. 유명했어요. 걔네 둘이 모텔 가는 거 본 거 한 둘이 아닌데."
셋이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태진이 씨발거리며 다시 술을 따랐다. 넷이 먹다보니 금새 동이 난다. 태진이 새 병을 따서 다 안찬 경렬의 잔에 채워주었다.
"크…… 여튼 걔네가 유명했어요. 남자애도…… 진짜 잘생겼었거든요. 미소년 타입. 소희가 오히려 딸리고 이수현이…… 걔 이름이 이수현이었는데 여튼 걔가 아깝다고 여자애들이 뒷담깔 정도였어요. 또 걔는 날라리도 아니고 공부도 잘하고 애도 착해서 솔직히 소희랑 이어질 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는데. 둘이…… 특히 소희가 좋아 죽었어요, 걔한테…… 수현이 걔가 자취했는데 그럼 말 다한거죠. 둘이 밤에 같이 다니고 같이 걔 집 들어가고 모텔 들어가고 한 거 목격자가 한 둘이 아니에요."
태진이 문득 중얼거렸다.
"씨발 허벌보지년."
"어, 형 좀 심하셨다."
"미안하다…… 근데 이 배신감을 참을 수가 없다…… 이 씨발 허벌보지년. 개년."
"풉, 크크크, 아 형 진짜."
"크흐흐, 저 새끼 소희 좋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이젠 입에 담지 못할 말도 서슴없이 하네."
"그런 주제에 존나 도도한 척 쩔었네. 누가 뭐 사귀재? 그냥 선후배들 모여서 술이나 한 잔 하자는데 그렇게 칼같이 거절하는 애가 어딨냐?"
"뭐, 걔가 좀 그렇긴 하더라."
"독고다이에요, 독고다이. 진정한 자발적 아싸. 여자애들은 안그래도 질투하는데."
"우리 과에 질투할 애라도 있냐. 크큭."
"얼굴이 다 싸그리 망하긴 했죠. 싹쓸이 나가리. 소희 빼고. 근데 걔는 스스로 나갔으니 판 쫑!"
"어쨌거나 그래서 그 남자애는 어떻게 됐냐? 둘이 깨졌냐?"
경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갑자기 걔가 자퇴했어요."
"자퇴?"
"일 학년 다 끝날 때 쯤에 갑자기 자퇴하고 사라졌어요. 소희도 아무 말도 못들었다고 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애가 한동안 병신이 돼서 진짜 하루종일 멍 때리고…… 쉬는 시간에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울고……."
"헐."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서 미스테리한 사건이었죠. 뒤에서 수현이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많았는데 다들 충격 먹고. 뭐 사업이 망했느니 집이 야반도주를 했다고도 하고 호빠에서 일하는 걸 봤다 그런 이상한 루머 진짜 많이 돌았어요. 그래서 소희는 진짜 이 학년 초까지 애가 맛이 갔다가 이후로 갑자기 공부만 하는 거에요. 걔랑 맨날 붙어다니는 단짝, 걔도 얼굴 예뻤는데 걔랑도 안놀고 잘 웃지도 않고…… 딱 지금의 모습처럼…… 그래도 그땐 가끔 이야기도 하고 웃기도 했는데 점점 심화과정을 밟고 지금이 된 거죠."
"그런 사정이…… 내가 그 얼어붙은 마음을 내 뜨거운 심장으로 녹여주고 싶네."
"이 새끼 시인이네."
"학교 선생님들은 되게 좋아했죠. 맨날 놀러 다니고 최하위권에서 놀던 애가 맛이 가더니 최상위권 찍고 저희 학교까지 왔으니까. 얼굴 예쁘니까 막 학교 홍보 사진 찍자고도 했는데."
"그렇지. 난 처음에 무슨 아이돌 그룹 특혜 그런 건 줄 알았잖아. 신입생이 있는데 막 얼굴에서 빛이 나서."
"너 새끼 아까는 뭐? 허벌보 뭐?"
"크…… 미안하다. 씨발…… 그래도 걘 이미 존나 따여서 여전히 허벌보지겠지…… 그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로 허벌이라니……."
"푸하하, 미친 새끼."
"형 잘 해봐요.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요. 언젠가 형 말대로 형 뜨거운 심장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서 옛날 남자친구 잊고 새사랑을 할지."
"그래, 고맙다…… 노력해볼게…… 허벌이긴 하지만……."
"아이, 새끼야. 푸하하핫!"
경렬도 취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다시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했다. 소희가 미니스커트를 입었을 때 다리가 어쩌냐느니, 가슴은 빈약하지 않냐느니, 성형은 아니냐는 등의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술병이 비고 눈동자는 흐릿하다.
경렬은 문득 저 바깥을 지나가는 익숙한 누군가를 본 것만 같았다.
"어."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눈짓했다.
경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셋의 시선이 모이자 꼬이려는 혀를 다잡으며 말했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 거리는 여전히 북적거리고, 인파로 가득하다. 그처럼 취한 이들도 이따금 밖에서 바람을 쐬며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 있었다. 경렬은 두리번거리다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오랜만이다."
"어. 정태야. 진짜 간만이네."
뒤에는 정태가 서 있었다. 큰키에 남자다운 얼굴, 호리호리한 것 같지만 날렵한 근육으로 꽉 찬 모습 그대로였다. 근처 학교의 체대에 갔다고 들었다.
"여긴 왠 일이야?"
"나 여자친구가 너랑 같은 학교거든. 술 먹고 취한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겠다. 여기가 목로주점 아니냐?"
"여긴 목포주점이고 목로주점은 딴쪽이야."
"아, 그러냐."
정태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펴?"
"어…… 끊었었는데 다시 핀다."
잠시 말이 끊겼다. 정태가 연기를 뿜어내면서 말했다.
"소희는 잘 지내지?"
"응? 어…… 응. 뭐, 그렇지."
"너 내 전화번호랑 카톡 알지? 혹시 소희한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으응."
바람이 쌀쌀해서 경렬이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말했다.
"수현이랑은…… 연락 안되지?"
"……어."
말이 없어졌다.
가라, 응. 다음에 보자.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다시 주점으로 들어가는데 그 으슥한 곳에 모인 청춘들이 묘하게 멀어보였다.
수현과 소희. 잘생기고, 예쁜 선남선녀 커플. 그 모습을 동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때. 이수현, 너도 어딘가에서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