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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120화 (120/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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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FINALE : WHO AM I

요한의 눈이 어둠을 좇는다.

시계탑의 핸더슨을 죽였다.

그와의 싸움은 피 흘리며 치고 받는 육체의 투쟁이 아니었다. 그저 고요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늙은 마법사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짧은 눈맞춤이었다. 그는 죽음과 동행한 요한의 방문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과 운명에 천착했던 마법사는 그렇게 자신의 최후를 맞이했다. 요한이 내리는 죽음은 숙명이므로 그에게 죽은 것들은 모두가 천수를 누린 것이다.

하지만 문을 열고, 핸더슨에게 걸어가 죽음을 선고하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과도 같았다.

한 걸음마다 백 년을 지새워야 했다. 해가 뜨고 밤이 내리는 것을 수천, 수만번 반복했다. 그 사이에서 해가 뜨고 지고, 비가 내리고 눈이 떨어졌다. 핸더슨은 때로 그와 함께 걸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하고, 낚시를 했다. 그리고 그 없는 외진 땅을 하염 없이 헤매기도 했다. 다시 한 걸음, 그만큼의 시간들. 지평선을 이어붙이고 황야를 방랑하듯이, 요한은 끝없이 핸더슨을 향해 걸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요한은 알 수 없었다. 백 년이, 천 년이 지난 것 같았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릴만큼 긴 시간이었다. 인식은 매몰되고 그저 계속해서 바뀌는 풍경을 걷고, 이따금 나타나는 핸더슨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다시 걸었다. 정신이 몇 번이고 무너지고 흔들렸으나, 요한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믿는 것은 하나이므로.

핸더슨은 그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아무리 잇고 기워도, 그는 결국 죽는다.

하늘로 던진 돌은 결국에는 추락하게 되어 있다.

이 세계는 그 포물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최후에 요한은 핸더슨을 만났다.

그는 문을 열었을 때와 같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요한은 그를 죽이기 위해 걸음마다 백 년을 감내하고, 맥박마다 되돌아오는 겨울을 지새워야 했다. 천 년을 만 년을 쉬지 않고 걸어 그 잿빛 눈동자로 핸더슨을 주시했다.

핸더슨이 말했다.

"숙명은 시간을 비껴가지."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오오."

"세계는 예정된 운명으로 수렴한다. 자유의지란 숙명과 숙명 사이의 짧은 휴지기에 지나지 않지."

"숙명과 숙명은 죽음과 죽음이오."

핸더슨의 눈이 식어간다. 요한의 공허에 질식하는 와중에도 그는 무언인가를 발견한 것만 같았다. 그의 표정이 변했다. 요한이 물었다.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이지?"

"아름답다."

"죽음이?"

"아름다워."

"우주의 최후가?"

"아이야. 미래를 보고 겁에 질려 우는 아이야."

핸더슨은 웃었다. 그의 몸에 차오르는 죽음은 이제 곧 치사량이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똑바로 보아라."

"무슨 소리를……."

핸더슨은 이제 요한을 보고 있지 않다. 그는 저 머나먼 것을 향한다.

"시간아 멈춰라……."

핸더슨은 속삭였다. 그의 눈은 이제 요한의 그것과 같이 잿빛으로 화했다. 핸더슨, 시간과 운명,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들여다보았던 그 마도사는 우주의 종언을 향해 유언했다.

"너는 아름답구나."

핸더슨의 고개가 기울었다. 웃는 얼굴 그대로 그는 숨을 멈추었다. 요한은 우두망찰해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핸더슨은 대답하지 않는다.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핸더슨을 죽이기 위해 너무 오래 헤맸다. 그는 이미 식어버렸으므로, 애초에 영이었다. 무엇을 곱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죽음을 담은 눈동자 요한이었다. 다른 어떤 방문자였다면 핸더슨의 까마득한 시간에 압도되어 미치거나, 자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애초에 재였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그는 변하지 않는 부스러기이다.

그리고 핸더슨이 준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요한은 그저 생각했다.

그곳에서 시간은 영원에 가까웠으므로, 모든 기억을 되새기고 생각할 수 있었다. 요한은 자신의 생의 모든 장면들을 떠올리고 다시 관찰했다. 그때에는 몰랐던 것들이 이제는 선명했다. 자신이 타고났던 능력과 선지자, 선고 받은 죽음. 우주의 최후에 절망하여 떠돌다가 이내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을 다시 되새겼다. 우주는 오묘해서, 모든 것들이 이치에 맞았다. 그는 요한이었고, 그는 선지자였다. 그리고 이제는 죽음을 선고하는 죽음의 눈동자이다. 세계는 유유한 강물처럼 순리대로 흐르고 있다.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 핸더슨을 죽인 지금까지 모든 것들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무엇 하나 어그러지는 것이 없었다.

하늘로 던진 돌은 결국에는 추락하게 되어 있다.

이 세계는 그 포물선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요한이 몸을 돌렸다. 핸더슨이 떨어진 지금, 런던은 황혼이다.

석양이 이 오래된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아니다."

요한이 중얼거렸다.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핸더슨의 시간 속에서 요한은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다시 관조했다. 자궁에서부터 밀어올려져 원치도 않은 세상에 낳음 당한 이후, 이 세계로 내던져진 이후로 그는 모든 것을 보았다. 모든 것들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하지만 나는 대체, 왜.

요한의 걸음이 더 빨라지다가, 이젠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헤치고 뛰었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렸다.

─ 나는 왜 그 녀석에게 키스했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저 가지의 잎사귀들.

바람이 부는 것이냐, 내 마음이 흔들린 것이냐.

그날 나를 너에게로 밀어올린 그 미풍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불어든 것이었을까.

***

문득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막연하게 가슴이 뛰었다. 무엇인가 나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수현이 손을 뻗어서 수화기를 잡아들자, 그 벨소리는 멈췄다.

전화선 너머의 누군가를 마주하는 적막.

수화기를 귀에 대었을 때, 어떤 이상한 것이 도사릴 것인지. 수현은 말하기 전에 잠시 방안을 돌아보았다. 다들 자기가 하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벨소리에 사로잡힌 사람은 수현 하나뿐인 것만 같았다. 수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보세요."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적막이, 이브린이 보는 티비의 소음이 수현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수현이 다시 말했다.

"여보세요."

그때 귀에 잡힌 것은 낮은 숨소리.

저 너머의 발신자가 낮게 웃는 듯한 숨소리.

수현은 침묵했다. 저 너머에서 누군가가 말을 할 것이다…… 실은 아주 평범한 전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의 집 전화번호를 아는 것은 수현과 네 여자…… 이따금 주문하는 음식점…… 아니면…….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수현이야?]

그 목소리였다.

어디에선가 들은 듯한 그 목소리에 수현은 잠시 말을 잊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많이 들었었고, 많이 이야기했고, 수많은 것들을 공모했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은 여전히 먹먹해져온다.

누구인지는 기억할 수 없다.

"누구세요?"

[기억 안나?]

수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막연한 느낌은 그녀의 말로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가슴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러나 기억할 수 없는 그 누군가였다.

[문 열어.]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그리고 처음 전화벨이 울렸던 것처럼, 도어벨이 울렸다.

수현은 잠깐 집안을 돌아보았다. 올가는 이브린과 함께 티비를 보고, 정하는 창틀에서 커피를 들고 책을 읽는다. 예브게냐는 알 수 없는 사업들을 골몰하고 있다. 이 평온한 일상이 지금, 문을 연 후에도 유지될 것인가. 발밑이 부서져버릴 것처럼 위태롭다. 수현은 그 위태로운 걸음을 옮겼다.

수현이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었다.

저 멀리, 문이 열리고 정원의 돌길을 밟아 다가오는 호리호리한 인영이 있었다.

어느새 정하와 예브게냐, 올가와 이브린도 눈을 돌렸다.

바깥은 어두워 그가 누구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 칠흑은 마치 수현의 그것과도 같이 어둡다.

똑.

똑.

똑.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

수현이 문을 열었다.

바깥의 바람이 새어들어오며,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천천히 드러나는 방문자의 모습에 수현은 숨을 죽였다.

"……."

머리카락은…… 밤을 그러모은 듯 새까맣다.

피부는 희고, 눈동자는 다시금 칠흑처럼 까맣다.

조금 마른 듯이 호리호리한 체형.

아름다운 얼굴.

뒤에서, 정하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올가가 숨을 들이마셨다. 예브게냐의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수현은 알 수가 없었다.

"잘 지냈어?"

수현, 그 자신의 얼굴을 한 방문자.

수현과 쌍둥이처럼 닮은 소녀가 미소짓고 있었다.

"반가워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야?"

그녀가 양 손을 뻗어왔다. 수현은 홀린 듯이 마주 양 손을 들었다. 둘의 손이 마주치고, 깍지를 낀다.

"보고 싶었어."

누구,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떠오를 것만 같다. 누구더라. 누구였더라.

"내 동생."

수현은 생각했다.

나에게 누나가 있었나. 나는, 부모님이 있고, 그리고 외동 아들로…….

부모님은…….

수현이 돌아보았다.

모두 놀란 얼굴로 그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브린의 눈만이 고요하다.

수현의 애타는 눈길에 이브린이 입을 열었다.

"다시 묻지. 주인은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모님은……."

해외에 머무르면서 돈을 부치는.

애정은 주지 않은, 그러나 미워하지는 않는.

그러한 역할일 텐데.

이브린이 말했다.

"주인의 부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혼란스럽다.

"주인에게 매달 이체되는 돈들은 주인의 부모가 아니라,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입금되고 있었다. 마치 전산상에서 돈들이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수현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다.

"다시 묻겠다."

그녀가 발꿈치를 들어 수현에게 입을 맞추어 온다.

멀리에서, 이브린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흘러들었다.

"주인은 누구인가?"

수현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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