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19화 (119/180)

0119 / 0180 ----------------------------------------------

27. 어둠은 빛의 부재

창고에 드리운 어슴푸레한 조명이 그네들의 얼굴 윤곽을 뭉그러뜨린다. 때문에 콧날이 도드라지고 사람들 얼굴의 흠결들이 눈에 띄지 않게 가라앉는다. 사람의 얼굴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일명 화장실 조명 효과가 지금 이곳 창고에 일어나고 있었다. 때문에 술에 취한 클랜원들은 서로를 보며 조금씩 눈이 맞기 시작했다.

수현은 어쩌다가 왼쪽에 주경, 우측에는 이름 모를 귀여운 누나를 거느리게 되었다. 둘도 이미 잔뜩취해 수현에게 달라붙어 지분거리며 서로를 견제했다. 수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벌써 키스를 하는 커플도 있었고, 둘러 앉아 진지하게 인생의 좆같음을 토론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그러나 수현이 주시하는 것은 오로지 저 너머 요요히 빛나는 미카엘이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는 그는 규혁의 곁에서 그와 클랜원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며 미소짓고 있다.

그는 사철 영롱한 빛이다.

수현은 알 수 있었다. 빛은 어둠을 보지 못하나, 어둠은 언제나 그늘에서, 모든 것들의 가장자리에서, 골에서 뒤에서 빛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안식을 모르는 자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모든 것들은 아름다웠던 꿈을 그리워하며, 영원같은 적막과 밤에 드문드문 빛나던 그 별들을 그리며 눈을 떠야할 것이다.

그래서 그가 어쩐지 가엾어졌다.

문득 미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빛나는 금색 눈동자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그의 머리가 찰랑거리며 은은한 빛이 번져들었다. 수현이 눈을 깔고 곁에 앉은 누나들의 손장난을 받아주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미카엘은 여전히 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집요한 눈길에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 언제보다 평온한 기분이었다.

이리 와.

미카엘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그의 의도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선행을 하고, 또 악행을 하는 자다.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한 두 누나가 칭얼댔지만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자리를 옮겼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나 음식들을 피해 그에게로 갔다. 규혁이 신이 나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 왔구나 꼬마! 여기 앉아."

미카엘이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쳐서 앉으라는 뜻을 전했다. 수현은 그의 곁에 앉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그는 가만히 수현을 쳐다보았다.

곁에 그가 앉아 있으니 어둠들이 일제히 허물어졌다. 수현은 온몸의 근육이 빠져나간 듯한 기묘한 탈력감을 느꼈다. 그래서 규혁이 술잔을 건내줄 때도 그것을 놓칠 뻔했다. 수현은 술잔을 들어올리며 미카엘을 곁눈질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깃든 의도는 알 수가 없다.

미카엘이 말했다.

"이름이 뭐지?"

"이수현입니다."

"수현. 수현……."

미카엘이 중얼거렸다.

"미카엘 누님! 설마 이런 꼬마가 취향입니까!"

규혁이 벌개진 얼굴로 신이 나서 장난을 쳤다. 미카엘은 그 애매모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나 누님 아닌데."

"형님도 아니고 누님도 아니면……."

"나는 미카엘이다."

미카엘이 수현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다가올수록 일말의 어둠조차 스러지고, 수현은 무방비가 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여자로도, 남자로도 보이고 선행을 하고, 악행을 하는 자지."

그의 손이 수현의 턱끝을 잡았다.

미카엘의 얼굴이 다가왔다. 가까운 곳에서 멈추어, 그는 수현을 응시한다. 이마에서부터 입술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들여다보다가 이내 수현의 눈을 향했다. 수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자신을 주시한다는 거, 기묘하게 들뜨는 기분이었다. 수현은 손을 들다가…… 이내 떨어뜨린다.

미카엘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미카엘은 수현의 체취를 들이마셨다가…… 뱉는다. 수현은 살짝 움츠렸다가…… 몸을 편다. 수현이 눈을 내리깔았다가…… 들었다. 미카엘은 입술을 더 가까이 대려다가…… 물린다. 수현은 턱을 비껴 그의 손을 벗어났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미카엘이 말했다.

"한국이 정말 좋아졌어."

그 말을 들은 규혁이 옆에서 두 유 노우 싸이? 두 유 노우 김치? 하고 말했다. 미카엘은 신경쓰지 않았다.

"모르겠네…… 너는 누구니?"

"……."

"예전에 널 본 적이 있었나? 모르겠다.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왔지만, 이래서 나는 아직 살 수 있는 거지. 나는 잘 잊거든."

미카엘이 혼잣말하며 술을 마셨다. 천사 같은 외양과 다르게 소주를 아주 제대로 마실 줄 알았다. 수현도 몸을 돌려서 한 잔 마셨다.

"한국에는 왜 오셨어요?"

수현이 불쑥 물었다. 미카엘이 말했다.

"듣고 싶은 게 있었어."

수현은 곁의 규혁을 보고, 그것이 그의 능력 권능언령살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미카엘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이겠지. 미카엘이 말을 이었다.

"그것들은 내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거든. 나는 잘 잊지만, 어떤 것들은 절대 잊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가끔 서랍을 열어 오래된 사진첩의 먼지를 쓸어내듯 그 기억들을 되새겨야 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거니까. 나는 그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추억해. 나는 그것 때문에 왔어. 나를 기쁘게 하지만, 또 슬프게도 하는 그것을 위해서."

"그래서 들으셨나요?"

"응. 좋았어."

수현은 무슨 말인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규혁이 술을 새로 가져왔다. 미카엘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이런 사람도 술을 즐기는구나. 수현은 그를 따라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

수현이 집에 돌아왔을 때 다들 깨어 있었다. 정하는 창틀에 비스듬히 걸터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예브게냐는 식탁에 서류를 이것저것 늘어놓고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올가와 이브린은 쇼파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수현이 들어가자 네 여인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수현은 술기운을 굳이 몰아내지 않아서 살짝 취한 기분이었다.

수현이 올가의 곁에 앉았다. 올가가 킁킁거리더니 수현에게서 나는 술냄새에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으으. 주인님 술 드셨죠."

"응."

"이건 소주 냄새. 와인 냄새는 좋은데."

"어쩌다보니.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올가가 수현에게 기댔다.

올가가 문득 장난스럽게 말했다.

"주인님이 이렇게 술 드시고 다니는 거 알면, 부모님 마음 아프실 거에욧."

수현이 아무 말도 않자 올가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았다. 올가가 수현의 팔을 잡았다.

"어. 주인님 기분 상했어요?"

"응?"

"표정이 안좋아요.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해요."

"아냐."

수현이 손사레를 치는데, 옆에서 정하가 말했다.

"주인님은 부모님 언급하면 기분 안좋아져."

"맞아."

예브게냐가 동의했다. 수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랬었나. 딱히 감정은 없는데. 수현이 멍하니 영화를 바라보았다. 중간에 봐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가족애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가족애라. 미카엘, 그에게도 가족이, 부모가 있을까. 수현은 졸려서 눈을 깜빡거렸다. 문득 혼자 말이 없는 이브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는 정하와 예브게냐가 수현을 부모에게 반항하는 사춘기라며 놀리고 있다. 막상 만나면 수현은 엄청난 마마보이일 것 같다고도 평했다. 올가도 배실배실 웃는데, 이브린은 그저 영화를 보고 있었다.

수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브린이 고개를 돌렸다.

"에이-요. 주인."

에이 요라니, 요새 이브린이 해외 드라마로 눈을 돌리긴 했다.

이브린은 수현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묘한 얼굴로 물었다.

"주인은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

화제가 왜 이쪽으로 들어오는 거지. 수현은 쇼파에 기대며 대충 대답했다.

"뭐, 별로. 그냥 부모님이지. 별 감정은 없어."

"흐음……."

이브린은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수현은 올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확실히 기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수현은 더 생각하기 싫어서 그냥 눈을 감았다. 미카엘은 묘한 사람이었다. 정말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고 종 잡을 수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기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 나 씻어야겠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가의 손을 잡고 위층 욕실을 향하려는데 문득 전화벨이 울렸다. 늘 듣던 그 소리인데도, 불현듯 적막을 깨는 그 소리가 수현은 왠지 낯설었다. 어디선가 그를 찾는 전화벨을 울린 그는 누구일까. 수현이 손을 뻗었다.

0